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일본은 10년 정책…한국 밸류업 단기 성과 기대 말고 끈기 있게 추진해야”
한국판 ‘밸류업 프로그램’이 공개된 지 1개월여가 흘렀다. ‘밸류다운 프로그램’이라며 시장의 실망감이 지배적이었던 초안은 지난 1개월간 수정을 거듭하면서 중장기적 기업가치 향상을 꾀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본뜬 일본의 사례에 닿기 위해선 아직도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1세대 애널리스트 출신인 이종승 IR큐더스 대표는 “일본의 사례는 1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종합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해온 결과”라며 “이제 막 도입한 한국에서 단기간에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금융당국과 시장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추진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종승 대표는 NH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을 6년 역임하고 현재 IR(투자자들에게 기업의 정보를 제공하는 활동) 컨설팅 기업인 IR큐더스를 이끌고 있다. 증권사 애널리스트와 국민연금 매니저도 이 대표의 기업분석 강의를 찾아 들을 정도로 기업분석에 정통했다.

이 대표는 일본 증시가 주목받기 전부터 일본 IR 업체들을 만나 이 분야를 파고든 전문가다. 그는 일본거래소가 자료를 발표할 때마다, J-증시가 꿈틀거릴 때마다 원문 자료를 찾아가며 공부했다. 지난 3월 15일 여의도 사무실 그의 책상에는 한국과 일본의 밸류업 프로그램 관련 자료가 그의 앉은키만큼이나 가득 쌓여 있었다. 10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 이 대표는 “한국에서는 현재 주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저평가되어 있으니 어떻게 하면 저평가를 해소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는 일본의 사례와 목적이나 접근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했다.

한국 정부가 최근 추진하는 밸류업 프로그램은 일본의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밸류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지속성장 및 중장기 기업가치 향상 노력’이란 프로그램명으로 2012년 12월 아베 내각의 경제 정책인 ‘아베노믹스’가 시발점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잃어버린 20년’에 빠진 일본 경제가 성장동력을 되찾아 부흥하기 위해서는 일본 기업이 지속성장과 중장기 기업가치 향상을 통한 선순환구조를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한 성장전략으로서 ‘기업의 지속성장과 중장기 기업가치 향상’이라는 목표를 설정했다. 성장이 먼저이고, 그 결과가 주가 상승이라는 얘기다.

이 대표는 “기업의 지속성장과 중장기 기업가치 향상을 위해서는 경쟁력 강화, 투자확대, 자본 효율화가 필요한데 이를 위한 실행 전략으로서 기업지배구조 코드와 일본판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것”이라며 “치밀하게 사전준비를 했고 1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종합적이고 지속적으로 일관되게 추진한 것이 포인트”라고 말했다.
“일본은 10년 정책…한국 밸류업 단기 성과 기대 말고 끈기 있게 추진해야”
그는 먼저 용어의 차이를 짚었다. ‘밸류’는 기업가치이고 주가는 ‘프라이스(가격)’라는 기초 상식이다. 이 대표는 “결국 밸류업은 주가 상승이 아니라 기업가치의 상승이고 기업가치에 변화가 없다면 밸류업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며 “일본 정부가 집중한 건 ‘어떻게 하면 기업가치를 올릴 것이냐’다. 어디에도 주가 얘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해 3월 일본 정부가 발표한 ‘자본비용과 주가를 고려한 경영 실현을 위한 대응’ 요구를 보면 일본 정부의 명확한 의도가 드러난다.

자료에 따르면 ‘자사주 취득이나 배당 증대 등의 일과성 조치보다는 지속적으로 자본수익성이 자본비용을 상회하면서 성장을 실현하기 위해 연구개발 투자, 인적자본 투자, 설비 투자,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등 경영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통한 근본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주식시장에서는 현재의 기업가치에서 주주환원정책 등을 통한 주가 상승을 기대하는 측면이 강한데 이는 진정한 밸류업이라기보다는 단기간에 걸친 주가부양책에 가깝다”며 “자사주 취득이나 배당 증대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일본 정부는 명확히 고지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일본 정부는 현재 기업의 상태에서 주가 상승을 위한 노력을 요구한 게 아니라 지속성장과 중장기적인 기업가치 향상을 가능하도록 하는 체질 강화를 목표로 했다. 이러한 목표를 기업과 투자자 간에 공동으로 가지고 간다면 주가는 자연히 이를 반영해 상승할 것이란 계산이 깔려 있었다.

반면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시작부터 주가였다. 현재 주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저평가되어 있으니 어떻게 하면 이를 해소할 수 있을지에 주목했다. 그래서 나온 방식들이 자사주 취득이나 소각, 배당 증대 등이다. 일각에서 ‘총선용 정책’이라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앞서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월 19일 자사주를 소각하거나 배당을 늘리는 기업에 대해서는 일정 범위 이내에서 법인세 감면 혜택을 주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1차 밸류업 프로그램에서 세제 혜택 조치가 빠졌다는 지적에 나온 후속조치다. 일본 정부나 이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일시적인 주가 부양책이다.
IR큐더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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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일본은 장기간에 걸친 근본적 대응에 주목했다. 예컨대 기업가치 향상을 뒷받침하기 위한 ‘시장구분’의 재편이다. 일본 거래소는 2022년 4월 기존의 시장제1부, 시장제2부, 마더스, 자스닥으로 구분되어 있던 주식시장을 프라임, 스탠더드, 그로스 시장으로 재편했다. 기존의 시장 구분이 기업가치 향상을 위한 동기부여가 부족하다는 점에 주목해 각 시장의 특징을 명확하게 구분 짓고(표1 참조) 상장유지 기준을 마련했다.

한국의 유가증권시장과 유사한 프라임 시장에는 높은 거버넌스 수준을 갖추되 영문 정보와 지속성장 관련 정보 공개의 충실성을 요구했다. 프라임 시장에 상장을 유지하려면 유통주식시가총액과 유통주식 비율을 일정 기준에 충족해야 하는 게 커다란 변화였다.

이종승 대표는 “시장구분의 콘셉트와 상장기준을 재설계해 상장사의 지속 성장과 중장기적인 기업가치 향상을 뒷받침하는 환경을 마련했다”며 “특히 기업으로 하여금 시장 선택권을 주고 기업이 유예기간 동안 상장유지 기준을 준수하지 못했을 때 상장 폐지와 같은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줬다”고 말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보면 회사가 자율적으로 변할 수 있게 유도하는 성장전략”이라며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기업 자율만으로는 기업의 변화를 이끄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우리도 이러한 주식시장 재편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기업과 기관, 적 아닌 동지”물론 우리 정부의 긍정적인 후속 조치도 있다. 이 대표는 3월 14일 김소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의 발언을 예로 들며 “일본의 사례와 같이 중장기적 기업가치 향상을 중시하는 취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김소영 부위원장은 기관투자가들의 행동 지침인 ‘스튜어드십 코드’를 개정해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가들이 ‘기업 밸류업 지원 방안’에 동참할 수 있는 구체적 근거를 마련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융위에 따르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반영될 원칙은 스튜어드십 코드 7개 원칙 중 셋째인 ‘기관투자가가 투자 대상 회사의 중장기적 가치를 제고할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점검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개정 가이드라인은 ‘투자 대상 회사가 기업가치를 중장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한 전략을 수립·시행·소통하고 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명시할 예정이다.

일본의 성공 역시 금융당국 주도로 진행된 스튜어드십 코드 정착이 꼽힌다. 하지만 일본 역시 처음에는 경영 간섭이라는 부정적 시각이 적지 않았다. 이 대표는 “일본 정부는 기업과 기관(투자가)의 공통 관심사는 기업의 성장과 기업가치 향상에 있다”며 “적이 아닌 동지란 점을 꾸준히 강조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금융당국 주도로 스튜어드십 코드 정착을 위한 후속회의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금융당국 외에도 법무성·경제산업성 등의 정부부처, 학계, 상장기업, 운용업계, IR업계 등 다양한 분야로 구성된 민관 합동회의를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약 28회에 걸쳐 진행했다. 회의록의 모든 내용은 금융청과 도쿄증권거래소 웹사이트에 투명하게 공개했다. 참석자들도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IR큐더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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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표는 “20~30명에 가까운 민관 합동 위원들이 발언한 내용을 모두 공개했다”며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한 지속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었다”고 평가했다.

실질적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추진력 있는 후속조치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사회에 독립적인 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고, 기업 자본이 경영진 보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엄격히 제재했다.
IR큐더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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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탄탄한 성과로 나타났다. 모두가 아는 J-증시의 턴어라운드뿐만이 아니다. 글로벌 기관들의 자금이 일본 증시로 급격하게 밀려 들어왔다. 지속가능 관련 글로벌 펀드는 2014년 8000억 엔에서 2022년 493조6000억 엔으로 급증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4000조원에 가깝다.

이 대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속가능 펀드의 비중이 계속 확대되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라며 “이전까지는 글로벌 선진 주요국 중 가장 폐쇄적인 국가에서 가장 급속히 성장한 국가로 변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일본은 4년 만에 유럽,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셋째로 큰 지속가능펀드 시장으로 성장했다.

이 대표는 한국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보다 잘 정착하기 위해서는 금융당국과 시장 모두 인내심을 가지고 끈기 있게 추진해나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성장전략이 ‘중장기’ 기업가치 향상이라는 일관된 목표하에 10년 이상 장기간에 걸쳐 노력해온 결과인 만큼 한국 역시 이제 막 도입한 정책들로 단기간 내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란 지적이다.

그는 “단기적 성과를 기대하고 성급하게 접근할 경우 목표로 한 성과 도출이 어려울 수 있고 주식시장에 후유증도 우려될 수 있다”며 “한국 상장기업의 체질 개선을 통한 기업가치 향상을 목표로 설정해 일본의 사례를 철저히 분석하고 한국적 상황에 맞게 응용하는 종합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들이 타인의 자산을 운용하는 수탁자로서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행해야 할 행동 지침으로 2017년 도입됐다. 현재 국민연금 등 연기금 4곳을 포함해 은행·보험·기관 등 222곳이 가입해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7가지 원칙으로 구성돼 있는데, 기관투자가들은 세부 원칙을 모두 지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예외적으로 일부 원칙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그 사유와 대안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이번 개정안으로 스튜어드십 코드 가이드라인이 개정되는 것은 2017년 발간 이후 7년 만에 처음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