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심 족쇄로 사법리스크 당분간 계속될 전망
[법알못 판례 읽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경영권 승계 사건 관련 1심 재판에서 19개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20년 9월 기소된 후 3년 5개월 동안 106회 재판을 거친 끝에 나온 재판부의 첫 판단이다.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 등 관련자 13명도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그룹 총수가 수사와 재판에 묶인 동안 삼성그룹은 대외 이미지 훼손은 물론 글로벌 경영에 큰 제약을 받았다.
검찰 수사심의위원회가 “입증하기 어렵다”며 ‘불기소’ 처분을 권고했음에도 기소를 밀어붙인 검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셀 전망이다. 검찰은 1심 판결에 대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항소했다.
기소 전제부터 뒤집혀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2부(부장판사 박정제·지귀연·박정길)는 지난 2월 5일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게 “이 사건 공소 사실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핵심 쟁점이 된 이 회장의 혐의는 자본시장법 위반, 업무상 배임, 외부감사법 위반 등 세 가지다. 검찰은 ‘공짜 경영권 승계’라며 2023년 11월 열린 결심공판에서 이 회장에게 징역 5년, 벌금 5억원을 구형했지만 1심 재판부는 ‘증거가 부족하다’, ‘달리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검찰이 제시한 19개 공소사실을 모두 배척했다.
이 회장 등은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합병하는 과정에서 최소 비용으로 경영권을 승계하고 지배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미래전략실이 추진한 각종 부정 거래와 시세조종, 회계 부정 등에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검찰은 이 회장 등이 합병된 삼성물산 지분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제일모직 주가는 올리고 삼성물산 주가는 낮추는 과정에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의 전제가 된 ‘경영권 승계 목적’부터 뒤집었다. 재판부는 “이 회장의 경영권 강화 및 삼성그룹 승계만이 합병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고 삼성물산의 사업적 목적 또한 합병의 목적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2012년 미래전략실이 작성한 ‘프로젝트-G(거버넌스)’ 문건에 대해 “이건희 선대회장 사망 시 막대한 상속세 납부 등에 따른 지분율 변화에 대응하는 방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보고서일 뿐”이라며 “검사의 주장처럼 약탈적 불법 합병계획을 담은 승계 계획안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시세조종 증명 안 돼
검찰은 이 회장 등이 △거짓 정보 유포 △중요 정보 은폐 △허위 호재 공표 △주요 주주 매수 △국민연금 의결권 확보를 위한 불법 로비 △계열사인 삼성증권 PB조직 동원 △자사주 집중 매입을 통한 시세조종 등으로 자본시장법을 위반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두 회사 합병을 통한 그룹 지배력 강화 및 경영권 안정화는 오히려 삼성물산과 그 주주들에게 이익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허위 호재 공표, 자사주 매입을 통한 시세조종 등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검찰이 제시한 개별 공소 사실에 대해서도 “증거가 부족하다”거나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회장 등에게 적용된 업무상 배임 혐의도 배척했다. 이 사건 합병으로 인해 삼성물산은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이에 투자자들이 재산상 손해를 봤다는 게 검찰 측 공소사실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검사가 주장하는 손해는 ‘추상적 가능성’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제일모직 자회사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관련해 거짓 공시 및 분식회계를 한 혐의에 대해 외부감사법 위반죄를 적용한 검찰의 공소사실도 이를 인정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고 봤다.
재판부는 “삼성바이오에피스의 성공 여부가 불확실했던 상황 등을 고려하면 바이오젠이 보유한 콜옵션에 대한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분식회계 혐의도 회계사들과 올바른 회계처리를 한 것으로 보여 피고인들에게 분식회계의 의도가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검찰, 곧바로 항소
검찰은 2023년 11월 열린 결심공판에서 “이 회장은 경영권 불법 승계 혐의의 최종 책임자이자 수혜자”라며 이 회장에게 징역 5년,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이 회장 측은 “법과 절차를 준수했고 회사와 주주 모두에 이익이 된다고 판단해 합병을 추진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1심 재판부가 “이 사건 공소사실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검찰이 제출한 모든 공소사실을 물리치면서 애초부터 무리한 수사·기소가 아니었냐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20년에 걸친 삼성 승계 작업의 위법성을 정조준했던 검찰은 자존심을 구기게 됐다.
서울중앙지검은 1심 선고 후 나흘 만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검찰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배경이 승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혹이 1심에서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불법 승계에 대해서는 기존 대법원 판례가 확정돼 있는데 이번에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며 “우리가 주장하는 내용이 배척됐고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 항소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의 유무죄 판단을 둘러싼 법정 싸움이 항소심으로 이어지면서 이 회장과 삼성의 ‘사법 리스크’도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돋보기]
삼성그룹 남은 다른 재판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불법승계 의혹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삼성과 관련된 다른 재판에 미칠 영향에도 관심이 쏠린다.
현재 이 회장의 불법승계 의혹 재판 다음으로 주목받는 사건은 삼성웰스토리 일감 몰아주기 재판이 꼽힌다. 이 사건의 핵심은 삼성그룹이 2013~2020년 삼성전자·삼성디스플레이·삼성전기·삼성SDI 등 계열사 네 곳의 2조원대 급식 일감을 삼성웰스토리에 몰아줬는지 여부다.
검찰은 삼성웰스토리가 이 같은 그룹 차원의 지원에 힘입어 외형 성장을 거듭한 반면 다른 급식업체들은 삼성그룹과 거래할 기회를 잃게 됐다고 판단해 2022년 11월 최지성 전 삼성전자 미래전략실장(불구속)과 삼성전자 법인을 기소했다.
삼성그룹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도 해당 의혹으로 2021년 234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이에 반발해 제기한 행정소송이 2년 넘게 진행되고 있다.
이 사건은 이 회장의 경영권 승계와도 얽혀 있는지를 두고 관심을 모았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삼성그룹이 삼성물산의 100% 자회사인 삼성웰스토리가 벌어들인 이익을 배당하는 식으로 이 회장의 승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계획적으로 도왔는지를 면밀히 살펴왔다.
검찰은 이 회장의 승계를 돕기 위해 계획적으로 일감을 몰아줬다고 보진 않았지만 삼성웰스토리의 성장이 결과적으로는 이 회장에게 유리하게 작용해 간접적 이득을 줬다고 보고 있다.
이번 1심 판결이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과정을 둘러싼 정부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의 투자자-국가분쟁해결(ISDS)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법무부는 2023년 7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가 엘리엇에 약 690억원을 지급하라고 한 판정에 불복해 영국 법원에 취소소송을 제기한 뒤 5개월째 소송 절차를 진행 중이다. 중재판정부의 결정에는 한국 수사기관의 수사 결과를 인용한 엘리엇 측의 적극적인 공세가 영향을 준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심 법원이 이 회장의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을 모두 무죄로 판단하면서 정부는 진행 중인 취소소송에서 이전보다 적극적인 변론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물산 주주들이 국가와 삼성 측을 상대로 낸 다수의 민사소송에도 이번 1심 판결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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