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인은 마치 아버지가 뒤에서 안아주는 것 같은 포근한 느낌”이라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어가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창밖에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사연이 궁금해 따로 만나 물었다.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아버지가 한 달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세상 누구와도 가슴속 아픈 사연을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오늘 마신 와인에서 강렬한 아버지 향기를 발견했다고. 와인 테이스팅이 부녀의 정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한 것이다. ‘와인은 가슴으로 마시는 술’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아버지 사랑 가득 담긴 피노 누아는 과연 어떤 술일까. ‘와인의 여왕’이란 별명을 가진, 프랑스 북동쪽 부르고뉴 지방의 대표 품종이다. 레드 와인 중 타닌이 가장 적고 산딸기나 체리 등 상큼한 과일 향이 특징.
그러나 정작 농부들은 피노 누아를 싫어한다. 껍질이 얇고 포도송이가 촘촘해 병충해나 냉해에 약하기 때문. 리스크가 큰 작물이다. 날씨가 조금만 더워도 잎사귀와 열매가 타 들어가고, 비 오는 날이 많으면 곰팡이가 슬어 작황이 뚝 떨어진다고.
고통스럽기는 와인메이커도 마찬가지. 피노 누아는 토양이나 기후 등 자연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생산지별로 맛과 향에서 차이가 난다. 와인 품질 규격화에 어려움이 많다.
특히 단일품종만 사용해 양조하기에 포도 수급도 어려운 편.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가격이 비싸다.
실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널리 알려진 로마네 콩티의 포도품종이 바로 피노 누아. 소믈리에들 사이에서는 ‘피노 누아에 빠지면 집안 말아 먹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레스토랑 ‘트랑블루 1647’(서울 강남 소재)의 박순석 오너 소믈리에는 “피노 누아 와인의 가장 큰 경쟁력은 섬세함과 신선한 과일 향”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최근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재배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어 제 맛과 향을 내는 와인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박 소믈리에가 추천한 피노 누아 와인은 ‘모비아 모드리’. 이탈리아 콜리오와 슬로베니아 브르다 지역에서 재배된 피노 누아 100%로 양조됐다. 특히 자연효모 발효와 프렌치 바리크에서 48개월 숙성돼 2차 향이 강한 편이다.
국내에 소량만 수입되니 접하기 어렵다. 집중해서 마셨는데 생소함은 가시지 않았다. 첫 모금에서 신선하고 강렬한 과일 향을 만날 수 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잘 익은 자두와 블랙 체리, 장미 향이 순차적으로 올라온다. 후반 들어서는 계피, 가죽 향과 함께 쌉쌀한 맛이 강하게 나타나 스테이크와 잘 어울렸다.
그러나 프랑스 부르고뉴는 물론이고 미국이나 칠레 등 신세계 피노 누아 와인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에 대해 박 소믈리에는 “지중해성 온화한 기후와 알프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와인의 산도와 아로마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트랑블루는 과거 프랑스 파리와 터키 이스탄불을 오가던 특급열차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콘셉트의 프렌치 다이닝바. 내부 인테리어도 당시 기차 실내분위기를 연출, 앉아 있으면 마치 여행자처럼 가슴 두근거린다.
작년 12월 프랑스 국립요리학교 출신 셰프와 슬로베니아에서 포도재배·와인양조를 담당하던 박 소믈리에가 의기투합, 문을 열었다. 모비아 등 슬로베니아 와인을 주제로 다양한 디너행사도 개최한다.
김동식 와인 칼럼니스트 juju433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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