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차량 소유자의 운행자 책임 범위 확대 판결
자율주행시대, 운행자 책임 적용의 새로운 과제
운행자란 ‘자기를 위해 자동차를 운행하는 자’로 현실적으로 자동차를 관리하고 운영하거나 자동차 운행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을 뜻한다.
자동차손해배상보상법에 따라 운행자 책임은 운전 행위가 아닌, 운행지배(자동차의 운행과 관련해 현실적으로 자동차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일)와 운행이익(운행으로 얻는 이익)에 근거해 부과된다.
최근 판례는 자동차 소유자의 책임 범위를 넓게 보고 있으며, 이는 향후 자율주행차 시대의 책임 소재 논란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지인이 몰래 운전하다 사고 “차량 소유주도 책임”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재판관)는 지난 5월 30일 현대해상이 차량 소유주 A 씨를 상대로 제기한 구상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냈다(2024다204221).
A 씨는 2019년 10월 게임 동호회에서 만난 B 씨의 집 근처에 차량을 주차하고 B 씨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신 후 잠들었다. B 씨는 다음 날 오전 A 씨가 잠든 사이 자동차 열쇠를 몰래 가지고 나와 술에 취한 상태로 운전하다가 보행자 C 씨를 치는 사고를 냈다.
이 사고로 C 씨는 약 14주간의 치료가 필요한 발목 골절 상해를 입었다. C 씨의 보험사인 현대해상은 C 씨에게 치료비와 합의금 등으로 총 1억4627만원의 보험금을 지급했다. 이어 A 씨에게 운행자 책임에 의한 손해배상을, B 씨에게 일반 손해배상을 각각 청구했다.
쟁점은 지인이 차를 무단으로 운전한 경우에도 차량 소유주에게 운행자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였다. 대법원 판례는 운행자 책임 여부를 판단할 때 자동차나 열쇠의 평소 관리상태, 운전이 가능하게 된 경위, 소유자와 운전자의 관계, 소유자의 사후 승낙 가능성 등을 고려하도록 한다.
1심(이현종 판사)은 A 씨와 B 씨에게 공동 배상 책임을 인정했으나 2심(재판장 김양훈 판사)은 A 씨의 책임을 부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 A 씨의 과실이 중대해 B 씨의 운전을 용인했다고 볼 수 있거나 사고 당시 차량에 대한 피고의 운행지배와 운행이익이 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A 씨와 B 씨의 친분 관계, A 씨의 과실로 B 씨가 차량 열쇠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점 등을 고려했다. 상고심 재판부는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운전자의 무단 운행을 차주가 사후 승낙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피고가 사고 당시 자동차에 대한 운행지배와 운행이익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버스 멈추기 전 일어서다 넘어진 승객…“버스회사 책임”
운행자는 자동차를 사용, 관리하는 자로 보통 자동차 소유자를 운행자로 본다. 대법원 판례(2009다63106)에 따르면 “(운행자는) 자동차 소유자 또는 보유자는 통상 그러한 지위에 있는 것으로 추인된다”며 “사고를 일으킨 구체적 운행이 보유자의 의사에 기하지 아니한 경우에도 그 운행에 있어 보유자의 운행지배와 운행이익이 완전히 상실됐다고 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보유자는 당해 사고에 대해 운행자로서의 책임을 부담한다”고 판시했다.
또 다른 대법원 판결(2021다257705)에서는 버스 승객이 다쳤을 때 ‘고의 여부’를 운행자인 버스회사가 증명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2021년 11월 시내버스업체인 A 여객 등을 상대로 구상금을 청구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청구를 기각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승객이 일어나 가방을 메다 정차하는 반동에 의해 넘어져 다친 경우 운전기사와 버스회사에 책임이 있는지를 다툰 사건에서 1·2심은 운전기사의 과실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자동차 사고로 승객이 부상한 경우 운행자는 승객 부상이 고의로 인한 것임을 주장·증명하지 못하는 한 운전상의 과실 유무를 가릴 것 없이 승객 부상에 따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돋보기] 자율주행차 사고 시 차량 소유자 책임은?
자율주행 자동차 사고 시에도 운행자 책임은 기본적으로 차량 소유주에게 있을까. 자율주행 시대에도 운행자 책임의 원칙은 유지될 것으로 보이나 기술 발전에 따른 법적, 사회적 변화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자동차 사고에 대한 민사 책임 중 운전자 책임은 운전자의 주의의무 위반을 요건으로 하는 과실책임이다. 반면 운행자, 보유자, 소유자의 책임은 자동차에 대한 지배와 권한을 요건으로 하는 무과실책임(준무과실책임)이다.
자율주행 기술 4단계 이상에서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4단계는 지정된 조건에서 운전자의 개입 없이 자동차를 운행할 수 있는 ‘조건부 완전자율주행’ 단계다. 무인 자율주행차는 운전자가 아예 없다.
황현아 보험연구원 연구위원(변호사)은 “운전자가 고의로 운행 조건을 위반하거나 시스템을 조작하지 않는 한 자율주행모드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운전자의 손해배상책임이 성립되기 어렵다”며 “반면 소유자와 보유자, 운행자는 운전상 주의의무 위반과 관계없이 자신이 소유, 보유, 운행한 차량이 사고를 일으킨 이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율주행차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는 소유자”라고 강조했다.
자율주행차 소유주의 ‘운행지배’를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이강호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자율주행차 소유주의 운행관리나 통제 등 운행지배를 인정하기엔 논란이 있을 수 있다”며 “기계적 결함, 해킹 가능성 등으로 인해 사고가 날 수 있는 문제가 있어 제조물 책임 쪽으로 가는 게 좀 더 합리적이다”고 말했다.
자율주행으로 인한 ‘운행이익’이 누구에게 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될 전망이다. 신용우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는 “운행자 책임의 핵심은 결국 이익을 갖는 쪽이 책임을 지라는 것”이라며 “자율주행 운행으로 이익을 얻는 쪽에 운행자 책임을 적용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제작사나 자율주행시스템 제공자의 책임 여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제조물책임이 성립되려면 결함의 존재와 결함과 사고 사이의 인과관계가 입증돼야 하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과제다.
황 연구위원은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대륙법계 국가들은 자율주행차 사고의 일차적 책임을 자동차 소유자 또는 보유자에게 있다고 보는 추세지만 초기에는 자동차 제작사나 자율주행시스템 제공자가 제조물책임법에 따라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며 “자율주행차 시대에 자동차 제작사에 더 강한 책임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강호 변호사는 “제조물 책임을 입증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해 자율주행차 시대에 피해자 보호를 위해 제조물 책임을 좀 더 인정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입법 정책이나 재판 운용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허란 한국경제 기자 wh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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