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경영권 공격하며 이빨 드러낸 '토종 바이아웃 펀드'
주총 시즌 맞아 기업 향한 행동주의 펀드 압박 더욱 거세져

[스페셜 리포트 : 기업 저격수 된 사모펀드①]

토종 사모펀드(PEF)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한국 최대 규모의 바이아웃(경영권 인수) 펀드 중 하나인 MBK파트너스는 최근 수익을 내기 위해서라면 대기업 경영권까지 노릴 수 있다는 시그널을 던져 재계를 놀라게 했다.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을 시도하면서다. 비록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했지만 이번 ‘MBK 사태’로 대기업과 바이아웃 펀드 간의 밀월관계에 금이 갔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3월 주주총회 시즌을 맞아 행동주의 펀드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목소리를 내며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특히 최근 정부가 주식시장에서 주주가치 제고를 골자로 하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내놓은 만큼 올해 주총은 기업 경영진과 행동주의 편드의 공방이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MBK파트너스가 한국앤컴퍼니의 경영권을 공격하면서 자본시장을 뒤흔들었다. MBK파트너스 사무실이 있는 서울 청진동 D타워 모습. 사진=한국경제신문
MBK파트너스가 한국앤컴퍼니의 경영권을 공격하면서 자본시장을 뒤흔들었다. MBK파트너스 사무실이 있는 서울 청진동 D타워 모습. 사진=한국경제신문
“사모펀드가 미치는 영향력과 파장이 더욱 커지는 느낌이다.”

최근 재계에서 나오는 ‘사모펀드(PEF)’에 대한 평가는 대략 이렇다. 자본시장을 움직이는 큰손이 된 이들의 행보가 갈수록 거칠고 과감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의 든든한 조력자이자 협력자를 자처했던 ‘한국형 바이아웃(경영권 인수) 펀드’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그동안 숨겼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공격적이다.

한국 최대 PEF 운용사인 MBK파트너스가 한국앤컴퍼니(옛 한국타이어)의 경영권을 노린 게 대표적이다.

지난해 말 MBK파트너스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외치며 한국앤컴퍼니의 상장 유통지분 공개매수를 진행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재계에서는 “MBK파트너스와 같은 바이아웃 사모펀드도 언제든 기업에 등을 돌려 칼을 꽂을 수 있다’라는 시그널이 시장에 퍼지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다. 출발부터 주주 권리 확대를 외치며 기업들과 대립각을 세웠던 행동주의 펀드들의 힘은 더욱 강해지고 있다. 올해 3월 주주총회를 앞둔 기업들에 큰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이들의 행보는 소액주주들에겐 초미의 관심사가 된 지 오래다. 행동주의 펀드가 한 회사의 주식을 매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만 해도 개미들은 열광하고 또 이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탠다.

한국을 대표하는 연예기획사 에스엠, 국내 임플란트 시장 부동의 1위였던 오스템임플란트도 행동주의 펀드의 표적이 돼 결국 창업주들이 경영에서 물러나는 일까지 발생했다.

재계 관계자는 “주총 시즌에 앞서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추진으로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시장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행동주의 펀드의 목소리는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재계에 ‘사모펀드 주의보’가 떨어진 배경이다.
<용어 설명>
바이아웃·행동주의 사모펀드란?

‘기관 전용 사모펀드(이하 사모펀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째는 ‘바이아웃(경영권 인수) 펀드’다. 이들은 저평가된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해 갖은 노력으로 가치를 올린 뒤 인수합병(M&A) 시장에 되팔아 수익을 낸다. 대부분의 사모펀드들이 이 같은 전략을 앞세워 성장하고 있다.
둘째는 ‘행동주의 펀드’다. 행동주의 사모펀드는 보통 특정 기업의 주식을 매수하고, 지배구조 개선이나 배당금 확대와 같은 주주 환원책 강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이 때문에 행동주의 펀드가 한 회사의 주식을 매수한 것이 알려지면 투자자들이 대거 몰려 주가가 상승하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주가가 오르면 행동주의 펀드는 갖고 있던 주식을 되팔아 차익을 낸다.
바이아웃 펀드, 아군인가 적인가특히 재계에서는 MBK파트너스의 한국앤컴퍼니 경영권 인수 시도가 남긴 파장이 엄청났다고 입을 모은다. ‘사모펀드의 배신’이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모펀드 중에서도 바이아웃 펀드는 그동안 늘 대기업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함께 성장하는 ‘윈-윈’ 전략을 펼쳐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바이아웃 펀드가 적대적 M&A를 앞세워 대기업 오너가의 경영권을 노린 적은 ‘MBK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 단 한 번뿐이었다.

2006년 일어난 샘표식품 경영권 분쟁 사태였다. 당시 우리투자금융(현 NH투자증권)의 사모펀드 마르스 1호가 샘표식품 지분 24.1%를 취득하며 적대적 M&A를 선언한 것이다. 토종 사모펀드가 처음 한국 기업의 경영권을 노린 사례로 기록된다.

양측은 매년 사외이사 선임 등의 안건을 놓고 무려 6년이나 주총에서 ‘표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매번 박진선 샘표식품 사장 측이 이겼고 우리투자증권은 2012년 보유지분을 전부 매각했다.

이후 기업과 사모펀드는 서로를 일종의 ‘동반자’로 여기며 함께 성장해왔다.

이를테면 대기업이 사업 재편을 위해 계열사를 M&A 시장에 매물로 내놓으면 사모펀드가 사주기도 했다. 몸값이 비싼 매물은 기업과 사모펀드가 함께 인수해 경영하기도 했다.

MBK파트너스도 대기업들과의 끈끈한 관계를 앞세워 한국 최고의 바이아웃 펀드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예컨대 롯데그룹은 2019년 지주사로 전환하며 금산분리 규정에 따라 롯데카드를 매물로 내놓았다. 당시 MBK파트너스가 우리은행과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해 이를 품에 안았다.

CJ그룹도 CJ올리브영의 온라인 사업을 키우기 위해 글랜우드PE와 손잡았으며, SK그룹도 SK온과 SK에코플랜트의 자본금 확대를 위해 IMM PE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이아웃 펀드 내부 관계자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대기업 사이에서의 평판 관리였다.

대기업들로부터 바이아웃 펀드가 크게 성장할 수 있는 M&A 기회와 정보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기업과 사모펀드의 일종의 ‘밀월관계’는 MBK 사건으로 인해 ‘금이 갔다’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IB업계 관계자는 “MBK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모펀드와 협력 관계를 구축한 기업 입장에서도 100% 사모펀드를 믿지 못한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재계 관계자도 “이번 사건으로 대기업 사이에서 MBK의 평판이 크게 악화된 모습”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재계는 MBK를 시작으로 대기업 못지않게 덩치를 키운 ‘공룡 바이아웃 펀드’의 공격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사모펀드 업계에서는 MBK처럼 덩치가 큰 바이아웃 펀드들이 이런 대기업들을 신경 쓰지 않고 향후에도 비슷한 시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한 사모펀드업계 관계자는 “해외 LP(유한책임투자자) 사이에서는 대기업에도 등을 돌리고 수익 극대화에 박차를 가했던 MBK의 이번 행보가 큰 주목을 받으며 오히려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는 얘기도 들린다”며 “MBK뿐 아니라 한앤컴퍼니처럼 해외 LP들을 대거 보유한 바이아웃 펀드들은 돈만 된다면 지배구조가 취약한 대기업의 경영권을 노리는 일이 또 발생할 수 있다”고 전했다.

실탄도 충분하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국내 M&A 시장이 부진하면서 바이아웃 펀드 운용사들이 막대한 드라이파우더(미소진 자금)를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의 칼끝이 어떤 기업의 경영권을 노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더 강해져 돌아온 행동주의 펀드바이아웃 펀드들의 행보를 예측할 수 없게 된 상황 속에서 행동주의 펀드들의 공세는 더욱 거세지는 추세여서 기업들은 더욱 압박을 받는다.
더 강력해진 사모펀드의 힘
3월부터 막이 오른 상장사 주총의 최대 이슈는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주총 시즌만 되면 소액주주들을 결집시켜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방안들을 실행하라고 기업들을 향해 목소리를 낸다. 주주 입장에서는 든든한 ‘아군’이지만 기업 입장에서는 상대하기 어려운 ‘강적’이다.

특히 올해는 정부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동한 데다 내부적으로 경영권 다툼을 벌이는 곳도 많아 행동주의 펀드들의 입김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한 재계 관계자는 “올해 주총을 어떻게 넘길지 걱정이 앞선다”고 토로했다.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추진으로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시장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올해 주총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목소리는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연합뉴스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추진으로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시장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올해 주총에서 행동주의 펀드의 목소리는 더욱 힘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주총 시즌이 임박하면서 행동주의 펀드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곳이 KCGI자산운용(이하 KCGI)이다. 자신들이 투자한 기업 가운데 주주환원율·자기자본이익률(ROE)·주가순자산비율(PBR) 등이 기준에 미달하는 곳에 대해서는 주총 안건에 적극 반대의사를 행사하는 의결권 행사기준을 마련했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고려아연 정기주총에서 새 기준을 가장 먼저 적용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현재 고려아연은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장형진 영풍 고문 등 양 집안의 ‘가문싸움’이 격화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가운데 KCGss 영풍 측이 주주 가치 제고에 더욱 적극적”이라며 영풍의 손을 들어줬다. 소액주주들도 KCGI의 결정에 따라 대거 영풍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고려아연 측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금호석유화학도 이와 비슷하다. 박찬구 금호석화 회장과 그의 조카인 박철완 전 금호석화 상무의 경영권 싸움이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박철완 상무는 행동주의 펀드 차파트너스자산운용을 끌어들였고 모든 권리를 위임한 상태다. 실질적으로 박찬구 회장과 사모펀드의 싸움인 셈이다.

행동주의 펀드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태광산업의 주총에서 이사 후보를 추천하겠다며 경영참여를 예고해 충돌이 예상된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은 태광산업의 2대 주주(지분율 5.8%)다. 이 밖에 삼성물산과 KT&G는 해외 행동주의 펀드들과의 격돌이 예고된 상황이라 결과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더욱이 삼성물산의 경우 5곳에 달하는 행동주의 펀드들이 연대해 경영진을 압박하는 이른바 ‘울프팩(wolfpack·늑대 무리) 전략’을 펼치고 있어 순탄치 않은 주총이 예상된다.

재계에서 점차 영향력을 높이는 사모펀드들의 행보를 바라보는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사모펀드는 산업의 발전뿐 아니라 기업의 주주 가치 제고, 지배구조 개선 등에 목소리를 내며 국내 자본시장이 보다 성숙해지는 데 힘을 보태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처럼 사모펀드의 힘이 세진 상황에서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며 “미래를 위한 투자에 집중할 수 없어 기업 경쟁력 약화가 우려되는 만큼 미국처럼 기업들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차등의결권 제도 도입 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사모펀드에 대한 책을 펴내기도 한 최환열 삼지회계법인 대표도 “특히 최근 들어 한국 최대 규모의 바이아웃 펀드까지 행동주의 펀드와 비슷한 행보를 펼치는 것이 우려스럽다”며 “정부 차원에서 적절한 보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모펀드의 입깁에 따라 기업의 주인이 쉽게 바뀌어 버리는 시대가 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정우 기자 enyo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