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사측의 단체교섭 거부는 부당노동행위’ 인정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시내 CJ대한통운 사업소에서 직원이 택배물품을 옮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시내 CJ대한통운 사업소에서 직원이 택배물품을 옮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CJ대한통운이 특수고용직인 택배기사들로 이뤄진 전국택배노조의 단체교섭 요구를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1심에 이어 또 원청이 패소하면서 하도급 근로자들이 원청을 상대로 한 교섭권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평가다. 원청을 상대로 한 하도급 노동조합들의 교섭 요구가 한층 거세질 전망이다.

또 승리한 택배노조…“CJ대한통운, 노조법상 사용자”

서울고등법원 행정6-3부(홍성욱·황의동·위광하 부장판사)는 지난 1월 24일 CJ대한통운이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부당노동행위구제재심판정취소 소송에서 1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항소심 재판부가 특수고용 근로자에 대한 원청의 교섭 거부를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부는 “노동조합법상 사용자는 근로조건 등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를 포함한다”며 “단체교섭이 근로계약을 맺은 당사자 사이에서만 이뤄져야 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CJ대한통운의 경우 집배점에 집배송 수수료, 상하차 비용 등을 지원하고 간선차량 수, 출발·도착시간, 당일배송 의무 여부 등에 지배·결정 권한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택배노조와) 교섭할 의무가 있다”고 했다.

택배노조는 2020년 3월 CJ대한통운을 상대로 주 5일제와 휴일·휴가 시행, 수수료 인상 등 여섯 가지 사안에 대해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CJ대한통운은 “직접 근로계약을 맺지 않아 교섭에 응할 의무가 없다”며 거부했다. 택배노조는 고용노동부 산하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했지만 각하됐다.

하지만 7개월 후인 2021년 6월 중앙노동위원회가 “택배노조는 CJ대한통운과 단체교섭할 권리가 있다”고 판정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당시 중노위는 “CJ대한통운이 택배기사 업무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이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며 지노위 결정을 뒤집었다.

이에 불복한 CJ대한통운은 그해 7월 판정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냈지만 1심을 맡은 서울행정법원은 중노위의 판정이 정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과거 이와 쟁점이 똑같은 소송에서 원청이 승소했던 것과는 정반대 결과였다. 전국금속노동조합은 2017년 HD현대중공업을 상대로 “단체교섭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냈지만 1·2심에서 연달아 패소했다. 현재 대법원이 이 사건을 심리하고 있다.

하도급 노조 단체교섭 요구 쏟아지나

연이어 승소한 택배노조는 CJ대한통운에 더욱 강하게 단체교섭을 요구하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진경호 택배노조 위원장은 2심 판결 선고 직후 “오늘의 판결은 ‘진짜 사장 나와라’라며 7년을 넘게 외쳤던 특수고용직 근로자와 간접고용 근로자들의 외침이 옳았다는 것을 법적으로 확인한 것”이라며 “CJ대한통운은 즉시 택배노조와의 단체교섭을 진행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CJ대한통운이 상고하면 교섭응낙 가처분신청을 하고 강력한 투쟁에 돌입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CJ대한통운은 “무리한 법리 해석과 택배 산업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판결에 동의하기 어렵다”며 “판결문을 면밀히 검토한 뒤 상고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은 산업계 전반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하도급 노조가 원청을 상대로 공격적으로 단체교섭을 요구할 근거가 더욱 탄탄해졌기 때문이다. 법조계에선 단순히 1·2차 하도급 업체를 둔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용역업체에 경비나 청소 등을 맡기는 기업까지도 수시로 단체교섭 요구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중노위가 택배노조의 원청 교섭권을 인정한 뒤 산업계에선 하도급 노조가 원청에 교섭을 요구하는 일이 잇따랐다. 현대자동차·기아, 현대제철, HD현대중공업, 롯데글로벌로지스, 한국GM 등이 이 같은 문제로 법적 다툼을 진행 중이다.

대형 로펌 노동담당 변호사는 “하도급 근로자들의 단체교섭을 요구하는 모든 사안에서 원청이 실질적 지배력이 있는지 판단하긴 쉽지 않지만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다가 부당노동행위로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많은 기업이 매번 교섭 요구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법조계에선 HD현대중공업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까진 하도급 노조의 원청 교섭권을 두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대법원은 2018년 말부터 이 사건을 5년 넘게 심리하고 있다. 올해 안에는 결론이 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돋보기]
‘노란봉투법’ 입법 움직임에도 다시 힘 실리나

CJ대한통운이 2심에서도 택배노조와 단체교섭할 의무가 있다는 판결이 나오면서 노동조합법 개정안(노란봉투법) 입법 움직임에 다시 불이 붙을지에도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노란봉투법의 핵심 내용을 법원이 또다시 인정해주면서 노동계의 입법 주장에 힘이 실릴 수 있게 돼서다.

노란봉투법은 당초 더불어민주당이 준비할 때만 해도 불법 파업 등을 저지른 노조와 조합원에 대한 사용자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막바지에 하도급 근로자가 원청과 단체교섭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발의됐다.

근로계약 체결의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지배·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자도 사용자로 본다는 조항이 새로 추가됐다. 노란봉투법은 여당의 반대에도 민주당 등 야권이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2023년 11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입법이 무산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법원이 사실상 노란봉투법의 내용을 인정해주는 판결을 내놓자 노동계는 “다시 입법을 추진할 정당성이 입증됐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은 이번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노란봉투법에 대한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부당함이 명백히 밝혀졌다”며 “간접고용 노동자와 특수고용직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원청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고 노란봉투법 개정을 쟁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도 같은 날 “법과 원칙을 노동자와 노조 탄압에만 쓸 것이 아니라 불법·부당한 사용자 행위에도 적용해야 한다”며 “정부와 여당은 원청이 실질적 사용자로서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노란봉투법 개정에 협조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숨을 돌렸던 경영계는 다시 비상이 걸린 분위기다. 수많은 하도급 노조가 원청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고, 원청이 교섭에 응하지 않을 경우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길 수 있어서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1월 24일 성명을 통해 “이번 판결은 명시적·묵시적 근로계약 관계가 없는 원청기업은 하도급 노조의 단체교섭 상대방이 아니라는 기존 대법원 입장과 배치된다”며 “교섭창구단일화 제도의 취지가 무색해질 뿐만 아니라 원청기업을 상대로 한 하도급 노조의 교섭 요구와 파업, ‘실질적 지배력’ 유무를 다투는 소송으로 산업 현장이 몸살을 앓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진성 한국경제 기자 jskim102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