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거시변수 직면한 노무현·이명박 정부…아파트 시세 급등락 심화

[스페셜리포트: 보수의 부동산 VS 진보의 부동산…정권별 주택시장, 어떻게 변했나]
롯데월드타워에서 본 한강변 아파트 모습. 사진=연합뉴스
롯데월드타워에서 본 한강변 아파트 모습. 사진=연합뉴스
“집값이 귀신같이 떨어졌다.” 지난 2022년 6월 전 세계적인 금리 인상 여파로 주택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나온 말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지 채 몇 달이 안 돼서였다.

부동산 투자자들 사이에선 전부터 “보수 정부가 집권하면 집값이 떨어지고 진보가 집권하면 오른다”는 말이 오가고는 했다. 아이러니한 현상이었다. 보수는 성장을, 진보는 분배를 추구하는데 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진보 집권기에는 주택 시세가 가파르게 오르며 주택 보유자와 비(非)보유자 간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보수 집권기에는 온갖 부양책을 내놨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다. 부동산 시장은 유권자들의 예측, 또는 기대와 다르게 흘러간 측면이 컸던 셈이다.

이 같은 현상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제각각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대외변수에 따른 경기 등 거시경제가 부동산 시장 움직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 그리고 어느 정부든 주택가격의 급등락이 없는 ‘안정된 시장’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정책은 시장의 흐름에 따라 나온 결과적 측면이 크다는 얘기다.
IMF·금융위기로 탄생한 사이클, ‘진보는 상승·보수는 하락’ 법칙 시작돼[보수VS진보의 부동산①]
한국 경제는 1997년 말 IMF 외환위기와 2008년 리먼브러더스발 금융위기라는 두 번의 큰 충격을 받아야 했다. 이로 인해 경기는 침체와 회복에 따른 호황이라는 사이클을 반복했다. 경기의 파고 속에서 부동산 시장은 매우 탄력적으로 움직였다. ‘억대’가 넘게 오르내리는 가격과 임차가 가능하다는 상품 특성에 따라 상승기에는 투기부터 미래의 잠재수요까지 시장에 진입하는 반면, 하락기에는 내 집이 필요한 실수요자도 매매를 기피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각 정부는 원치 않는 급등락 상황에 직면하면서 시장 방향을 돌리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지난 정부의 정책을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아쉬운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대책이 산발적으로 나오면서 시장에 임팩트를 주기보다 정책에 대한 불신만 생겼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주택시장과 수요자들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컸다. 이는 미스매치로 이어졌다. 부동산 정책은 당장의 흐름을 바꿔놓기보다는 몇 년 후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규제는 규제대로, 부양책은 부양책대로 단기효과를 노리고 집행됐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 대책은 부동산 시장의 방향을 돌려놓지 못했다. ‘정치 불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집값에 누구보다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은 나라를 흔드는 변수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부동산 투기근절’ 내건 노무현 정부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APEC 1차 정상회의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APEC 1차 정상회의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졌다. 이듬해 1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미션은 분명했다. ‘경제회복’. 한국에서 경기를 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건설경기 부양이던 시절 DJ정부도 기업 구조조정이 궤도에 들어서자 건설 경기를 살리기에 나섰다. 분양가 자율화, 분양권 전매 허용, 양도세 면제 등 웬만한 규제를 다 풀어버렸다.

2001년 아파트 값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해 서울 아파트가격 상승률은 20%에 육박했다. 이듬해 대선 레이스가 시작됐다. 풀어놓은 규제, 건설업체 부도로 인한 공급부족은 아파트 수요를 자극했다. 경제도 살아났다. 2002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7.7%였으며 1인당 국민소득(GNI)도 외환위기 전 수준인 1만3000달러를 회복했다. 규제완화, 공급부족, 경제회복, 내집마련 욕구 등이 어우러지며 부동산 시장을 밀어올렸다. 서울 아파트값는 30% 넘게 올랐다.

부랴부랴 정부는 방향을 선회했다. 2002년 9월 투기과열지구를 지정하고, 규제지역 주택담보대출에 대해 LTV(담보인정비율) 60%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시장은 상승으로 방향으로 튼 상태였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하반기부터 대책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한 달이 멀다하고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는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부동산 정책 결정라인에서는 ‘토지 공개념’의 창시자 헨리 조지가 많이 언급됐다.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른 차익은 불로소득이므로 과세를 통해 환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정책은 투기과열지구, 투기지역 지정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실거래가 기준으로 양도세를 부과하고 투기지역 2주택자에 대해 양도세를 중과세하는 것 등이었다. 그 하이라이트는 ‘종합부동산세’ 도입이다. 10월 종부세가 조기에 도입되면서 분양권 전매금지, 투기과열지구 내 재건축 조합원 지분 전매금지 등 기존에 나왔던 정책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2004년 집값은 잠시 잡히는 듯했다. 특히 주요 규제 대상이던 서울과 수도권 매매가격이 하락했다. 탄핵정국과 행정수도 이전 등 정치 이슈로 사회 분위기가 혼란스러웠던 영향도 있었다.

그러나 한번 상승으로 방향을 잡은 시장은 한숨을 고른 후 다시 급등했다. KB부동산 아파트매매가격 지수를 분석한 결과 2004년 1.02% 하락했던 서울 아파트 가격은 2005년 9.08%로 10% 가까이 올랐다. 수요를 옥죄는 부동산 대책으로는 경기상승의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던 것이다.
재건축을 추진 중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 소재 은마아파트 전경. 사진=연합뉴스
재건축을 추진 중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 소재 은마아파트 전경. 사진=연합뉴스
2005년 시장을 흔든 변수는 재건축이었다. 1970~80년대 준공된 아파트 단지가 재건축을 바라보게 됐기 때문이다.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그 상징이었다. 대치동 은마아파트 전용면적 76㎡ 시세(KB부동산 일반평균가 기준)는 2004년 하반기 6억원 초반에서 5억원대로 떨어지며 주춤했다가 2005년 들어서며 반등하기 시작해 2006년 11월 10억원을 돌파했다. 불과 2~3년 사이 집값이 두 배 오른 셈이다. 서울에서 대치동 다음으로 학군이 좋은 목동신시가지 아파트도 높은 대지지분에 힘입어 가격이 급등했다.

한번 불붙은 아파트 가격 상승세는 강남과 목동을 거쳐 아파트 밀집 지역인 경기도 1기 신도시로 옮아갔다. 강남의 대안으로 부상한 분당 아파트가 급등했다. ‘천당 밑에 분당’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용인 대형 아파트 밀집 단지도 이 상승 대열에 올라탔다. 수도권 중산층이 주수요층이었다.

2006년 정부는 ‘버블 세븐’을 지정해 집중 관리하기 시작했다. 버블 세븐에는 서울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양천구와 경기도 용인시, 분당구, 평촌동(안양시)이 여기 속했다.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도 실시했다. 일명 ‘재초환’은 재건축 아파트 소유주들에 대해 부담금을 걷어 개발사업으로 발생하는 이익에 대해 과세하는 제도다. 그럼에도 이해 서울과 수도권 아파트 상승률은 24%를 넘어섰다.

참여정부의 아파트값 억제책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내놓은 대책으로 집값이 안 잡히면 다른 대책을 내놓는 식이었다. 2003년에만 대책이 7번, 2005년에는 3번의 대책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시장에는 면역이 생겨버렸다는 얘기도 나왔다.
IMF·금융위기로 탄생한 사이클, ‘진보는 상승·보수는 하락’ 법칙 시작돼[보수VS진보의 부동산①]
제대로 된 공급대책이 동반되지 않았다는 문제도 있었다. 입지, 규모, 시간 등 부동산 공급에 필요한 3가지 조건이 모두 결여돼 있었다. 2005년에야 2기 신도시 계획이 발표됐다. 뒤늦은 대책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신도시 건설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이 걸린다. “당장 집이 필요하다”는 시장의 요구와는 동떨어진 대책이었다.

입지도 문제였다. 위례와 판교를 제외하면 모두 1기 신도시에 비해 서울에서 먼 거리에 있는 지역이었다. 수요자들의 요구와 맞지 않았다. 다음은 아파트의 규모. 참여정부의 공급대책에 들어가 있는 공급계획 가운데는 임대아파트 비중이 꽤 높았다. 중대형 수요가 증가하는 당시의 상황과 맞지 않았다.

이 같은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의 실패는 노태우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소환했다. 1988년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 속에 등장한 노태우 정부는 토지공개념을 처음 도입하는 등 강력한 규제를 시행함과 동시에 ‘200만 호 공급’을 들고 나왔다. 실행도 빨랐다. 임기 후반인 1992년에는 수도권 실수요자가 가장 선호하던 강남 인근에 분당신도시 입주가 시작됐다. 지금도 분당, 일산 등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중산층이 선호하는 중대형 평형의 비율이 꽤 높았다. 강력하고 종합적인 임팩트 있는 규제와 수요자의 니즈에 맞는 빠르고 적정한 규모의 공급에 부동산 대책의 성패가 달려 있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미친 듯이 오르던 아파트 가격은 참여정부 마지막 해인 2007년에 가서야 3%대 상승으로 안정세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오를 만큼 오른 후였고, 정권의 향배에 큰 영향을 미친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은 혹한 평가를 받으며 마무리됐다.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을 묶어버린 덕을 본 것은 이명박 정부다. 리먼브러더스발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 한국은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부동산 관련 대출을 이전 정부에서 규제한 예상치 못한 효과였다. “시장 기능 되돌린다”던 이명박 정부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청와대에서 열린 만찬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 청와대에서 열린 만찬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08년 금융위기가 세계경제를 덮친 상황에 임기를 시작한 이명박 정부는 ‘시장 기능 정상화’를 내세웠다. 이는 지난 정부가 세운 규제를 풀고 시장을 자유화하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신문 부동산면에는 “부동산 훈풍 기대”라는 헤드라인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정권 초기 시장은 애매한 상황이었다. 지방에는 미분양이 쌓이던 반면 서울 등 수도권 집값은 아직 오르고 있었다. 고급 주상복합 ‘타워팰리스’로 부상했던 강남구 도곡동에 2006년 입주하며 마지막 상승기를 장식했던 ‘도곡 렉슬’ 아파트는 2010년 초까지도 가격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하향세로 접어든 시점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6월 지방 미분양 대책을 내놓는 한편, 석 달 후 보금자리주택 150만 호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공급으로 집값을 잡고 경기를 활성화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의도였다. 미분양 주택에 대한 양도세는 한시적으로 면제됐고 LTV 비율도 70%까지 완화됐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환배조건부로 미분양 주택을 사들이기도 했다.

대책은 먹히는 듯했다. 2008년 말 리먼 사태로 주저앉은 주택가격이 2009년 슬금슬금 오를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는 전면적인 종합부동산세 및 양도세 완화를 뒤로 미뤘다. 진보정부건 보수정부건 아파트값은 뜨거운 감자였다. 급격히 올라도 안 되고 떨어져도 안 되는 그런 것이었다. 참여정부가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정권을 내놓은 것을 목격한 이명박 정부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이전 정부의 정책효과까지 더해졌다. 노무현 정부에서 입안했지만 한 건도 분양이 없던 분양가상한제 아파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가격 상승을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또 전 정부에서 묶어놓은 대출규제도 다 풀리지 않았다. 급격한 상승기에 주택을 산 ‘하우스 푸어’ 문제도 이 시기에 터져나오면서 수요를 위축시켰다.

공급 측면에서도 이명박 정부 정책 보금자리주택은 강남 집값을 꺾는 역할을 했다. ‘반값 아파트’로 수요자들의 기대를 모았지만 택지 및 예산 확보 등의 문제로 계획된 150만호에 못 미치는 물량(20만호)이 공급됐다. 그럼에도 서울 인근 그린벨트를 풀어 조성됐기에 효과는 확실했다. 특히 시범지구로 선정된 강남 보금자리주택지구는 강남구 자곡동, 세곡동, 율현동 일대 94만㎡에 6000여 가구가 조성됐다. 공급 규모는 적었지만 당시 고분양가로 평가됐던 서초구 반포동 소재 ‘래미안 퍼스티지’ 일부 세대가 준공 후 미분양으로 남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집값이 떨어지던 상황에서 수요자들은 주택을 매수하지 않았고 민간주택 역시 활발하게 공급되지 못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매매로 전환되지 못한 실수요는 임차수요로 남았다. 다만 지방은 달랐다. 이명박 정부가 미분양 해소를 위해 규제를 풀어버린 지방광역시 집값은 크게 올랐다. 2011년 20%가 넘는 상승률을 기록했다.

서울 수도권 아파트 시장은 이명박 정부 내내 침체기를 겪었다. 서울 아파트는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간 하락세를 보였다. 한국 아파트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에 따라 이명박 정부는 뒤늦게 보금자리론 한도 확대 등 대출규제를 완화하는 한편 강남 3구까지 투기지역에서 해제했다. 서울 과천 및 5대 신도시 1세대 1주택자 양도세 비과세 요건 완화, 수도권 분양권 전매제한 기간 완화, 다주택자도 양도세 장기보유특별공제 허용, 강남 3구 투기과열지구 해제,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제도 폐지, 취득세 완화 등이 이어졌지만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서울 아파트값 변동률은 -4.48%에 달했다.

이명박 정부 시기 일어난 또 하나의 부동산 시장의 사건은 전세대란이었다. 시장이 하향세로 돌아선 것을 확인한 잠재수요자들은 매수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세로 살기를 원했고, 입주 물량도 많지 않았다. 역전세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전세자금 대출을 확대했다.

이명박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규제와 부양 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