지난 11일 초저녁. 오랜만에 홍대 앞을 걸었습니다. 길거리는 일부 핫플레이스를 제외하면 이상하리만치 조용했습니다. 문 닫은 가게가 많았고, 음식점에도 손님이 별로 없었습니다. 같이 걷던 동료에게 “혹시 오늘 월요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목요일이라고 했습니다.
약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들렀습니다. 늦은 시간인데 두 명의 젊은이가 멀찍이 떨어져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었습니다. 술 때문인가, 왠지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집에 돌아와 책상에 앉으니 한 젊은 후배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리 세대는 빚과 함께 살아요. 학자금 대출을 갚고 나면 전세자금 대출을 받고, 다 갚고 집이라도 사면 또 빚을 내야하구요. 학자금이라도 부모가 갚아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으면 삼겹살도 사치인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친구들이 ‘영끌’까지 했다면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다음 날 편의점 도시락 판매량을 알아봤습니다. 순대국밥 한 그릇에 1만원을 하는 세상, 쪼들리는 사람들의 선택지가 그곳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예상대로 한 편의점에서 작년 한 달에 평균 230만 개가 넘는 도시락이 팔렸습니다. 2022년보다 한 달에 20만 개가 더 나갔습니다.
‘악순환’이란 단어가 스쳤습니다. 금리가 올라 이자부담은 늘고, 대출 많은 사람들이 지출을 줄이고, 그 결과 내수 위축으로 음식점 등 자영업자는 더 어려워지고, 고용시장은 더 차가워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 발단은 부채였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빚의 무서움을 몰랐던 것은 젊은 세대뿐 아니었습니다. 2000년대초 카드사태로 신용불량자가 400만 명에 육박하는 일이 있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칠 때도 빚은 경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이후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저금리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기회비용이 가장 낮은, 위험을 감수하는 리스크 테이커들이 승자가 되는 시대가 10여 년이 이어졌습니다.
모두 관대한 부채에 길들여졌습니다. 정부, 기업도 마찬가지였지요. 정부부채 비율 급증과 프로젝트파이낸싱의 위기도 그 결과입니다. 한국의 총부채 6000조원, 7000조원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 됐습니다. 한순간에 고금리 시대로 진입하니 충격이 큰 것도 당연합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부채를 다뤘습니다. 올해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화두가 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빚에 대한 가치 판단은 경제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빚도 좋은 빚과 나쁜 빚이 있습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이 조선소를 지을 때,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동맥 역할을 한 전기기관차를 들여올 때도 모두 시작은 빚이었습니다. 좋은 빚이었습니다. 반면 카리브해에 있는 아이티란 나라는 빚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식민지 해방운동을 통해 독립했다는 이유로 프랑스가 이익을 침해당했다며 부과한 빚. 이 빚을 아이티는 100년간 갚았습니다. 그 과정을 거치며 아이티는 진흙빵, 빈곤, 불행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을 짓누르는 부채에도 좋은 빚이 있고 나쁜 빚이 있습니다. 나쁜 빚은 시급한 대책으로 치유해야 하고, 좋은 빚은 나쁜 빚으로 바뀌지 않도록 하는 관리와 선제적 조치도 해야 할 듯합니다.
그 출발점은 객관적 인식입니다. 부채 때문에 나라 망한다고 호들갑 떨 필요도 없습니다. 베네수엘라 꼴 난다고 그렇게 떠들었지만 아직은 잘 버티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부채가 대부분 자산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 없다는 안일한 생각도 경계해야 합니다.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부채의 시계가 개와 늑대의 시간에 도달했다”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전략 전문가인 윌리엄 더건 컬럼비아대 교수는 전략이 탄생하는 순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진흙이 가라앉고 물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려라. 두 눈을 크게 뜨면 통찰력이 찾아온다.” 한국의 부채 현실에 대한 냉철한 관찰과 분석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입니다.
김용준 편집국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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