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 치솟는 글로벌 증시, 한국은 어디로]
밸류업 프로그램…일본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것
“보세요. 진정성이 없어요.”

2월 26일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구체안이 공개되자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 애널리스트는 이같이 말했다. 일본의 정책을 본떠 만든 밸류업 프로그램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구원투수는커녕 ‘총선용’에 지나지 않았단 지적이 나오고 있다.

발표일 직전까지 코스피와 코스닥의 가치주는 밸류업 기대를 발판 삼아 질주 중이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국장’의 불장이었다. 하지만 이날 기관투자가 중심으로 실망 매물이 쏟아지면서 코스피와 코스닥은 하락세로 돌아섰다.

반면 같은 날 일본 증시의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는 장중 3만9300선을 넘어서며 역대 최고치를 넘어섰다. 이미 34년여 만에 ‘거품경제’ 시절 세운 종전 최고가를 경신한 이후였다.

시장에는 “역시 국장은 안 된다”는 패배감이 번졌다. “밸류업이 아닌 ‘밸류다운 프로그램’이 아니냐”는 조소도 터졌다. 출발선도 목적도 같았던 한국과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 주가를 가른 ‘진정성’은 무엇이었나.

‘자율’ 17회 등장…채찍도 당근도 없었다

포장지는 화려했다. ‘한국 증시 도약’, ‘자본시장 선진화’, ‘상생과 기회의 사다리’…. 금융당국은 주요국 대비 저평가되고 있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방안으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이날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프로그램 내용은 한마디로 ‘자율’이다. 자료 제목부터 ‘상장기업의 자율적인 밸류업 노력을 적극 지원한다’다. 구체적 지원방안이 담긴 자료에는 총 17쪽에 걸쳐 자발·자율적·스스로와 같은 단어가 총 17회 등장했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은 ‘권고’다.

내용을 뜯어보면 당국의 정책 골자는 세 가지다. 첫째, 상장기업의 자발적 기업가치 제고다. 상장기업 전체가 자사의 자본수익성, 지배구조 등을 파악해 기업가치가 적정한 수준인지 기업 스스로 평가해 제고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연 1회 자율 공시한다.

이를 유인할 정부의 당근책은 인센티브 제공이다. 인센티브는 주주환원을 유도하기 위한 세제 지원을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구체적 세제 지원은 공개하지 않았다. 금융위는 “다양한 세제지원 방안도 강구할 예정”이라고 했다. 여기에 덧붙인 게 매년 우수기업에 대한 표창 수여, 모범납세자 선정 우대 등의 세정지원이다. 자율적 참여를 이끌어낼 만한 파격적 세제 혜택은 없었다.

둘째 안은 기업가치 우수기업에 대한 시장 평가와 투자 유도다. 1단계에서 자발적으로 기업가치를 높인 성과를 투자자들이 평가하는 건데, 핵심 전략은 코리아 밸류업 지수 개발 및 상장지수펀드(ETF)의 상장이다. 기업가치 우수기업으로 구성된 지수를 개발해 ETF·펀드 등 금융상품 출시에 활용하고,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가 벤치마크 지표로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지수 개발과 ETF 상장 시점은 각각 9월과 12월 하반기다.

이마저도 우수기업의 정의가 불명확했다. 금융위는 ‘수익성과 시장가치가 우수한 기업, 표창을 받은 기업 중심으로 선정한다’고 했다.

셋째, 밸류업 지원체계 구축이다. 기업의 자율적인 밸류업을 지원하기 위해 거래소 내 전담부서 신설과 홈페이지 개설, 공시 담당자에 대한 공시 교육, 기업 개선책 홍보 지원 등이 포함됐다. 전에 없던 지원이었으나 파격적이지도 혁신적이지도 않았다.

실망 매물 반영…관망세 돌아선 코스피

평가는 냉랭했다. “알맹이가 없다”, “맹탕이다”, “반쪽짜리 프로그램”이란 지적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게 지난 2월 한 달간 코스피를 달군 밸류업 프로그램이었다. 기업에 강제성을 부여하거나 확실한 세제 혜택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고작 기업이 알아서 하라는 게 전부”였다.

발표 당일을 시작으로 2거래일 연속 업종 수익률과 수급에 실망 매물이 반영됐다. 증시 상승의 핵심추였던 가치주는 유틸리티를 제외하면 수익률 하위에 자리했다. 특히 은행, 보험, 상사·자본재(지주 중심), 자동차 등 연초 이후 수익률 상위 업종들이 하위에 포진했다. 발표 당일에만 개인과 기관이 각각 486억원, 855억원 순매도했다. 기관 순매도의 중심은 방향성에 가장 기민하게 움직이는 수급 주체, 사모펀드였다.

특히 시장의 실망은 세제 관련 정책이었다. 신한투자증권 노동길 애널리스트는 “당장 3월 주주총회 시즌 때 기업 행동을 이끌어낼 만한 정책들은 부재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황준호 상상인증권 애널리스트는 “시장의 기대와는 달리 기업가치 제고를 위한 상속세 감면 등 확실한 인센티브가 부재했다”며 “기업들로 하여금 주주환원 규모를 증대시키려는 강제성 역시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또 하나는 지수 관련이다. 코리아 밸류업 지수 개발과 ETF의 상장을 예고했지만 밸류업 지수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금융위는 “PBR, PER, ROE, 배당성향, 배당수익률, 현금흐름 등 주요 투자지표를 종합 고려해 종목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일본 거래소는 ROE 8% 이상 기업을 지수 유니버스로 설정해 PBR 1배 이상 기업들을 지수에 포함했다. 두루뭉수리하지 않은 구체적인 방법론이다.
밸류업 프로그램…일본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것
투자자들이 바랐던 건 이웃나라 일본 증시를 일으킨 밸류업 정책이었다. 정부도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하며 일본 도쿄거래소 사례를 모델로 삼았다. 금융위는 “도쿄거래소 사례를 참조하되 우리 시장의 특성을 고려해 가이드라인을 보완하고 지원체계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2쪽에 걸쳐 일본의 기업가치 제고 전략 소개도 겸했다.

한국투자증권 최보원 애널리스트는 “밸류업 정책과 저PBR 정책이 일본 증시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당 정책만으로 반등한 것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난 10년간 이어진 밸류업 정책 외에도 과세 제도, 미국 IT 기업과 일본 기업의 동조화, 기업의 실적 등이 작용했다고 강조했다.
밸류업 프로그램…일본에는 있고 한국에는 없는 것
깜짝 랠리를 주도했던 밸류업 프로그램의 재료는 소진됐다. 물론 아직 최종안이 아닌 만큼 기대를 접기엔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거센 비판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28일 “기준 미달 땐 상폐를 검토하겠다”는 강경책도 내놨다. 앞서 금융위가 ‘패널티는 없다’고 말한 것과 배치되는 부분이다.

금융위는 1, 2차 세미나를 거쳐 상반기 중 최종 가이드라인을 확정할 계획이다. 향후 정책당국 의지에 따라 현실화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주가도 관망세가 짙어지고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