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포트 : 치솟는 글로벌 증시, 한국은 어디로]
지난달 27일 도쿄의 도쿄증권거래소 닛케이 지수 주가를 표시하는 전광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7일 도쿄의 도쿄증권거래소 닛케이 지수 주가를 표시하는 전광판 앞을 지나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주가 부양이 목표가 아니었어요. 일본 경제의 부활이 목표였던 겁니다.”

1세대 애널리스트 출신인 이종승 IR큐더스 대표는 최근 한국과 일본 증시의 디커플링의 원인을 한마디로 이렇게 설명했다. ‘밸류업 프로그램’은 닮았지만 정책 방향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① 진정성 : 10년의 반성
일본 밸류업 프로그램 해부, 10년 성장 전략의 결실
기간부터 달랐다. 일본 증시 활황의 원년을 밸류업 프로그램이 본격 시작한 2023년으로 보지만 일본의 정책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엔저 정책으로 대표되는 ‘아베노믹스’가 시동을 건 때다. 당시 아베 내각은 ‘일본재흥전략’을 발표한다. 장기 저성장과 고령화에 직면한 일본 경제가 구조적으로 성장 전환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경쟁력 회복을 기반으로 한 기업가치 제고가 필요하다는 게 핵심 내용이었다.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됐다. 하나는 기업지배구조 코드다. 아베 정부는 일본 기업이 보수적인 지배구조로 인해 상대적으로 기업가치가 저평가되어 있고, 해외 자금 유입에도 어려움이 있다고 봤다. 이를 타파하려면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혁해 의사결정 시스템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신속하고 결단력 있게 바꿔야 했다. 정부는 지배구조를 형식적이 아닌 ‘실질적’으로 개선시키는 데 최우선 과제를 삼았다.

두 번째 전략은 연기금과 같이 자산을 수탁하고 운용하는 기관투자가가 수탁자 책임을 다하도록 해 상장기업에 대한 압박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 즉 책임 있는 기관투자가의 원칙(스튜어드십 코드)을 정함으로써 기업지배구조를 개혁한다는 방안이었다.

일본은 이 두 가지 기업지배구조 코드와 스튜어드십 코드를 ‘두 개의 바퀴’라고 표현했다. ② 투명성 : 공개 회의만 28회
자료 : IR큐더스, 도쿄증권거래소
자료 : IR큐더스, 도쿄증권거래소
전략이 정해지자 다음은 실무였다. 두 개의 바퀴를 굴리기 위한 후속회의가 지난하게 이어졌다. 금융당국 외에 법무성·경제산업성 등의 정부부처, 학계, 상장기업, 운용업계, IR업계 등 다양한 분야로 구성된 민관 합동회의가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약 28회에 걸쳐 열렸다. 회의록의 모든 내용은 금융청과 도쿄증권거래소 웹사이트에 투명하게 공개됐다.

이종승 대표는 “20~30명에 가까운 민관 합동 인원 중 누가 참석했고, 누가 어떤 발언을 했는지, 제안 내용은 무엇이었는지까지 모두 투명하게 공개했다”며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한 지속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투명성은 스튜어드십 코드 실행의 든든한 뒷배가 됐다. 앞서 한국 정부는 2015년 당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국민연금공단에 부당한 압력을 행사해 손실을 입었다며 글로벌 헤지펀드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에서 패소했다.

부당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문형표 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1심과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한국의 국민연금이 정권 입김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③ 명확성 : 두 개의 바퀴
일본 밸류업 프로그램 해부, 10년 성장 전략의 결실
과정은 지난했지만 목표와 전략은 명확했다. 시작은 연기금의 개편이었다.

2013년 세계 최대 규모인 일본 공적연금펀드(GPIF, 한국의 국민연금)의 지배구조를 개편해 국채 중심의 채권 투자를 줄이고 주식 비중을 늘렸다. 스튜어드십 코드를 위한 첫 번째 밑그림이다.

2015년에는 GPIF가 유엔환경계획의 파트너로서 책임투자를 지향하는 투자자 이니셔티브인 책임투자원칙주도기구(PRI)에 서명했으며, GPIF의 투자운용원칙에 ‘모든 투자자산에 대해 ESG요소를 반영한다’는 내용도 추가했다. 일본에서 책임투자의 중요성을 공고히 한 사건이자 ESG 성장을 촉진시킨 사건이다.

GPIF가 나서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2023년 말 기준으로 스튜어드십 코드에 324개 기관투자가가 가입했다.

2015년 GPIF가 움직일 때 도쿄증권거래소에서는 기업지배구조 공시가 의무화됐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높은 수준의 요구사항이 추가됐다. 2022년엔 주요 대기업이 편입되는 프라임 시장에 해외 투자자가 요구하는 정보 공시 기준과 기업 관여 요건이 도입됐다.

뼈대가 갖추어지자 일본은 주가 부양을 위한 본격 드라이브를 걸었다. 우리가 본뜬 2023년 밸류업 프로그램의 시작이다. ④ 당근과 채찍 : ‘진짜’ 밸류업그해 3월 도쿄증권거래소는 글로벌 투자자들의 진입을 유도하고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PBR(주가순자산비율)이 1 이하인 프라임과 스탠더드 시장 상장기업들을 대상으로 자본수익성과 성장성을 높이기 위해 일본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프로그램 명은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이를 위해 실천 방침과 구체적인 이행 목표를 매년 공개하도록 요구한 것이 골자다.

또 대기업이 편입된 프라임 시장 상장기업의 경우 독립 사외이사 비율을 이사회 구성원의 최소 3분의 1 이상 유지하고, 이들이 회사의 조언자와 감독자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며, 독립 사외이사 중 한 명을 이사회 의장으로 임명하도록 요구했다.

정책을 주도한 도쿄증권거래소의 힘은 막강했다. 고다이라 류시로 니혼게이자이신문 금융 전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은 거래소의 개혁 조치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일본인의 체면을 중시하는 성격과 후발주자로서 모범사례를 충실히 따라가는 문화, 거래소의 막대한 영향력 등 3가지를 꼽았다.

그는 “(거래소는) 일본 시장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영향력 갖고 금융당국과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판 밸류업 프로그램과 유사하지만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당근과 채찍이다. 앞서 일본 공적연금과 중앙은행은 2014년부터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가중치를 부여한 ‘닛케이400’ 지수를 새로운 벤치마크로 해 일본 주식을 매입하기로 밝혔다.

2023년 6월에는 ROE가 자본비용보다 높고 PBR 1을 초과하는 기업에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는 ‘JPX 프라임 150 지수’를 새롭게 만들고, 공적연금과 중앙은행 등 기관투자가로 하여금 JPX 프라임 150의 벤치마크 사용을 유도했다. 일본 상장기업들이 스스로 기업가치 제고에 나서게 한 강력한 유인책이었다. ⑤ “주가는 하나의 결과”장기간 그리고 명확하게 전달된 정책의 방향 설정은 기관투자가와 기업 모두에 통했다. 2023년에는 64개 기업이 순이익이 감소할 것이라는 예측에도 불구하고 배당금을 늘리고 자사주를 매입하며 주주에 대한 자본환원율을 높였다.

그해 3분기에는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중 PBR이 1 미만인 기업이 2022년 4분기 50.6%에서 45.8%로 4.8%포인트(180개) 줄었다. 산업재, IT, 경기재가 가장 많았다. 그리고 이들 기업은 2023년 4월 이후 현재까지 일본 증시 상승 기여도 상위 섹터를 구성하고 있다.

2월 현재 일본 증시의 상승률은 눈부실 정도다. 도쿄증권거래소가 상장기업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요구한 이후 닛케이 지수는 39.9% 상승했다. 선진국 내에서도 높은 상승률이다. 이종승 대표는 “10년 전부터 이어온 지속성장과 중장기 기업가치 향상이라는 키워드가 투자 확대와 성장으로 이어진 것”이라며 “주가는 결과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글로벌지속가능투자연합(GSIA)이 2022년 발표한 일본 보고서에서 잘 드러난다. 제목은 ‘10년의 반성’. GSIA는 해당 보고서에서 “2013년 아베 정부의 일본 재흥전략 일환으로 지속가능하고 책임 있는 투자를 강조한 책임투자의 기틀을 마련했다”며 “지난 10년간 일본의 지속가능 투자는 상당한 성장과 변화를 이루었다”고 밝혔다.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향후 어떠한 평가를 받을까. 초안은 실망감이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기회는 남았다. 이종승 대표는 지금부터 제도의 취지를 살려 약점을 보완하면 희망은 있다고 했다.

아직 최종안이 아닌 만큼 기대를 접기엔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거센 비판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28일 “기준 미달 땐 상폐를 검토하겠다”는 강경책도 내놨다. 앞서 금융위가 ‘패널티는 없다’고 말한 것과 배치되는 부분이다.

금융위는 1, 2차 세미나를 거쳐 상반기 중 최종 가이드라인을 확정할 계획이다. 향후 정책당국 의지에 따라 현실화될 가능성은 남아 있다. 주가도 관망세가 짙어지고 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