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 –6.62%
AMD –10.21%
브로드컴 –7.91%”
7월 17일(현지 시간) 금융시장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잘나가던’ 미국 나스닥지수가 일간 최대 낙폭을 기록하며 투자자들을 충격에 빠뜨린 순간이었다. 나스닥지수가 2%대 하락률을 보인 것은 4월 30일 이후 3개월 반 만의 일이자 2022년 12월 15일(-3.23%) 이후 1년 7개월 만에 가장 큰 하루 낙폭이었다.
이날의 급락은 나스닥지수를 구성한 종목들의 실적 문제가 아니었다. 물가나 고용, 금리 등의 거시경제나 대외변수도 아니었다. 오직 트럼프. 7월 13일 펜실베니아주에서의 피격사건 이후 강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른 트럼프의 한마디가 금융시장을 뒤흔든 것이었다. 엔비디아와 인텔 주가를 가른 건 “대만이 우리의 반도체 사업을 거의 100% 가져갔다. 멍청한 사람들이 나라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절대 허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대만이 우리에게 방위 비용을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는 지난 7월 16일 오후 5시(현지 시간)에 전 대통령이자 현 공화당 대 후보인 트럼프와의 인터뷰 전문을 공개했다. 트럼프는 인터뷰에서 인플레이션, 세금 감면, 관세, 주요국과의 관계 등 국내외 경제에 대한 생각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무차별 폭격이었다. 특히 대만 반도체 산업에 강경 입장을 드러냈다. 다음 날 반도체주(株) 투자 심리가 크게 가라앉은 결정적 이유였다.
트럼프의 말 한마디에 유럽(ASML), 아시아(TSMC, 도쿄일렉트론)의 반도체 업종과 함께 나스닥100 선물을 중심으로 -1%대 이상 하락했다. 개장 후에도 반도체와 대형 기술주 중심으로 낙폭을 확대했다. TSMC 주가는 7.98%, ASML은 10% 넘게 하락했다. 엔비디아는 6.6%,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 역시 6.8% 하락 마감했다. 오직 인텔, 글로벌파운드리 등 미국 파운드리 업체만이 6~8% 상승했다. 트럼프의 ‘자국 우선주의’가 주가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미국의 성장성에 대한 의심은 아니었다. 나홀로 소폭 상승세(0.59%)를 이어간 다우평균지수가 그 반증이었다. 다우지수는 미국의 양호한 산업생산과 주택착공 지표 발표를 바탕으로 상승세를 이어가며 로테이션 흐름을 지속했다. 은행, 에너지, 소재 등과 호실적 모멘텀을 이어가는 보험 업종이 상승세를 주도했다.
두 지수 모두 미국 주식시장을 대표하지만 지수를 구성하는 종목 차이가 이날의 주가를 갈랐다. 트럼프의 발언에 엔비디아·TSMC 등 AI 반도체 종목들이 대거 포함된 나스닥지수가 전통 우량주를 담은 다우평균보다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조연주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주도주의 추세적 변화보다는 트럼프 당선 가능성이 유력해지면서 바이든 및 민주당의 정책 반격 등 대선 불확실성을 선반영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저격 미수 사건으로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지자 주식시장도 부랴부랴 트럼프 정책 수혜 분야에 주목했다. ‘트럼프 트레이드(트럼프 당선 수혜주로 돈이 몰리는 현상)’는 트럼프 2기에서 실행될 수 있는 정책 기대감에서 비롯됐다. 피격사건 직후 업종별 수익률을 보면 에너지, 금융, 산업재가 큰 폭으로 올랐다. 테마 기준으로 보더라도 금융(핀테크), 파이프 라인, 은행 테마가 강세를 보였다. 반면 정책 피해주로 여겨지는 태양광 등 친환경 에너지와 2차전지 관련주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맞붙은 정책 수혜주시장 관측자들은 대개 한 후보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주식은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한다. 시장이 가장 두려워하는 불확실성이 어느 정도 상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혼란스럽다. 트럼프의 주가가 한창 치솟던 7월 21일(현지 시간)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후보직 사퇴를 발표했다. 주가는 또 한번 출렁였다. 이번엔 반대였다. 성명문 발표 후 첫 거래일인 22일(현지시간)엔 다우지수와 나스닥지수, S&P500까지 미국 3대 주요 증시가 모두 상승 마감했다.
이날의 증시를 끌어올린 건 트럼프의 맹공 이후 주춤하던 기술주였다. 테슬라(5.15%), 엔비디아(4.76%), 메타(2.23%), 알파벳(2.21%), 구글(2.21%) 등 대형 기술주들이 크게 올랐다.
투자회사 에드워드존스의 모나 마하얀 선임 투자전략가는 “기술주 매도가 충분히 이뤄진 뒤 기술주로 다시 순환매 매수세가 되돌아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다”며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인하 가능성이 투자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대선 레이스의 불확실성보다 오는 9월 금리인하 가능성이 시장 기대를 강화시켰다는 분석이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Fed의 자금 선물 거래자들은 9월 정책회의까지 금리가 최소 25bp 인하될 확률을 약 98%로 보고 있다. 사실상 9월에 시장이 그토록 기다려온 통화 완화 사이클이 시작될 것이란 ‘확신’이었다.
그 이후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르면서 미 대선 구도가 다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약체’로 여겨졌던 해리스가 부상하면서 피격사건 이후 자본시장을 움직인 ‘트럼프 트레이드’에 대한 기대 혹은 우려도 주춤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트럼플레이션’ 우려로 상승하던 국채금리가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트럼프 강세론이 불붙었을 때만 해도 미국의 재정 및 인플레이션 압력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돼 채권시장에서도 트럼프 트레이드가 발생해 채권금리 상승에 베팅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지금은 베팅이 약화하고 있다. 웰링턴매니지먼트컴퍼니의 브리즈 쿠라나 채권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바이든의 사퇴는 민주당이 의회에서 적어도 한 곳을 장악할 가능성을 높인다”며 “이렇게 의회 권력이 나뉜다면 채권금리는 지금보다 훨씬 낮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 수혜주도 즉각 반응을 보였다. 이른바 ‘해리스 트레이드’다. 해리스 수혜주 역시 정책에 기인하는데 해리스는 바이든의 정책을 뒤이을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와는 정반대로 태양광·풍력 등 탄소 중립 관련 기업 또는 마리화나 합법화 주장에 따라 의료용 대마 진출 기업이, 전기차 보조금 관련 정책 지속 전망에 전기차·배터리 관련주가 해리스 트레이드로 주목받고 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앞으로 여론이 어떻게 변화될지에 따라 트럼프 트레이드가 크게 위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미 대선 구도 변화에 따라 금융시장의 변동성 역시 당분간 커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정치 리스크 대신 펀더멘털 이제 남은 시간은 100일. 워싱턴에는 짧지만 월가에는 지루한 여정이다. 그렇기에 시장은 정치 불확실성을 어느 정도 선반영하고 다시 펀더멘털과 금리의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술주와 소형주의 최근 추이도 이 같은 움직임을 보여준다.
7월 23일 테슬라를 시작으로 주요 기업들이 월가 전망을 밑도는 실적을 발표하면서 증시에도 먹구름이 짙게 드리웠다. 24일엔 주요 테크 기업으로 구성된 ‘M7’의 주가가 일제히 큰 폭으로 내렸다. 래리 애덤은 정치가 주식 전망을 평가하는 10가지 요인 중 하나이지만 중요도에서는 여덟 번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경제, 기업 실적의 성장, Fed의 정책 등이 부문 성과를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기술주가 주춤한 사이를 파고든 건 소형주와 가치주였다. 특히 소형주 중심의 러셀2000지수가 기술주가 주춤한 2주 새 역사적인 상승을 기록하며 두 자릿수 수익률을 올렸다가 최근 일부 수익을 반납했다. 2020년 4월 이후 가장 긴 상승세였다. 소형주는 대형주보다 금리에 더 민감하다는 점에서 금리인하 기대가 높아진 지금 상승폭이 커진 것이다.
박상현 애널리스트는 “미 대선으로 쏠렸던 금융시장의 관심은 다시 Fed와 미국 경제의 펀더멘털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금융시장도 여론 추이를 보면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첫째 지켜봐야 할 건 7월 30~31일 개최될 FOMC 회의다. 7월 회의에서 전격적으로 금리인하가 단행될 가능성은 낮지만 9월 금리인하에 대한 시그널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서정훈 삼성증권 애널리스트는 “트럼프의 전격 부상과 바이든의 사퇴는 시장의 거대 변수로 작용하며 셈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서도 “매크로 환경과 기업의 펀더멘털 측면에서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지를 먼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서 애널리스트는 “최근 높아진 시장 변동성은 전례 없는 시세를 구가했던 빅테크들에 차익 실현 압력이 누적된 상황에서 경제적, 정치적 급변기가 함께 찾아옴에 따라 발생한 것”이라며 “변동성 와중에도 기존 주도주들의 견조한 펀더멘털에는 변화가 부재하다. 미국 대선 트레이드에 대한 고민 역시 당장의 실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트럼프 재임 기간인 2017년부터 팬데믹 직전까지 주가 수익률이 가장 높았던 섹터는 IT였고 반대는 에너지였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트럼프 수혜주로 에너지가, 피해주로는 M7 등의 빅테크가 꼽히지만 트럼프 1기의 실상은 그 반대였다는 주장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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