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림도 없고 정영채와 김신도 가고…[하영춘의 경제 이슈 솎아보기]
정영채 NH투자증권 대표, 김신 SK증권 대표, 박정림 전 KB증권 대표. 이들의 공통점은 많다. 증권사 장수 CEO(최고경영자)란 점이 우선 그렇다. 정 대표는 6년 동안 NH투자증권 대표를 맡고 있다. 김 대표는 증권사 CEO 경력만 14년이다. 박 전 대표는 증권사 첫 여성 CEO로서 5년간 대표를 지냈다.

이들이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 뚜렷한 성과다. 나름대로의 일가를 이뤘다. 정 대표는 국내 대표적인 IB(투자은행) 전문가다. 주인이 바뀐 NH투자증권이 대형 증권사로 뿌리를 내리는 데 공헌했다. 김 대표는 채권브로커 1세대다. 장외파생상품 쪽에서 명성을 날렸다. 미래에셋대우와 현대증권 CEO를 지냈다. 휘청거리던 SK증권을 일으켜 세운 1등 공신이기도 하다. 박 전 대표는 리스크 관리와 자산관리(WM)를 두루 거쳤다. 직원들은 그의 꼼꼼함과 성실함에 혀를 내두른다.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서울대 경영학과 82학번이란 점이다. 이른바 ‘서울대 똥파리들’이다. 여의도 바닥에서는 김용범 메리츠금융 부회장을 포함해 서울대 경영학과 82학번 4명이 일찍부터 유명했다. ‘이들이 여의도를 말아 먹을 것’이라는 얘기가 진작부터 돌았다.

이 중 박 전 대표는 2023년 말 퇴임했다. 정 대표와 김 대표는 3월 물러난다. 이들 외에도 82학번 증권사 CEO들도 이번에 물러났다. 작년 말 CEO 자리를 내준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부회장도 단국대 82학번이다. 삼성증권 CEO에서 물러난 장석훈 전 대표도 연세대 경제학과 82학번이다. 미래에셋대우 대표를 지냈고, 작년 말 미래에셋생명에서 퇴임한 변재상 전 대표도 여의도에서 잔뼈가 굵은 82학번(서울대 법대) 증권맨이다.

똥파리라고 불리는 82학번. 베이비부머(1958~63년생)의 막내 세대로 이제 막 60세를 넘겼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자리를 내놓을 수밖에 없다. 증권사만이 아니다. 기업에선 더 빠르다. 재계의 대표적인 82학번이던 박정호 SK 부회장(고려대 경영학과)도 2023년 말 뒤로 빠졌다.

관계와 경제계를 통틀어 남아 있는 82학번이라곤 최상목 경제부총리(서울대 법대), 강석훈 산업은행 회장(서울대 경제학과), 오너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 회장(고려대 경영학과), 권봉석 LG그룹 부회장(서울대 공대)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쪽수를 앞세워 한 시대를 풍미하던 82학번들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외인 곳이 있다. 정치권이다. 4·10 총선에서 이른바 ‘명룡대전’을 앞두고 있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중앙대 법대)와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서울대 법대)도 82학번이다. 조국혁신당을 창당한 조국 대표와 5선에 도전하는 나경원 전 의원은 알다시피 서울대 법대 똥파리 동기다. 국민의힘에 영입된 ‘원조 운동권’ 함운경 후보도 서울대 물리학과 82학번이다. 이번 총선에서 출사표를 던진 더불어민주당의 김민석·조정식·김성주·이용우 후보 등과 국민의힘의 조해진·송언석·김상훈·박수영·이혜훈 후보, 개혁신당의 이원욱 후보 등도 역시 1982년 대학에 입학했다.

이들 모두 일찍부터 될성부른 나무의 떡잎이어서 지금껏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경제계나 금융계, 관계에서 뒤로 빠진 82학번들이 이들보다 모자라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과연 경제계의 수명이 짧은 것일까, 정치권의 수명이 지나치게 긴 것일까.

하영춘 한경비즈니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