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열기는 지난 2월 10일 파리에 도착한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다. “요즘 프랑스는 피노 컬렉션 미술관으로 통한다. 파리 젊은 사람들도 많이 간다”라는 택시 기사의 얘기에선 피노 컬렉션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임에도 미술관 앞엔 관람객들이 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노 컬렉션 미술관에 들어간 순간,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설계에 감탄이 나왔다. 돔 구조의 옛 증권거래소를 개조한 이곳엔 위대한 과거와 새로운 현재가 공존하고 있었다. 머리 위엔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5대륙 간의 무역에 대해 그린 천장화 ‘무역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었고, 각 전시장엔 다른 미술관에선 쉽게 볼 수 없는 파격적인 현대 미술 작품들로 가득했다. 이날은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예술가로 꼽히는 마이크 켈리(1954~2012)의 주요 작품들로 구성된 ‘유령과 영혼’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다소 모호하면서도 참신한 작품들에 관람객들은 시선을 빼앗겼다.
2021년 설립된 피노 컬렉션 미술관은 프랑스 미술 시장의 새로운 도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프랑스는 유럽 미술 시장의 주도권을 영국에 빼앗겼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과거 유럽의 예술 수도였던 파리가 다시 정상의 자리를 되찾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우선 피노 컬렉션, 루이비통재단 등의 거대 자본이 유입되어 프랑스의 미술 시장을 끌어올리고 있다. 세계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바젤의 ‘파리 플러스 파(Paris+Par)’는 2022년부터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정부의 세금 정책 등 3박자가 맞아떨어지며 주도권은 프랑스로 넘어가고 있다. 프랑스의 전략은 한국 미술 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팬데믹 시기 호황을 이뤘지만 다시 침체기에 접어든 한국 시장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 프랑스 미술 시장의 변화를 통해 그 방안을 모색해 보자. 유럽 미술 시장의 주도권은 다시 파리로
프랑스는 오랜 시간 미술 시장의 중심에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퐁피두 센터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들은 서양 미술의 성지로 기능해 왔다. 하지만 늘 비슷해 보이고 고정되어 있는 듯한 미술 시장은 의외로 변화에 민감하다. 2000년 런던에 현대미술관인 테이트모던이 문을 열고, 데이미언 허스트와 같은 유명 작가가 탄생하며 중심축은 영국으로 이동했다. 2003년 아트페어 ‘프리즈’도 영국에서 탄생하며 시장은 완전히 재편됐다. 아트바젤과 UBS가 발간한 ‘미술시장보고서 2023’에 따르면 글로벌 미술 시장 규모는 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 순에 해당한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다시 달라지고 있다. 뜨거운 열풍을 몰고 온 피노 컬렉션 미술관의 주인공은 프랑수아 피노이다. 피노는 발렌시아가, 구찌, 입생로랑, 보테가 베네타 등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케링 그룹의 설립자이자 전 회장이다. 대표 미술품 경매사 크리스티의 소유주로, 2000년부터 공식적으로 구입한 미술품만 1만여 점에 달하는 슈퍼 컬렉터이기도 하다. 피노는 원래 자신의 모국에 미술관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파리 시가 2016년 건물의 50년 임대계약을 제안, 미술관 건립이 성사됐다. 피노는 건물 리모델링에만 약 2128억원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피노 컬렉션 미술관은 앞서 2014년 설립된 루이비통재단 미술관과 프랑스 현대 미술의 쌍벽을 이루게 됐다.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은 세계 최대 명품 기업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설립했다. 루이비통재단 미술관 역시 주요 근현대, 동시대 미술 작가들의 전시를 열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프랑스 미술 시장은 1977년 개관한 퐁피두 센터를 제외하고 현대 미술 쪽에선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루이비통, 피노 등 잇단 큰손의 유입으로 대폭 강화됐다.
퐁피두 센터 역시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현재도 퐁피두 센터는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 앤디 워홀 등 거장의 작품부터 동시대 미술 전시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 이곳 역시 비가 오는 궂은 날에도 문을 열기 전부터 긴 줄로 관람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아가 퐁피두 센터는 내년부터 5년여에 걸쳐 대규모 공사를 진행, 노후화된 설비를 교체하고 건물을 전면 재정비하기로 했다. 공사 동안 작품들은 한화문화재단이 운영할 서울 분관 등에 분산 수용된다.
파리는 아트페어에서도 승기를 잡았다. ‘파리 플러스 파’는 아트바젤의 모기업 스위스 MCH그룹이 프랑스 토종 아트페어인 ‘피악’을 인수하면서 열리게 됐다. 그리고 단 2년 만에 지난해 20주년을 맞은 영국의 프리즈를 압도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내년엔 규모를 더욱 키워 기존 전시장의 7배에 달하는 규모의 그랑 팔레에서 열릴 예정이다.
제도적 뒷받침도 한몫하고 있다. 프랑스 정부가 세제 혜택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한 것이 미술 시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초 프랑스는 2025년부터 미술품 거래세율을 5.5%에서 20%로 올린다는 방침을 세웠다. 유럽연합(EU)의 지침에 따라 다른 EU 회원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세금을 부과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미술 시장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현행 거래세율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는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 영국이 유럽 컬렉터들에게 작품 가격의 5~20%를 관세로 붙이는 것과 상반된다. 브렉시트 이전엔 유럽 컬렉터들이 관세 없이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이후엔 과도한 세금을 내고 까다로운 행정 절차까지 거치게 됐다. 전 세계 갤러리들은 이런 조건들을 따져 보다 좋은 작품들을 프리즈보다 파리 플러스 파에서 선보이고 있다. 그렇게 브렉시트 이후 영국 미술 시장이 주춤한 사이 프랑스의 반격은 더욱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한국도 ‘날마다 축제’일 수 있을까 한국 시장에서도 유럽 미술 시장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을 눈여겨 보고 있다. 한국 시장은 팬데믹을 거치며 호황을 맞았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조정을 거쳐 최근 침체기에 들어서고 있다.
한국 시장이 양적 성장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돈이 시장에 몰렸고 MZ세대의 유입도 활발히 일어났다. 2022년부터 아시아 최초로 프리즈가 서울에서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호황을 맞다 보니 양적 성장만 이뤄지고 시장 전체의 성숙도는 그대로 크게 떨어져 있다. 활황에 힘입어 MZ세대를 공략한 신규 화랑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전국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페어만 100여 개에 달하게 됐다. 탁월한 안목과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컬렉터도 부족한 실정이다. 세계적인 미술전문지 아트뉴스가 발표한 2023년 ‘세계 200대 컬렉터’에 한국인은 2명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과연 아시아 미술 시장의 중심에 서게 될 수 있을까.
“젊은 시절의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는 행운이 그대에게 따라준다면 파리는 ‘움직이는 축제’처럼 평생 당신의 곁에 머물 것이다. 내게 파리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 출신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7년간의 파리 생활을 추억하며 쓴 책 ‘파리는 날마다 축제’엔 이런 문구가 나온다. 그의 글처럼 오늘날 파리의 미술 시장에서도 날마다 움직이는 축제가 펼쳐지고 있다. 한국 시장도 파리처럼 될 수 있을까.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역동적이어야 축제는 다시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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