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게 빌려서 비싸게 갚게 생겼다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나선 글로벌 투자자
정부가 "저축에서 투자로" 유인
일본 국민, NISA 계좌 급증
하지만 투자와 소비에 모두 소극적인 일본 국민 대신 그동안 ‘엔저’ 효과를 누리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관광객들은 싼값에 여행을 즐기러 일본으로 갔고 글로벌 은행과 자산운용사, 헤지펀드 등 기관은 거의 공짜로 대출을 받기 위해 일본에 줄을 섰다.
일본에서 돈을 빌려 수익이 높은 상품이나 금리가 높은 국가에 투자하기 위해서다. 공짜로 엔화 대출을 받아서 미국 국채에 투자해 5% 이익을 얻으면 투자 기간 동안 지출 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셈이다.
투자자들은 이 밖에도 엔화를 빌려서 엔비디아 등 미국 기술주, 대만 주식, 부동산, 멕시코 페소화 등 신흥국 통화에 투자해 돈을 벌었다. 이처럼 엔화를 빌려 다른 곳에 투자하는 ‘엔캐리트레이드’는 최근 글로벌 증시 하락의 주범으로 지목됐다. 일본이 이제 “무이자 시대를 끝내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이유 :
싸게 빌려서 비싸게 갚게 생겼다 마이너스 금리 기조는 BOJ가 지난 3월 단기금리를 인상하며 해제됐다. 17년 만에 이뤄진 금리인상이었다. 하지만 엔화 가치는 이전보다 더 하락했다. 당시 BOJ가 시장 유동성을 공급하는 장기 국채 매입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변곡점은 지난 7월 31일 BOJ가 기준금리를 4개월 만에 또 깜짝 인상한 때였다. 국채 매입도 줄이기로 했다. 국채 매입액을 월 6조 엔 규모에서 단계적으로 감액해 2026년 1분기에는 월 3조 엔으로 줄인다고 발표했다. 일본 엔의 가치는 7월 초 기준 약 37년 만에 최저 수준까지 내려갔다. 1달러가 161.7엔에 거래됐다.
그런데 BOJ의 금리인상 계획 발표 이후 145엔 안팎을 오르내릴 정도로 떨어졌다. ‘블랙먼데이’였던 8월 5일에는 엔·달러 환율이 141.68엔까지 떨어졌다.
엔화 강세로 한 달 만에 엔·달러 환율이 12.54% 빠진 것. 엔캐리트레이드로 각국에 투자하던 글로벌 투자자들은 화들짝 놀랐다. 엔화를 싸게 빌렸는데 엔화 가치가 여기서 더 올라가면 이자가 비싸지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은 서둘러 엔캐리트레이드 청산에 들어갔고 글로벌 자산시장에 배분됐던 돈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최근 미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증시까지 발작한 가장 직접적 이유다.
엔캐리트레이드는 엄청난 규모라고 짐작만 될 뿐 정확한 금액도 알 수 없다. UBS 글로벌 전략가 제임스 맬컴은 2011년 이후 누적된 달러-엔캐리트레이드 규모가 5000억 달러(약 688조원)에 달하고 이 중 절반이 지난 2∼3년간 추가됐다고 추산했다. 그는 일본의 금리인상 이후 지난 몇 주간 이 중 약 2000억 달러어치가 청산됐으며 이는 예상 청산 규모의 4분의 3에 달한다고 말했다.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국경을 건너는 엔 차입 규모가 2021년 말 이후 7420억 달러(약 1000조원) 늘었다. 다만 이 금액 전체가 엔캐리트레이드로 향한 것은 아니다."국가 믿고 투자했는데"...
저축에서 증시로 나선 일본 개미들 분노 BOJ는 그럴듯한 계획이 있었다. 경제의 기초체력이 회복됐다는 자신감이었다. 엔저는 일본 수출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렸고 경상수지에 큰 혜택이었다.
도요타자동차는 올해 2분기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엔화 약세로 매출과 순이익이 모두 분기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일본의 경상수지 흑자는 상반기에 약 119조400억원을 기록했다. 17개월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갔고 작년 같은 기간보다 59.2% 증가했다. 일본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225 평균주가(닛케이지수)도 지난 7월 11일 사상 최고인 4만2224를 기록했다.
하지만 일본 내부에서 엔저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던 참이었다. 수입물가가 오르며 부담이 커진 가계는 물론이고 엔저 효과를 톡톡히 봤던 기업들까지 우려하고 나섰다. 엔저로 인해 원자재와 에너지 수입 비용이 증가하면서 6월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3.3% 올랐다.
그동안 물가상승을 경험하지 못한 일본인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2년 넘게 지속됐다. 임금이 오르는 속도는 물가를 따라잡지 못했다. 물가 상승분을 뺀 실질임금은 지난 5월까지 26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다 6월에서야 증가세로 돌아섰다. 여름 보너스를 지급한 영향이다.
BOJ가 내건 물가인상 목표는 2%였다. 목표를 달성한 BOJ는 이제 슬슬 긴축의 시대로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일본의 금리인상으로 피해를 보는 건 글로벌 투자자뿐만이 아니었다. 일본 가계 역시 저축에서 주식으로 ‘머니무브’가 이뤄진 상황이었다. 국민들의 주식투자를 적극적으로 유도한 게 일본 정부였다.
기시다 정권은 그동안 ‘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 확충으로 ‘저축에서 투자로의 전환’을 강조해왔다. 이를 위해 주가도 적극 부양했다. 일본 거래소는 2023년 PBR 개혁에 나섰다. 지난해 두 차례나 상장 기업들에 직접 “주가를 올리라”고 압박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지난 1월과 3월 도쿄증시에 상장한 3300여 개 기업에 ‘PBR이 1배를 밑도는 상장사는 주가를 끌어올리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공시하고 실행해 달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그렇게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의 주가를 부양했다.
개인투자자에겐 소액투자비과세(NISA)제도를 당근으로 던졌다. 일본은 주식 매매 차익과 배당 수익 등에 전부 세금(약 20% 분리과세)이 붙는데 NISA 계좌로 투자하면 세금이 붙지 않는다. 일본증권업협회에 따르면 지난 1~5월 중 NISA를 통한 투자금 규모는 6조6151억 엔(약 62조2700억원)으로 전년 동기 규모(1조5813억 엔)의 6배 가까이 급증했다.
올 6월 말 기준 NISA 계좌는 1520만 개였다. 주가 상승기에는 증시로의 자금 유입에 탄력을 주면서 순기능을 발휘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급락장에서는 개인투자자들의 손실이 속출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주가 대폭락 이후 소셜미디어는 아비규환이 됐다. “나라가 투자를 권해 갑자기 큰 손해가 났다”는 글이 줄을 이었다. NHK는 이번 주가 폭락이 다음 달 실시되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는 기시다 후미오 총리에게 암초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자민당 내에서도 불편한 기류가 나왔다. 자민당 아소파의 한 중견 정치인은 아사히신문에 “국민으로부터 (좋게) 평가받았던 경제정책이라는 이 정권의 장점이 사라졌다”며 “기시다 정권이 더욱 궁지에 몰렸다”고 지적했다.
BOJ의 금리인상 시점을 두고도 쓴소리가 쏟아졌다. 7월 말 금리 인상 결정 후 급격히 진행된 엔화 강세가 주가 하락을 가속화했다는 이유에서다. 경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잘못된 인상이라는 비판과 함께 정치 압력이 개입됐다는 의혹까지 나온다. 실제로 BOJ의 7월 회의를 앞두고 자민당 고위 관계자들이 금리인상을 촉구하는 공개 발언을 했다.
결국 BOJ 부총재가 금리인상을 발표한 지 일주일 만에 계획을 뒤집었다. 우치다 신이치 부총재가 지난 7일 “금융 자본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금리인상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증시에 공포감이 조성된 만큼 향후 엔·달러 환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엔화가 추가로 강세를 보이면 엔캐리트레이드 청산 속도가 가팔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윤정 교보증권 애널리스트는 “환율 변동성이 확대돼 엔화 강세 폭이 강해지면 이번에 청산되지 않았던 캐리트레이드 자금이 유출되면서 글로벌 증시의 하방 압력을 다시 한번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엔화 절상에 따른 환차손에도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자본 차익 기대감으로 아직 청산되지 않은 자산군이 존재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김영은 한경비즈니스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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