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회빙환과 먼치킨의 유행이 한국사회에 던지는 질문[EDITOR's LETTER]
2007년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에 빠져 있었습니다. 백악관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드라마입니다. 시대의 스토리텔러 아론 소킨이 쓴 각본은 탄탄했고, 모든 캐릭터는 매력적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시즌7까지 몰아 봤습니다. 마지막 시즌에서 히스패닉계 매슈 산토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 하이라이트이자 종결이었습니다.

여운이 남아 있던 2008년 말,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가 미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됐습니다. 흥분해서 블로그에 ‘웨스트윙이 현실이 됐다’란 제목으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깨달음은 ‘문화 콘텐츠에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갈망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예언의 조각들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넷플릭스도 돌아볼까요? ‘판데믹: 인플루엔자와의 전쟁’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신종 바이러스가 갑자기 나타나 세계에 퍼질 것이다. 중국은 주의해야 할 곳 중 하나다.” 이 다큐멘터리 제작연도는 2019년.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 해였습니다. 이 밖에 ‘스타워즈’는 과학 분야의 예언서가 됐다는 점을 더 말할 필요도 없을 듯합니다.

시대의 결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거나 결핍을 채우고 싶은 욕망, 그에 대한 상상이 적절한 비율로 혼합되면 히트작도 되고, 예언서도 되는 게 콘텐츠 시장의 속성입니다.

한국에서 이 요소들 가운데 상상의 영역을 무한대로 확장시켜준 공간은 웹툰과 웹소설일 것입니다. 요즘 이 영역에서는 먼치킨과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안티히어로가 대세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좀 들여다보니 기존 영웅의 서사에서 역경과 고난 극복의 과정은 과감히 생략하거나 줄이고, 느닷없이 갖게 된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이들의 얘기입니다. 사이다 같은 통쾌함에 젊은 세대는 빠져들었다는 겁니다.

생각해봤습니다. 이런 콘텐츠에 담겨 있는 시대의 결핍은 무엇이고, 욕망은 무엇일까. 조심스럽게 내린 개인적 결론은 경제의 발전, 그리고 삶의 황폐화였습니다. 갤럽 조사 결과 한국의 행복지수 세계 57위, 칠레·멕시코·세르비아보다 낮습니다. 학생들 삶의 만족도는 세계 꼴찌 수준입니다. 자살률과 노인빈곤율은 세계 1위이고, 노동시간은 2위입니다. 1998년 자살률 1위가 됐지만 국가는 모른 척합니다.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버립니다. 자살 예방 예산이 도쿄도의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청년고용률은 46.3%에 그치고, 비정규직 800만 명이 넘습니다. 행복한 세대는 어떤 세대일까요.

인간은 집단을 이뤄 자신을 지키며 진화했습니다. 개인은 가족이 함께 지켰고, 가족이 안 되면 지역공동체 또는 부족이 지켰고, 현대에서는 국가가 이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하지만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고독합니다. 가족은 여력이 안 되고, 수렵채집기 부족의 역할을 해줘야 할 국가는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되기 일쑤입니다. 국가는 선거철 빼고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것은 결국 돈이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는 이런 인식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17개국에 돌렸습니다. 한국만 1위가 ‘물질적 풍요’ 돈이었고 건강, 가족이 뒤를 이었습니다. 17개국중 돈을 1위로 꼽은 나라는 한국이 유일했습니다.
직장인들의 삶을 생각해봅니다. 하루를 치열한 경쟁 속에 보내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잠깐의 꿀 같은 휴식시간. 무언가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머리를 쉬어주려고 합니다. 힘든 것을 피하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는 콘텐츠 속 주인공에 동화되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현실도 힘든데 그들의 역경과 고난이 길어지는 것은 지친 정신을 더욱 힘들게 합니다.

먼치킨은 이런 시대에 만화와 소설, 드라마, 영화에서라도 막힌 속을 뚫어줍니다.

홀로 서야 하는 사회, 집 밖을 나가면 정글이 펼쳐지는 사회에서 외로움은 질병이 되고, 사회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물론 한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영국은 정부에 외로움부를 신설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도 개인이 아무런 보호막 없이 정글에 내던져지는 시스템에 대해 숙고해야 할 시간이 온 듯합니다. 현실에서 기대하기 힘든 먼치킨, 그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은 인간만이 발전시켜온 제도와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김용준 한경비즈니스 편집장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