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 및 관련 기기 수출업체 사장인 그는 우연한 기회에 아르헨티나를 방문했고 2주간 일정으로 자전거 투어에 나섰다. 사업상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드넓은 포도밭과 주변 자연경관에 반해 망설임 없이 ‘관광’을 선택했다.
“한가한 오후 예약도 없이 멘도사 중심부의 한 와이너리에 들렀어요. 소박한 테이스팅룸 야외테라스에서 만년설 덮인 안데스산맥을 바라보며 마셨던 그날의 와인을 결코 잊을 수 없죠.” 말벡은 태양과 바람 신이 준 자연의 선물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특히 여린 풀꽃 향과 비단처럼 부드러운 질감이 기억 속 깊이 각인된 것.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첫 모금의 느낌이 생생히 남아있다고. 와인 한 잔에 추억과 행복을 담았으니 멋진 인생임에는 틀림없다.
아르헨티나는 말벡의 나라다. 그 역사는 17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3년 4월 17일 칠레에서 망명 정치가로 활동 중이던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15년 뒤 17대 대통령에 당선)의 주선으로 프랑스 말벡 묘목이 아르헨티나에 처음 식재됐다.
포도나무 유입경로가 이처럼 명확하게,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매우 드문 케이스. 아르헨티나 정부는 이날을 ‘월드 말벡 데이’로 지정하고 매년 세계 60여 개 국가에서 성대한 기념행사를 진행한다.
말벡 원산지는 프랑스 남부 카오르 지방이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다가 카르메네르 블렌딩용으로 사용되면서 번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19세기 말 유럽 전역을 휩쓴 ‘필록세라’(포도뿌리혹벌레) 피해와 1950년대 중반 이상저온으로 ‘된서리’를 맞고 프랑스를 떠났다.
결국 ‘종족 보존’을 위해 미국, 칠레 등 신대륙 몇 나라를 떠돌다 우여곡절 끝에 자리 잡은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다. 최근 말벡이 인기를 끌면서 아르헨티나 대표 품종으로 등극, 현재 전 세계 말벡 와인의 75%를 생산한다.
아르헨티나 말벡의 특징은 프랑스 말벡과 달리 포도껍질이 얇다는 것. 따라서 타닌 함유량이 적은 대신 과일 맛과 향이 강하다. 강렬한 햇빛과 해발고도가 높은 안데스산맥의 쾌적한 환경 덕분이다.
곧 다가올 ‘월드 말벡 데이’에는 어떤 와인을 마시면 좋을까. 아르헨티나 와인 3종을 소개한다. 먼저 파이로스 싱글빈야드 말벡. 국내 수입사 동원와인플러스는 “강렬하고 짙은 보라색, 검은 과실과 허브 아로마가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와 함께 복합미와 부드러운 질감을 강조했다. 오픈하고 시간이 지나면 신선한 삼나무 향을 잡을 수 있다. 오크통 18개월, 병입 1년 숙성 후 출시한다. 서빙온도는 16~18도.
다음은 에올로 말벡. 붉은 과일향, 타닌감이 강하고 농축미가 특징. 스테이크나 바비큐 등을 곁들어 마시면 잘 어울린다. 와이너리 트리벤토는 ‘세 개의 바람’이라는 의미다. 에올로 역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바람의 신 이름이다.
끝으로 투석 점퍼, 카우 말벡. 타닌이 부드럽고 과일 향이 진하다. 프랑스와 미국산 오크 배럴에서 6개월, 병입 후 다시 3개월 숙성 뒤 출시된다. 와이너리가 위치한 산후안은 멘도사 인근 북쪽 지역으로 사토와 자갈이 많은 토양이라 말벡 외에도 다양한 재래종 포도 품종이 생산된다.
4월은 와인 마시기 좋은 계절이다. 태양과 바람의 신이 준 선물, 말벡에 도전해 보시길.
김동식 와인 칼럼니스트 juju4333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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