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와인 랩소디<17>

지난해 병원 관련 한 단체 송년회에서 와인 강의를 진행했다. 끝 무렵 날카롭고 다양한 질의가 쏟아졌다. 예정 시간보다 30여 분이 초과할 정도였으니 의료인들의 ‘와인 열정’을 실감할 수 있다. 강의가 끝나고 식사를 하면서 살펴보니 만찬 및 선물용으로 준비한 와인은 풋풋한 풀 향 가득한 소비뇽 블랑. 병원 분위기를 감안하면 여린 느낌의 화이트 와인은 다소 어색한 조합이다. 더구나 신경외과 출신으로, 전투형 용장 스타일의 회장님이 직접 선택했다는 것. 의외의 결정에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과연 소비뇽 블랑의 어떤 매력이 그를 이끌었을까.

봄날 막 자른 잔디밭 위를 걸을 때 맡을 수 있는 풀 향은 사실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식물의 유일한 저항 수단이 바로, 냄새이기 때문이다. 외부 공격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강력한 ‘방어기전’인 셈이다.

소비뇽 블랑은 야생 향이 강한 품종이다. ‘소비뇽(Sauvignon)’이란 단어도 프랑스어 ‘소바주(Sauvage, 야생)’에서 유래했다. 즉 야생성이 강한 청포도 품종으로 이해하면 쉽다. 풀 향기가 어찌나 강한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아무리 초보자라도 샤르도네나 리즐링 등 다른 화이트 와인 품종과 쉽게 구분이 가능할 정도.
왼쪽부터 코노 수르 비씨클레타 소비뇽 블랑, 그레이왁 소비뇽블랑, 네이키드, 소비뇽 블랑.
왼쪽부터 코노 수르 비씨클레타 소비뇽 블랑, 그레이왁 소비뇽블랑, 네이키드, 소비뇽 블랑.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산지는 당연히 프랑스 루아르 밸리(어퍼 루아르)의 상세르와 푸이퓌메를 꼽을 수 있다. 이 지역 와인은 산도가 높고 깔끔, 짭쪼름한 맛이 특징. 미국 등 신세계 와인과는 다른 분위기다.

실제로 소비뇽 블랑은 기후나 토양 등 재배 여건에 따라 다양한 풍미가 나타난다. 즉 서늘한 기후에서는 금방 자른 잔디나 피망, 감귤 향을 쉽게 잡을 수 있다. 신맛도 강해 식전주로 마시면 입 안 가득 침이 고이면서 입맛을 돋운다.

반면 더운 기후에서는 자몽이나 망고, 파인애플 등 잘 익은 열대 과실 향이 풍부하다.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 대표적.

그와 함께 신세계 소비뇽 블랑의 최대 경쟁력은 가성비. 뉴질랜드 와인이 세계 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리자 미국과 칠레, 남아공 등이 잇달아 뛰어들면서 가격이 내려간 것. 변별력을 갖춘 뉴질랜드산 2종과 칠레산 1종을 소개한다.


먼저 옅은 연두 컬러의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 ‘그레이왁’. 강한 풀 향, 상대적으로 높은 산도가 특징이다. 시간을 두고 마시면 옅은 초콜릿 향도 끝없이 올라온다. 오크 배럴 숙성 덕분이다.
모든 포도밭은 유기농 방식으로 관리한다. 와인메이커 캐빈은 말보로 와인을 세계에 알린 주인공. “잘 익은 여름철 과일과 복숭아, 구운 사과, 망고 등 복합적인 풍미가 지속된다”는 것이 수입사 루벵코리아의 설명이다. 실제 테이스팅을 해보면 가성비가 좋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모금에서 다른 와인보다 좀 더 강하고, 짙은 맛과 향을 잡을 수 있다. 뉴질랜드 대표 소비뇽 블랑으로 손색 없다.

다음은 같은 지역에서 생산된 네이키드, 소비뇽 블랑. 투명하고 맑은 그린, 옐로 컬러가 예쁘다. 순수함을 최고 경쟁력으로 내세운 이 와인은 청정구역 말보로 토양과 풋풋한 느낌의 소비뇽 블랑 특성을 100% 살려냈다. 씨에스알와인 김정윤 대표는 “스테인리스 스틸탱크 숙성만 진행해 다른 향이 전혀 섞이지 않았고 그 덕분에 소비뇽 블랑 본연의 풍미 가득하다”고 말한다. 초반 풀 향 외에도 복숭아, 감귤향이 난다. 집중하면 아카시아꽃 향도 잡을 수 있다.

끝으로 코노 수르 비시클레타 소비뇽 블랑. 잔에 따르면 연둣빛 감도는 밝은 황금색에 눈길이 간다. 첫 모금에서 파인애플과 흰 꽃 향을 잡을 수 있다. 산도는 다소 약하고 당도는 높은 편. 자극적이지 않아 와인 초보자들이 마시기에는 편하다. 신선한 샐러드나 해산물, 담백하게 요리한 닭고기 등 메인 메뉴와도 잘 어울린다. 알코올 도수 12.5도. 식전주로 마시기에 알맞다. 수입사는 신세계L&B. 직영 주류 전문매장인 와인앤모어나 이마트에 가면 좀 더 저렴한 가격에 만날 수 있다.

김동식 와인 칼럼니스트
juju4333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