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일본의 덴푸라가 있기까지 긴 시간, 긴 여정이 있었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인에게 전수받은 덴푸라는 지금의 그것과 사뭇 달랐던 모양이다. 설탕, 소금, 약간의 알코올로 조미된 밀가루를 썼고 정제한 돼지 비계 라드로 튀겼다. 이 방식을 물려받은 나가사키 덴푸라는 서양 음식 프리터(fritter)에 가까웠다 한다.

당시 일본에 별도의 튀김요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나라(奈良) 시대부터 헤이안(平安) 시대까지 중국에서 유입된 튀김 음식이 있었고 밀가루가 아닌 쌀가루로 반죽했다고 주장한다. 문헌과 사료의 신빙성을 따져야 하니, 그 진위는 논외로 하자.
17세기경 덴푸라는 오사카와 교토를 아우르는 가미가타(지금의 간사이) 지역으로 퍼졌다. 이때 참기름과 콩기름이 라드를 대체했는데 그 동인은 불교였다. 당시 나라와 교토는 불교의 구심점이었고 가미가타 전역에서 사찰과 승려들의 영향력이 컸다. 야채 덴푸라가 승려 음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돼지기름 라드도 배척된 것이다.

세속의 힘이 붙기 시작한 것은 동쪽으로 이동하면서였다. 18세기 후반 에도(江戸)에 정착한 덴푸라는 대중음식으로서 정체성을 굳혀 나갔다. 도쿄의 옛 이름인 에도는 신선한 해산물이 풍부했다. 채식 전통을 깨고 새우, 굴, 작은 생선, 치쿠와 어묵 등이 튀김 속 식자재 ‘타네’ (혹은 네타)로 부상했다.

목재 상점가는 화재가 빈번했다. 이 때문에 강한 인화성의 기름을 쓰는 덴푸라의 실내 조리가 금지됐다. 그러자 상인들은 니혼바시 어시장 천변에 형성된 포장마차(야타이)로 몰려갔다. 이즈음 스시도 길거리 음식 대열에 끼게 된다.

저잣거리의 음식으로 탈바꿈한 덴푸라는 급속히 대중화됐다. 노점의 특성상 서서 먹는 타치구이(立ち食い)가 유행했고 접시 대신 꼬치 형태로 판매되기도 했다. 그 결과 아래 그림처럼 덴푸라는 스시, 소바와 함께 에도 시대 3대 인기 요리로 등극했다.
500년 역사의 일본 덴푸라…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최정봉의 일본 관광객이 묻는다]
에도시대 덴푸라 노점상. 그 밑으로 소바와 스시 판매대. (에도피디아) 덴푸라 기름과 계층분할
기름 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생선 비린내 억제에 좋은 참기름이 덴푸라에 널리 쓰였다. 단, 탄화가 빨라 튀김옷 변색이 심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노점상들의 짙은 갈색 튀김은 ‘쿠로(黒) 덴푸라’로 조롱받았다.

망사 국자로 튀김 부스러기 텐카스(또는 아게타마)를 연신 퍼내는 이유도 기름 산화를 늦추고 변색을 줄이기 위해서다. 물론 그렇게 모은 텐카스는 우동 국물의 토핑이나 다른 요리 재료로 재활용됐지만 말이다.

참기름은 저렴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덴푸라가 서민음식으로 자리 잡기에 약간 부담스러웠다. 가격 장벽을 깬 것은 값싼 유채기름(오늘날의 카놀라유)이었다. 덴푸라의 계층 저변 확대에 공이 크다.

갓 튀긴 덴푸라 하나씩만 고객에게 올리는 ‘오자시키(お座敷)덴푸라’는 최상급 타이하쿠 기름을 사용했다. 볶지 않은 깨에서 추출된 기름이다. 그 결과 튀김색은 맑은 레몬색이 되고 아삭한 질감은 더 살아났다. 동백유나 면실유를 사용하기도 했다.

튀김옷에서 소금과 여타 양념을 완전히 뺀 것도 에도 스타일의 특징이다. 대신 간장, 미린, 다시를 같은 비율로 섞은 텐츠유가 쓰였다. 기름의 느끼함을 잡기 위해 강판에 간 무(다이콘 오로시)를 곁들이는 것도 이때부터였다.

텐츠유는 우마미를 높이지만 단맛도 강해서 호오가 갈렸던 모양이다. 섬세한 미감 소지자들은 튀김을 눅눅하게 만드는 텐츠유와 오로시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고급 식당은 녹차나 유자 분말을 뿌린 소립자 천일염을 제공했다.

18세기 중엽 에도에서 유행한 일련의 방식을 ‘에도마에(江戸前)’ 덴푸라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원형이다. 이 시기 등장한 스시 제조 방식도 ‘에도마에 스시’라는 이름을 지녔다. 단순 지리 명칭이 아니다. 혁신적 음식 메카의 자부심이 배인 칭송이다.
500년 역사의 일본 덴푸라…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최정봉의 일본 관광객이 묻는다]
오자시키 덴푸라 전문점 빙어튀김 (사진: 텐코) 기술과 식재료의 근대적 진화
진화는 계속됐다. 메이지유신을 거쳐 19세기 후반에는 얼음물이나 찬물 반죽이 시작됐고 엉김 방지를 위해 가느다란 도구로 반죽을 휘젓는 방법도 퍼졌다. 외국에서 유입된 베이킹 파우더를 튀김옷에 섞기도 하고 일반 물 대신 탄산수를 이용하는 실험도 이어졌다.

베이킹 파우더와 탄산수가 섞인 반죽은 표층막에 기포를 만들어 수분 배출을 차단하고 재료의 탄력을 강화해 준다고 한다. 찬물을 뒤집어쓴 후 한증막에 들어가 발한을 하는 것과 유사한 효과일까? 이렇게 녹녹해진 속재료가 바삭한 튀김옷과 어우러지면 몰아지경의 ‘겉바속촉’이 완성된다.

일본 덴푸라의 정수가 튀김 기술이란 믿음에 대해 정작 요리사들은 “7할의 재료, 3할의 기술” 혹은 “7분의 재료, 3분의 튀김”이라 말한다. 3분 튀김의 성공은 보이지 않는 준비와 정성이 결정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재료의 수분 조절, 두께 측정, 조리와 섭취에 맞는 모양 구상 등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슌(旬)’이라는 개념도 무척 중요하다. 가장 신선하고 건강한 시기 재료의 선별적 섭생, 우리말로 제철음식 콘셉트이다. 야채 덴푸라야말로 슌의 핵심이다. 기본은 당근, 고구마, 양파, 감자, 우엉, 죽순, 애호박, 단호박, 연근, 표고버섯 등 뿌리채소들이 구성한다.

외국 관광객 다수가 즐기는 요리인 만큼 색감 좋은 해외 야채들도 편입됐다. 피망, 브로콜리, 콜리플라워, 오쿠라, 꽈리고추, 아스파라거스 등이 대표적이다. 다루기 까다로운 김, 다시마, 시소, 심지어 상추 같은 엽채류까지 합류해 라인업이 풍성해졌다.

당연히 덴푸라의 꽃은 새우다. 지역마다 다양한 종류를 쓰고 여러 튀김 방식이 각축했지만 역시 왕새우(대하)가 ‘국가대표’다. 제철 맞은 오징어, 가리비(호타테), 게 등 갑각류도 단골 메뉴 중 하나다. 생선의 경우 은어, 붕장어(아나고), 장어(우나기), 전갱이 등이 대중적이나 도미, 대구, 명태 같은 흰살 생선도 종종 오른다.

참치, 연어 같은 붉은 살 생선은 매우 드물다. 포르투갈 가톨릭 사제들이 금식기간에 붉은 고기 대신 야채와 흰살 생선만을 고집한 것과 연관됐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고등어, 청어, 꽁치, 삼치류의 푸른 생선 덴푸라도 드문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정설이라 확신하기 힘들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파생도 꽤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토리텐(혹은 카시와텐)이라는 닭고기 덴푸라를 즐긴다. 한국에 잘 알려진 마루가메 제면의 메뉴에도 등장한다. 소고기나 돼지고기 버전도 각각 ‘니쿠텐’, ‘부타텐’이란 이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서얼’ 덴푸라들이 적통을 흐리지는 못한다.

수세기 동안 진화해 온 덴푸라는 20세기 중반부터 세계인의 음식으로 입지를 굳혔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맞물려 일본 음식에도 상당한 프리미엄이 붙었다. 그 중심에 섰던 것이 문화적 거부감이 없는 덴푸라였다.

1959년 쇼와산업(昭和産業)은 세계 최초로 튀김가루를 출시했다. 밀가루, 옥수수 전분, 달걀가루, 베이킹 파우더를 섞어 만든 튀김가루는 까다로운 반죽 공정의 문턱을 낮췄다. 이로써 덴푸라가 해외의 요리 초심자도 도전할 수 있는 가정 간편식으로 자리매김되는 계기를 세웠다.

판매 초기 일본 소비자들은 미온적인 태도였으나 오히려 일식 붐이 일던 미국의 반응이 뜨거웠다. 밀가루에 비해 글루틴 함량이 적고 기름을 잘 흡수하는 전분 덕분에 바삭한 맛을 살리는 장점이 주효했다. 196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시한 ‘쇼와 튀김가루 믹스’는 지금까지도 국내외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으며 당시 사용한 로고와 패키지 그대로를 보존한다.
500년 역사의 일본 덴푸라…나가사키에서 에도까지[최정봉의 일본 관광객이 묻는다]
1960년 미국 LA에 출시한 쇼와 덴부라믹스. (사진: 쇼와산업)

소비가 대중화되면서 전 세계 컵라면 1위 닛신(日清)도 경쟁에 뛰어들었고 시장 규모가 커지자 간장업계 선두주자 키코만 (Kikkoman)도 뒤를 이었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초반 식용유 사용이 보편화되었지만 정작 판매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990년대였다.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건 덴푸라 맛에서 알 수 있지.” 아버지가 생전에 하시던 말씀이다. 문화적 편견이 다분한 발언이지만 일본 덴푸라의 뛰어난 맛과 정교한 기술에 대한 평가만큼은 반박할 수 없다. 외래 문물에 자신들의 독특한 스핀을 입히는 예술적 문화 가공력. 얄미움만큼 부러운 맘 감추기 힘들다.

최정봉 사회평론가, 전 NYU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