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는 여느 아프리카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 서구 열강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독일 패전 이후 1919년부터 벨기에가 르완다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벨기에는 1935년 부족이 표시된 신분증을 발행하고 유목 부족인 소수 투치족을 지배계급으로, 농경 부족인 다수 후투족을 피지배계급으로 분열시켰다. 르완다를 쉽게 조종하겠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1959년 이후에도 두 부족 간 갈등은 해결되지 않다가 1994년 4월부터 7월 사이 내전과 대량 학살로 번졌다. 전체 인구의 대략 20%인 100만 명이 사망한 끔찍한 사건이다.
이 대규모 학살은 후투족 르완다 대통령이 비행기 격추로 암살당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고 통상 알려져있다. 이를 이용하고 싶던 르완다 참모총장이 소수 지배계급 투치족의 짓이라며 모든 투치족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한편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 외에 대량 학살의 근본 원인을 찾아가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내전이 발생하기 전인 1990년대 초부터 르완다는 부족 간 식량, 인구, 토지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식민 지배 당시 벨기에는 강제 노동정책이나 무거운 세금 등은 투치족을 앞세워 실시하고 토지 개혁을 명목으로 땅을 몰수했다. 독립 후에 남부에 사는 후투족 농민들은 가파르고 산성화가 진행된 땅으로 내몰렸다. 서구 열강이 키, 콧대 길이 등의 기준으로 만들기 시작한 계급 간 격차가 생존의 문제로 직결된 것이다.
정체 상태에 머무는 농업 생산량은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정치 엘리트들은 투치족을 박멸함으로써 후투족 농부들의 생존 위협을 완화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대학살의 배후에는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던 부족들 간 분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의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이다.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은 ‘대통령 암살’이라는 명분을 만나 대규모 인종 청소로 이어지는 비극으로 끝났다.
30년이 지난 지금, 르완다는 안정된 사회 안에서 활발한 경제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9년까지 10년간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7.2%에 달했다.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3.4% 감소했지만 이듬해부터 다시 10.9%, 2022년에는 8.2%를 기록했다. 국제 사회에서도 무역, 해외직접투자 등의 영역에서 활발하게 참여하며 그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한국과는 작년 5월 수교 60주년을 맞았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10년 만에 르완다를 찾아 카가메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 인사들을 만나 양국의 협력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동아프리카의 정보통신기술(ICT), 물류 허브로 성장하며 8%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기록 중인 르완다와 경제협력 잠재력에 주목한다고 전하며 '한·르완다 정책협의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지난달 26일에는 전문건설공제조합이 르완다 인프라부와 협력관계를 구축해 다양한 사업 기회를 마련하겠다 전한 바 있다.
르완다가 빠른 속도로 사회 안정을 찾고 경제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는 폴 카가메 대통령의 리더십에 있다. 카가메가 르완다에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한건 투치족 반군 알피에프(RPF, 르완다애국전선)를 이끌며 내전을 잠재우기 시작한 시점이다.
수도 키갈리를 시작으로 정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체계적인 군사 작전을 펼쳐 르완다 전역을 손에 넣었다. 집단 학살 이후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어 2003년 선거를 통해 95.05%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선출된 카가메의 목표는 인종 갈등을 치유하고 국가발전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30년 전 르완다 국민들이 겪은 대학살은 학살은 군인이나 국가가 대량 살상무기 등을 동원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일반 대중이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가 된 사건이었다. 망치, 도끼, 마테체와 같은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가 이웃을 죽이는 무기로 전락한 것이다.
1000명당 341명 꼴로 영유아가 사망했고 약 50만 명의 강간 피해 여성이 생겼다. 미국의 비영리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가 1996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사춘기를 넘긴 여성 생존자들은 대부분 강간 피해자였다. 피해자들의 연령대는 2세~50세였으며, 28%는 미성년자였다. 대학살은 전 국민이 공유하는 트라우마가 됐고 나라 경제 차원에서도 급작스러운 인구 감소로 큰 타격을 입었다.
국가트라우마센터 심민영 센터장에 따르면 ‘집단 트라우마’는 공동체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혼란과 불안을 야기해 또 다른 사회문제로 파생된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공통의 상처를 통해 유대감과 결속력을 강화하고 역경을 이겨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집단 학살을 끝내고 최종적으로 국가 경제 부양을 이루고자 하는 카가메의 초기 목표는 여기에 맞닿아 있다. 카가메가 선택한 건 보복 대신 '용서와 화해'였기 때문이다. 르완다 국민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해 인종갈등을 봉합하고 경제 발전을 이루는 원동력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카가메는 국민들이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고 국가 발전이라는 공통적 과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리더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카가메를 주축으로 한 투치족 알피에프가 주도권을 잡자 수도 키갈리에 갇힌 후투족 민간인 6만 명이 보복이 두려워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카가메는 예상과 달리 후투족에 대한 보복을 엄격히 금했다. 대신 가차차(Gacaca)라고 불리는 르완다 전통의 분쟁해결 기구를 현대적으로 재정립해 설치했다.
가차차는 원래 마을 공동체 내의 원로들을 중심으로 마을 대소사를 결정하고 이웃 간 분쟁을 해결하는 기구였다. 카가메는 이를 계승해 약 12만 명의 가해자에 대한 190만 건의 재판을 10년 간 진행했다.
학살 명령을 내린 책임자에게는 확실한 처벌을 내렸지만 일반 시민들의 경우 용서를 구하는 경우 낮은 징역형이나 노역형을 부과해 피해자에게 보상하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가차차는 시민들이 각자의 정신적, 경제적 고통을 털어놓으며 치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무너진 공통체를 빠르게 다시 일으켜 세우고 대학살 후에도 한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두 부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카가메는 대학살 중 강간과 폭력의 피해자가 됐던 여성들의 인권과 지위를 높이는데도 힘쓰고 있다. 2003년 대통령 당선 후 성인지(性認知) 헌법과 성 할당제를 도입했으며 정부의 의사결정기관 내 여성의 비율을 최소 30% 보장했다. 최근 르완다 의회에서 여성은 60%가 넘는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며 세계 성평등 지수 순위는 10위권 안에 들고 있다. 국가제도적 차원에서 가부장제 내 희생된 르완다 여성들이 사회 안으로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한 것이다.
르완다는 올해 7월 대선을 앞두고 있다. 카가메는 2003년 첫 당선 이후 2010년 95.06%, 2017년 98.80%라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현재 20년 넘게 장기 집권 중이다. 그는 작년 9월 '죄느 아프리크'(Jeune Afrique) 잡지와 인터뷰에서 "나는 정말 (내년 대선) 후보"라고 밝히며 4선 도전에 대한 의지를 굳혔다. 일각에서는 그의 업적과 별개로 그의 독재를 비판하며 "30년이 흘러 집단 학살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세대들을 위한 새로운 리더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팽배하다.
임나영 인턴기자 ny924@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