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라남도 함평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5일장이 선다기에 구경을 갔습니다. 상설시장 바깥에 있는 노상에서 할머니 대여섯 분이 직접 기른 채소 등을 팔고 있었습니다.
함께 간 대학생 딸이 느닷없이 돈 1만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홀로 앉아 있는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아흔 살은 돼 보였습니다. 아이는 그 앞에 앉아 한참을 얘기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냥 드리고 싶었어. 잘 듣지도 못하시는 거 같은데 자꾸 채소를 갖고 가라고 해서 괜찮다고 했어.”
그날 내내 할머니와 딸아이가 뭔가를 얘기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월에 깎여 안쓰러울 정도로 작아져 버린 할머니, 집에서는 자기만 알고 말도 안 듣지만 할머니를 보자마자 무작정 다가간 대학생 딸.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진국이 됐지만, 그 나이에 그 몸을 이끌고 시장을 나와야 하는 누군가의 어머니를 나라가 보살피지 못하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노인 빈곤율 OECD 1위 국가 한국도 떠올랐습니다. 딸 세대에게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좁은 취업문을 뚫어야 하고, 미래에는 1년에 100만 명씩 태어난 우리 세대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구나 싶어 착잡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좋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런 시대를 살았던 축복받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의 부채감이랄까. 다음 세대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지는 못할망정 더 힘든 짐만 얹어주고 가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다큐멘터리 한 편을 봤습니다. 제목은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 명곡으로 평가받는 ‘USA for Africa’가 녹음된 1985년 1월 28일 밤을 다룬 영상입니다. 제작자 퀸시 존스의 지휘 아래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모여 날을 새우며 녹음하는 장면을 찍었습니다. 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 브루스 스프링스틴, 밥 딜런, 신디로퍼, 폴 사이먼, 케니 로저스, 다이애나 로스 등이 한날한시에 모였습니다. ‘지구상에서 지옥에 가장 가까운 기근’에 시달리는 에티오피아 난민을 돕기 위한 노래였습니다. 잘난 맛에 사는 이들을 어르고 달래 겨우 녹음을 마쳤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다이애나 로스는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길 바랐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힘들었지만 의미가 있어 행복한 과정이 마무리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습니다. 이 음반은 8000만 달러의 수익을 냈고, 배고픔으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구하는 데 쓰였습니다.
다큐멘터리를 다 보고나니 새벽 4시 정도 되더군요. 이틀간 1000km 넘게 운전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정화된 느낌이랄까. 매일 편 갈라 싸우고, 같은 편끼리도 싸우고, 상대방을 멸종이라도 시키겠다는 기세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야만의 시대에서 잠깐 벗어난 듯했습니다.
잠들기 직전 두 개의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연민과 공감. 딸아이가 할머니에게 달려간 것은 이성의 작용이 아니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연민을 느끼고, 할머니의 고통에 공감했을 것입니다. 미국의 톱스타들은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기꺼이 의미 있는 일에 나섰습니다.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만이 문명을 이룬 이유에 대해 성취를 축적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공감이 있어 축적이 가능했다고도 합니다. 인간의 뇌에 있는 거울 뉴런은 타인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하게 만들었고, 이는 다른 이들이 이룬 성취를 파괴하지 않고 인정하는 고차원적 공감으로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사회적 지능이라고도 합니다.
이번 주 한경비즈니스는 인공지능(AI)이 파괴하는 인간의 직업에 대한 얘기를 다뤘습니다. AI는 상상하지 못했던 창조적 업무까지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질문은 두 개입니다. AI가 어느 영역까지 도장깨기를 할 것인가, 그 기술의 파도 앞에 인간만의 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영역은 어디인가. 아마도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연민과 공감이라는 능력이 필요한 분야가 아닐까 합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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