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배터리·게임·플랫폼·화장품 산업 동시에 위기
기존 성공 방식에 멈추고 시장 변화 대응 못해
전문가 "혁신 실종된 와중에 팔로어십마저 붕괴"

지난 5월24일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한국경제
지난 5월24일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문화행사가 열리고 있다./한국경제
30년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점령했던 삼성전자의 3년간 주가 상승률은 제자리걸음을 걸었다. 같은 기간 대만 파운드리 기업 TSMC 주가는 45% 뛰었다.

기간을 넓혀도 삼성전자의 성장이 정체했다는 걸 알 수 있다. 2013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삼성전자 매출의 연평균 성장률은 1%대였다.

국내 투자자들이 꿈을 안고 뛰어들었던 BBIG(바이오, 배터리, 인터넷, 게임)의 추락은 더 거셌다. 2020년 PDR(주가 꿈 비율)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광풍이 불었던 BBIG의 성적은 현재 초라하기만 하다.

K-배터리 대표기업인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1년간 42.2% 급락했고 대한민국 플랫폼 주권을 지키던 ‘네카오’는 성장동력을 잃은 채 고점 대비 각각 60%, 74% 고꾸라졌다.
반도체부터 콘텐츠까지…한국 기업은 어쩌다 위기와 마주했나[K기업 고난의 행군①]
게임 대장주 엔씨소프트는 2021년 100만원을 넘겼던 주가가 20만원 아래로 떨어졌다. 한국 콘텐츠의 힘은 강해졌는데 K-뷰티(아모레퍼시픽)와 K-콘텐츠 기업(CJ ENM)은 실적도 주가도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멀쩡한 건 기업밖에 없다”던 말이 나올 정도로 위상을 떨치던 일등기업들이 동시에 어려움에 처한 모양새다. 누군가는 시장변화에 늦게 대응했고 누군가는 무리한 투자로 인한 재무 부담에 허덕이고 있다.

과거 성공 방정식에 집착하며 혁신에 실패했거나 경직된 리더십과 붕괴된 팔로어십으로 위아래 혁신이 모두 실종한 기업도 있다. 2년 전만 해도 꽤나 괜찮아 보였던 국내 대기업들의 포트폴리오는 갑자기 퇴색해 미래지향성을 발견하기 힘들어졌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의 성장동력이 급속히 약해진 이유를 시대의 빠른 변화와 함께 거버넌스에서 찾았다.

“삼성전자와 TSMC 이사회만 비교해봐도 주가와 실적 차이를 알 수 있다. TSMC의 이사회 구성을 보면 등기이사 10명 중 1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사외이사로 채워져 있다. 주목할 점은 6명의 사외이사 면면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회사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의 CEO를 역임했던 마이클 스플린터, 모셰 가브리엘로브 전 자일링스 CEO, 얀시 하이 전 델타일렉트론 이사회 의장, 라펠 리프 전 MIT 총장, 피터 본필드 전 BT그룹 CEO 등 대만 내국 출신 법률 전문가 1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글로벌 반도체 기술 전문가다.

이들이 TSMC의 전략을 다듬고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있다. 한국만 여전히 전근대적인 경영판단으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실수를 한다.”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 JP모간, 메릴린치, 노무라증권 등을 거친 이남우 연세대 교수의 분석이다. 혁신은 사라지고 성공 방정식은 한계 부닥쳐
서울 시내 카카오프렌즈 매장 모습./연합뉴스
서울 시내 카카오프렌즈 매장 모습./연합뉴스
삼성전자와 엔씨소프트는 기존 성공 방정식이 한계에 부닥치며 위기를 맞았다. 그들이 이룬 성공 공식을 답습하느라 혁신과 리더십이 부재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우선 반도체.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는 ‘가격’과 ‘시간’의 싸움이었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원가 경쟁력을 높이고 빨리 공급하는 기업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막대한 설비투자를 통해 생산규모를 확보하고 원가 경쟁력을 앞세우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반도체 설계만 하는 미국 기업이나 생산만 해주는 파운드리 기술력을 앞세워 수요를 빨아들이는 TSMC만큼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와중에 AI가 모든 산업 패권을 쥐면서 반도체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너십’을 놓쳤다.

변화된 반도체 산업의 본질이기도 하다. 기술은 기본이고 여기에 고객과의 파트너십이 중요해지면서 ‘수주업’에 가까운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런 수주업을 해본 적이 2000년대 이후로는 거의 없다.

오랜 기간 시장에서 1위를 독주해온 영향이다. 최근 ‘엔비디아 테스트 통과 여부’ 뉴스가 삼성전자 주가에 영향을 미친 이유다. 삼성전자란 회사가 특정 기업에 납품을 하냐 못하냐에 시장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낯선 광경이지만 새로운 현실이다.

엔씨소프트는 ‘현질’을 유도하는 리니지 IP로 성공을 맛본 이후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실패했다. 이를 두고 한 업계 관계자는 “리니지로 쌓은 성공의 시간이 결국 실패의 씨앗을 심는 시간이 됐다”고 분석했다.

시장 변화 대응에 늦어 잘못된 전략을 짠 기업들도 있다. 유통업이 대표적이다. 이마트는 선택과 집중에 실패하며 이커머스 시장이 확대되는 와중에 온라인 대신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다. 쿠팡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제서야 부랴부랴 이베이를 비싼 값에 인수했지만 뒤늦은 판단이었다.

롯데백화점은 유통업의 본질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신세계, 현대가 백화점 사업의 본질을 ‘부동산업’에서 ‘몰링’으로 체질 개선에 나서며 오프라인 공간의 정의를 바꿀 때 롯데백화점만 다점포 전략을 고수했다. 아모레퍼시픽 역시 빠르게 변화하는 화장품 시장에 대응하지 못했다. 대기업 특유의 늦은 상황 판단과 잘못된 전략으로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실패했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플랫폼 기업의 생명인 혁신이 실종했다. 벤처의 기운, 스타트업의 기운도 사라지고 대기업 흉내를 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네이버는 빅테크와의 AI 경쟁에서 밀린 채 글로벌 사업을 이끌던 라인마저 뺏길 처지에 놓였다. 카카오는 문어발식 사업 확장과 내수 위주 사업 등 미래 성장동력을 상실했다. 쪼개기 상장, 경영진 리스크 등으로 투자자 신뢰마저 잃었다. GE·도시바의 몰락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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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 혁신으로 새로운 시장을 열고 선두를 달렸던 기업도 정체기를 맞는다. 성공의 경험은 시효를 다하면 실패의 싹이 되기도 한다. 혁신의 결과물은 일상이 되고 경쟁자들은 더욱 새로운 제품으로 그 자리를 위협한다.

기업이 위기를 맞는 공식은 글로벌 기업도 다르지 않다. ①일등이 이룬 성공 방정식에 집착했고 ②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③민첩성은 떨어지고 리더십은 경직됐다. ④과도한 부채와 무리한 투자로 재무 부담은 늘어나고 ⑤혁신적 리더십이 실종된 와중에 아래에서의 팔로어십은 붕괴한다.

미국 시가총액 1위를 10년 동안 지켰던 제너럴일렉트릭(GE)은 문어발식 사업 확장과 잘못된 경영판단으로 13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계 최초로 노트북을 개발하고 일본 반도체 산업의 주역이었던 도시바 역시 반도체 사업이 동력을 잃고 신사업으로 뛰어들었던 원전사업에 실패하며 쇠락의 길을 걸었다. 도시바가 중국에 매각한 TV사업과 백색가전은 여전히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다. 잘못된 경영판단으로 인해 돈 되는 사업은 팔고 내리막길을 걸은 것이다.

2024년 한국 기업의 셈법은 더 복잡하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자유무역이라는 말은 고어가 된 지 오래다. 세계 각국은 새로운 진영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새판을 짜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실패도 기회로 삼을 수 있던 고성장 시기는 끝났고 추격자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남우 교수는 “한국 기업은 밑에서의 혁신과 위에서의 리더십이 모두 사라졌다”며 “엔지니어, 전문직군의 동기부여나 헝그리 정신은 떨어지는데 위에서는 방향성을 잡아주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면 우물 안 개구리식 실수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도체부터 콘텐츠까지…한국 기업은 어쩌다 위기와 마주했나[K기업 고난의 행군①]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