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솔 감독이 제작한 AI 영화 ‘원 모어 펌킨’ / 사진=두바이국제AI영화제 홈페이지
권한솔 감독이 제작한 AI 영화 ‘원 모어 펌킨’ / 사진=두바이국제AI영화제 홈페이지
“많은 인공지능(AI) 연구자들이 지금 이 순간을 ‘오펜하이머 모멘트(Oppenheimer moment)’라고 부른다.”

미국 출신의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지난해 영화 ‘오펜하이머’를 선보이며 이같이 말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 핵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원자폭탄을 개발한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 모멘트는 원자폭탄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고 애초 의도치 않은 파장까지 불러일으킬 가능성을 내포할 순간을 이른다. 즉 놀라운 기술적 발전과 연구자의 윤리적 딜레마가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같은 놀란 감독의 얘기엔 AI가 원자폭탄에 이어 인류의 두 번째 오펜하이머 모멘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강력한 경고와 우려가 담겨 있다.

최근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오펜하이머 모멘트가 도래했음을 직감하고 있다. 특히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문화 영역에 AI가 접목되면서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원 모어 펌킨(One More Pumpkin)’과 같은 AI 영화가 나오는가 하면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AI 콘텐츠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는 AI가 인간의 감각을 모방하고 습득해 감정을 생산한 단계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기술 수준도 단순히 흉내를 내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정교한 표현과 세련된 기법을 선보여 놀라움을 선사한다. 이러다 정말 어느 순간엔 인간이 직접 창작한 작품과 AI의 작품을 전혀 구별하지 못할 정도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창작자가 아닌, AI가 만든 콘텐츠를 주로 감상하며 울고 웃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인간은 신비롭고도 두려운 오펜하이머 모멘트를 본격적으로 맞이하고 있다. 누구나 창작자 vs 진정한 창작은 없다

AI를 이용한 콘텐츠 제작은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2월 두바이에서 열린 ‘제1회 두바이 국제AI영화제’에만 전 세계에서 500여 편에 달하는 AI 영화가 몰렸다. 그중 대상을 차지한 작품은 한국인인 권한솔 감독이 직접 디렉팅한 AI 영화 ‘원 모어 펌킨’이었다. 이 작품은 3분짜리 단편 영화로, 200살 넘은 부부에게 저승사자가 찾아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제작 기간은 단 5일이다. 실제 배우나 성우가 투입되지 않은 것은 물론 카메라와 녹음, 조명 등 제작 인력마저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생성형 AI가 모든 장면과 음성을 만들었다.
많은 AI 영화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국내 영화계에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는 7월 열리는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는 국내 국제영화제 가운데 최초로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을 신설했다. 부산의 영화의전당 역시 올 하반기 ‘AI영화제’를 개최하고 대학, 기업 등과 협력해 다양한 기술개발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세련된 감각이 필요한 뮤직비디오도 AI가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 싱어송라이터 워시드 아웃은 지난 5월 생성용 AI로 만든 ‘더 하디스트 파트(The Hardest Part)’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4분짜리 짧은 영상으로, 한 여인의 고등학교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로맨스를 담았다. 결혼식부터 육아, 죽음 등 다양한 이미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몽환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실제 카메라가 공간을 빠른 속도로 이동하며 움직이고 있는 듯한 착시효과까지 불러일으킨다.
싱어송 라이터 워시드 아웃이 제작한 뮤직비디오 '더 하디스트 파트'의 한 장면 / 유튜브 캡쳐
싱어송 라이터 워시드 아웃이 제작한 뮤직비디오 '더 하디스트 파트'의 한 장면 / 유튜브 캡쳐
이 같은 움직임은 주요 AI 업체들이 영상 생성형 AI를 잇달아 개발하며 더욱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지난 2월 공개된 ‘소라(Sora)’는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만든 영상 생성형 AI다. 아이디어를 텍스트로 입력해 최대 1분 길이의 동영상을 만들 수 있다. 이 영상들을 이어 편집하면 3~4분 분량의 영상뿐 아니라 2~3시간짜리 영화, 나아가 여러 회차의 드라마까지 만들 수 있게 된다.

구글도 지난 5월 영상 생성형 AI ‘비오(Veo)’를 공개했다. 비오는 영상 생성은 물론 영상 편집 기능까지 제공한다. 예를 들어 바닷가 영상을 입력한 후 배를 추가해 달라는 명령어를 입력하면 바다 위에 배가 떠다니는 식이다. 구글은 비오를 향후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쇼츠를 만들 때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방침이다.

엄청난 속도의 기술 발전, 그리고 인간을 능가하는 AI의 영상 제작 솜씨에 신기하기도 하고 감탄도 나온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을 그대로 적용해 감정을 만들어내는 AI를 보면 어쩐지 섬뜩해진다.

물론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도 있다. 머릿속에 아이디어는 많지만 관련된 기술적 재능이 없거나 습득하기 어려웠던 일반인도 AI를 활용하면 얼마든지 쉽게 영상을 제작할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낮아진 문턱이 과연 장르적·산업적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

영화를 예로 들어 보자. 이런 추세라면 영화는 ‘종합예술’이란 지위를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영화는 영상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음악, 미술 등 다양한 영역이 교차하는 ‘종합예술’에 해당한다. 또한 대중문화인 동시에 뛰어난 작품성과 예술성을 담고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이 같은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 영화감독, 음악감독, 미술감독 등 수많은 제작진은 함께 처절한 고뇌의 시간을 보낸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기획을 하고, 각본을 쓰며 스토리를 탄탄하게 쌓아올리고, 촬영을 하며 완벽한 미장센을 구현하려 노력한다. 그리고 여기엔 그들만의 철학과 세계관이 고스란히 투영된다. 이를 연기하는 배우 역시 표정과 몸짓에 이를 여실히 담아내려 한다.

반면 AI는 특정 콘셉트를 입력한 단 몇 줄의 문장에만 기반해 영상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다. 아무리 그 문장을 입력하는 인물의 고민이 들어가는 것이라 해도 ‘종합예술’이라는 영화의 고유한 특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과연 AI 영화를 진정한 의미의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AI 쓰나미에 ‘21세기판 러다이트 운동’ 일어날까

오펜하이머 모멘트가 이미 도래했음은 창작자들 역시 깊이 인식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시작됐던 1만1500여 명의 미국 할리우드 작가들의 대규모 파업은 이를 잘 보여준다. 148일에 걸쳐 진행된 이 파업은 할리우드 역사상 두 번째로 길게 진행됐다. 이 파업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AI였다.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무분별하게 AI 학습 훈련에 쓰이고 있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또한 AI가 만든 대본 초안을 작가들에게 수정하라고 지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에 반발했다.

이번엔 1만1500여 명, 148일의 파업이었지만 그 다음엔 얼마나 더 큰 움직임이 일어나게 될까. AI가 일으키고 있는 엄청난 파급력을 감안하면 1811~1817년 영국에서 일어난 ‘러다이트운동’을 뛰어넘는 움직임이 일어나지 않을까. 러다이트운동은 방직기가 개발되면서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의 일거리가 급격히 사라질 것이란 우려가 심화되며 일어난 기계파괴운동이다. 이보다 더 크고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 문화계 창작자들은 어떤 길을 가게 될까.

게다가 다양한 딥페이크 영상도 쏟아져 나오고 있어 산업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국내에선 최근 가수 비비의 노래 ‘밤양갱’을 가수 아이유가 부른 영상이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이는 AI가 해당 가수의 목소리를 학습해 직접 노래를 부른 것처럼 만든 가짜 영상이었다.

해외에선 오픈AI의 AI 챗봇 ‘GPT-4o’가 할리우드 배우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를 무단으로 모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요한슨은 영화 ‘그녀(Her)’(2014)에서 AI 목소리를 연기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를 실제 현실에서 AI가 무단으로 똑같이 재현했다는 점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거대한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는 AI의 공습. 오펜하이머 모멘트는 이미 시작됐고 갈수록 인간이 예상한 범주를 훨씬 벗어나 강력한 충격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상 단 한 번도 경험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나가야 할까. 문화계에서도 이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며, 대비할 것인지 다양한 방안들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AI가 촉발한 오펜하이머 모멘트가 곧 파멸의 버튼이 되지 않도록.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