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회사가 근태·업무수행 감독…산재보험법상 근로자 해당”

[법알못 판례 읽기]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한국경제신문
서울 서초구 대법원. 사진=한국경제신문
개인 소유 차량으로 용역을 제공하는 지입계약을 운수회사와 맺고 이 회사에 위탁된 업무를 대신한 지입차주는 위탁업체의 근로자라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 관계를 맺고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다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를 따른 것이다. 이런 기준을 적용해 외관상 개인사업자인 화물차 기사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한 하급심 판결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1·2심 근로자 지위 불인정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2024년 1월 25일 A 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불승인처분취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청구를 기각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상고심 재판부는 “원심판결에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및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미친 잘못이 있다”며 이같이 선고했다.

A 씨는 2012년 6월 운수업체 B사와 8톤 화물차량을 지입하는 내용의 화물자동차 위수탁관리운영계약을 맺고, 이 회사가 문서파쇄 대행업체 C사로부터 위탁받은 문서파쇄 및 운송 업무를 맡았다. A 씨는 2017년 7월 서울 강남구에서 문서파쇄 업무를 하던 중 파쇄기에 손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A 씨는 손가락이 절단되고, 신경이 파열되는 등 중상을 입었다. 이후 A 씨는 “C사 소속 근로자로서 업무를 수행하던 중 사고를 당했으므로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A 씨는 임금을 목적으로 사용·종속적 관계에서 C사에 노무를 제공하는 근로자로 볼 수 없다”며 요양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이에 A 씨는 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A 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1심 재판부는 “원고는 위탁계약 및 지입계약을 매개로 C사의 문서파쇄 및 운송업무를 수행하면서 그에 따른 용역비를 C사로부터 지급받은 것”이라며 “임금을 목적으로 사용종속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하는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A 씨와 C사 사이에 근로계약은 물론 도급계약이나 용역계약 등 어떠한 형태의 계약도 명시적으로 체결되지 않은 점도 판단의 근거가 됐다. A 씨의 노무제공 관계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B사와 맺은 위탁계약 및 지입계약에 기초해 규율돼야 한다고 본 것이다.

1심 재판부는 “이 사건 위탁계약에 의하면 B사가 지입차주에 대한 산재보험 등에 가입할 의무가 있고 운전자의 업무상 안전사고로 인한 책임 역시 B사에 있는 것으로 돼 있다”고 지적했다.

1심 재판부는 C사의 직영 기사와 지입차주인 A 씨의 업무가 거의 동일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A 씨가 C사의 취업규칙, 복무규정, 인사 규정 등까지 적용받은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또 “C사는 차량을 직접 보유하는 데 따른 비용을 절감하고 유동적인 경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직영 기사를 고용하는 것 외에 이 사건 위탁계약을 통해 지입차주에게 업무를 위탁하는 계약 형태를 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원고로서도 자신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유지·관리할 수 있는 이점이 있어 이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1심 재판부는 “A 씨는 C사의 근로자가 아니므로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청구할 수 없다”는 취지로 청구를 기각했다. 2심 재판부의 판단도 같았다.

대법 “임금 목적의 종속 관계”

대법원은 “A 씨는 근로자”라는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상고심 재판부는 “비록 원고가 지입차주로서 이 사건 차량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고 그 유지·관리를 위한 비용도 일부 부담했다 하더라도 원고는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C사에 근로를 제공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상고심 재판부는 △소속 직영 기사와 동일한 수준의 지휘·감독 △업무 수행 기간이 5년에 이른 점 △회사가 파쇄 장비를 제공하고 원고의 주유 대금을 스스로 부담한 점 △원고가 차량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점 △회사 업무를 수행하던 지입차주로부터 원고가 차량을 직접 구입한 점 등을 근거로 A 씨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A 씨는 주 5일 근무를 원칙으로 오전 8시 20분에 출근하고 오후 6시 30분에 퇴근했다. 출퇴근 시간은 C사의 필요에 따라 변경될 수 있었고, 휴무일도 회사가 지정했다.

A 씨는 또 매일 퇴근 전 C사의 담당 직원으로부터 다음날 업무 내용을 배정받아 배정받은 장소에서 업무를 수행한 후 퇴근 전에 화물차량을 C사의 차고지에 입고했다. 매일 거래처, 작업량, 주유 대금 등을 기재한 작업일지를 작성했으며 거래처로부터 거래명세표, 파쇄완료증명서 등을 받아 C사에 보고하기도 했다.

C사는 업무수행의 대가인 서비스 요금으로 매월 407만원을 직접 지급했고, 주유 대금도 별도로 지급했다. A 씨는 이 금액의 일부를 지입료와 부가가치세 등 명목으로 B사에 지급했다. 근무복 역시 C사가 지정한 복장을 착용해야 했고, 화물차량에는 C사의 상호와 광고를 도색하고 광고물을 부착해야 했다.

차량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상고심 재판부는 A 씨가 직접 지입계약을 체결한 운수회사에 대해선 “차량의 보험료 납부 등 행정적 지원 업무만을 대행했을 뿐 A 씨와 C사의 노무 제공 관계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돋보기]
관건은 ‘상당한 지휘·감독’ 여부

대법원 판례는 근로자 지위 여부에 대해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는지를 따지도록 정한다. 도급·위탁 계약이더라도 ‘상당한 지휘·감독’ 등이 인정되면 근로자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외관상 개인사업자인 화물차 기사가 근로자 지위를 인정받는 하급심 판례도 쌓이고 있다.

서울고법 민사38-1부는 2022년 6월 지입차주 D 씨 등 6명이 자동차 전장품 제조업체 계양전기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항소심에서 1심과 동일하게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D 씨 등은 계양전기와 1년 단위의 운송계약을 맺고 자동차 좌석용 모터 등을 거래처에 운송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계양전기가 원고들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했고, 원고들은 “계양전기의 지휘·감독 아래 업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며 소송을 걸었다. 계양전기 측은 “원고들은 용역계약을 맺고 업무를 수행한 독립적인 사업자”라고 주장했다.

1심 법원은 “원고는 한 달에 26일을 운송 업무를 담당하면서 그 대가로 매달 고정급을 지급받았다”며 “유류비, 도로통행료 등을 계양전기로부터 실비로 보전받았기 때문에 원고들이 지급받은 고정급은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을 갖는다”고 판시했다. 2심 법원도 원고들이 계양전기로부터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은 것으로 판단했다.

지입차주가 아닌 일반 화물차 기사의 근로자 지위를 인정한 판결도 나오고 있다. 서울고법 행정9-1부는 2022년 7월 식자재 운송 트럭 기사 E 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1심을 깨고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E 씨는 2011년부터 식자재 유통업체인 실로암푸드시스템과 운송용역계약을 맺고 거래처에 식자재를 배송하는 일을 했다.

그는 배송업무를 하다가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E 씨가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족급여 등을 지급하지 않았다. 1심 법원도 근로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2심 법원은 “E 씨가 맡은 업무가 식자재 배송 회사의 핵심 업무이고 회사의 상당한 지휘·감독을 받았다”고 봤다. E 씨가 맡은 업무와 회사 정직원의 업무수행 방식이 거의 동일한 점도 근거가 됐다. 2023년 10월엔 서울행정법원에서 혈액 검체 운송회사와 지입계약을 맺고 야간 배송업무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화물차 지입 기사가 근로자 지위를 인정받았다.



민경진 한국경제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