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그레이엄, 워런 버핏 등
수많은 투자 전문가들도 실패 겪어
그레이엄, 한때 자산 70% 잃으며 속앓이
버핏, 방직산업 투자했지만 사업 실패로 보험사 전환
증권사들이 투자에 대해 가장 강조하는 부분이다. ‘자기판단 자기책임의 원칙’에 의거해 그 책임은 결국 투자자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만큼 결정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다.
대가의 포트폴리오도 마찬가지다. 수익률이 좋은 투자자들의 선택도 정답은 아니다. 심지어 이들도 과거 다양한 실패를 겪었다. ‘가치투자의 아버지’ 벤저민 그레이엄,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월가 최고의 펀드매니저’ 빌 애크먼, ‘실리콘밸리의 전설’ 크리스 사카 등 전 세계 유명인들도 과거 투자에 실패하거나 원석을 발굴하지 못한 채 지나치기도 했다. ◆ 벤저민 그레이엄1894년 영국에서 태어난 벤저민 그레이엄은 재무제표를 분석해 주식을 투자한 ‘가치투자의 아버지’로 불린다. 29살에 이미 백만장자가 됐으며 워런 버핏의 스승으로도 유명해 “성공한 투자를 하려면 벤저민을 따르라”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레이엄의 포트폴리오는 신뢰도가 높다.
이런 그레이엄도 한때 자산의 70%를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레이엄은 대공황이 발발하기 전인 1926년 지인들과 함께 ‘벤저민 그레이엄 조인트 어카운트’라는 펀드를 만들었다. 1926년부터 1928년까지 3년간 연평균 25.7%의 수익률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이 기간 다우지수 성장률(20.2%)보다 높았다. 45만 달러로 시작한 펀드 규모는 250만 달러까지 불어났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했다. 그는 포트폴리오를 정리하는 대신 ‘보수적인 투자’를 선택했다. 대공황 시작 1년 만에 20% 손실을 기록했다. 250만 달러 가운데 50만 달러가 허공으로 사라졌지만 같은 해 다우지수가 17% 하락한 것과 비교했을 때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때 그레이엄은 발을 빼야 했지만 최악의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해 다시 투자를 시작했다. 투자 효과를 더하기 위해 신용융자(투자금으로 대출을 받아 주식을 매입하는 거래)까지 동원했다. 결국 1930년 50%의 손실을 냈다. 그레이엄은 강의, 컨설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931년 펀드는 16%의 손실을 봤다. 대공황 3년간 최초 자본금 250만 달러 가운데 70%를 잃었고 약 75만 달러만 남게 됐다.
훗날 그레이엄은 월가 전문가의 정확성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30년 이상 연구했지만 결국 선택은 투자자의 몫”이라고 답했다. 월가 사람들이 아는 것은 이미 주가에 상당 부분 반영돼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며 전문가를 더 신뢰할 수 없다고도 했다. ◆ 워런 버핏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도 모든 투자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아니다. 첫 실패는 현재 그가 회장으로 있는 ‘벅셔해서웨이’다.
1962년 버핏은 일부 방직업체들이 폐업하자 방직산업이 재편될 것이라 확신하고 벅셔 주식을 사들였다. 이후 회사 임원들을 상대로 주식 공개매수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화가 난 버핏은 아예 회사를 인수하고 임원들을 해고했다.
하지만 방직 사업은 미국에서 이미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회사는 계속 어려워졌다. 외국 업체들과 가격경쟁에서도 밀렸다. 1980년대 경제 불황까지 덮치면서 결국 1985년 벅셔는 공장 가동을 멈추고 보험사 및 투자회사로 전환했다. 그는 2010년 CNBC와 인터뷰를 하면서 “내가 산 가장 멍청한 주식은 바로 벅셔해서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증권회사 살로먼브라더스는 버핏을 체력적, 정신적으로 모두 힘들게 한 사례다. 벅셔해서웨이는 1987년 살로먼브라더스 상환전환 우선주 7억 달러어치를 매입하며 최대주주가 됐다. 그때까지 버핏의 단일 투자 가운데 최대 금액이었다.
하지만 인수한 지 얼마 안 돼 1987년 10월 주가 폭락을 뜻하는 ‘블랙먼데이’ 사태가 발생했다. 다우지수는 하루 만에 22% 내려앉았다. 우선주 투자 시점에 회사의 보통주는 32달러에 거래됐지만 블랙먼데이 이후 16달러까지 하락했다.
더 큰 문제는 1991년 발생했다. 회사 소속의 채권 딜러 폴 모저가 재무부를 상대로 허위 매수 주문 행각을 벌이면서 살로먼의 국채입찰 조작 스캔들이 터졌다. 이로 인해 회사는 존폐 위기에 빠지게 됐고 결국 버핏이 9개월간 임시 회장직을 맡았다. 1992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등은 살로몬에 2억9000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했다. 금융회사에 부과된 최대 규모 벌금이었다.
버핏은 “명성을 쌓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그걸 무너뜨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투자에서 실수는 불가피하다. 중요한 것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가장 최근 실패는 ‘파라마운트’였다. 벅셔해서웨이가 SEC에 제출한 서류에 따르면 지난해 말 회사는 파라마운트 주식 전량을 처분했다.
벅셔는 2022년 1분기부터 파라마운트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해 2023년 말 6330만 주까지 늘렸다. 파라마운트 주가는 2022년 44% 하락했으며 지난해 또다시 12% 떨어졌다. 파라마운트 주가는 지난해 말 16달러대까지 올랐으나 다시 10달러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막대한 부채와 경영난에 시달리면서 비용 절감을 목적으로 직원 수백 명을 해고하기도 했다. 파라마운트는 지난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파라마운트 플러스(+)로 인해 10억 달러 이상의 손실을 냈다.
5월 주주총회에서 버핏은 “100% 내 책임”이라며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벅셔가 구체적인 손실액은 밝히지 않았으나 증권업계는 이 금액이 15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빌 애크먼196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월스트리트 최고의 펀드매니저 빌 애크먼은 1993년 26살의 나이에 ‘고담 파트너스’라는 헤지펀드를 창업하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표적인 행동주의(적극적으로 주식을 매입하고 주주총회에 참석해 경영에 개입) 투자자로도 불린다.
애크먼은 최악의 헤지펀드 거래 중 하나로 꼽히는 ‘밸리언트’ 사례의 주인공이다. 심지어 이 투자는 ‘스캔들’(대중적인 물의를 빚는 부도덕하고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평가된다. 2015년 3월 애크먼은 주가 196달러의 캐나다 제약회사 밸리언트에 32억 달러를 투자했다. 밸리언트 주가는 2015년 중반 최고점을 기록한 이후 하락하기 시작했다. 회계장부 조작 혐의가 드러난 탓이다. 약값 인상 논란으로 캐나다 정부 조사를 받자 260달러까지 치솟았던 주가는 12.11달러로 95% 폭락했다.
그럼에도 애크먼은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지분을 9.9%까지 늘리며 계속 매입했다. 그가 제시한 목표주가는 330달러였던 만큼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애크먼은 등기임원으로 이사회에 참여하고 최고경영자(CEO)를 교체하는 등 적극적으로 회사를 살리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900억 달러에 달한 시가총액은 40억 달러대로 떨어졌다. 결국 2017년 투자 실패를 인정하고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매각 가격은 11달러였다. 40억 달러를 잃은 셈이다.
미국 헬스케어 식품 제조업체 ‘허벌라이프’도 어쩔 수 없이 장기투자가 된 사례다. 2012년 애크먼은 허벌라이프를 ‘다단계 조직’이라고 비난했다. 투자자들에게는 “허벌라이프 제품을 구입한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도 던졌다. 이때 애크먼은 10억 달러의 허벌라이프 주식을 공매도(주식을 보유하지 않고 매도 주문을 내는 방식, 주가가 떨어질수록 이익)했다. 허벌라이프 전체 주식의 20%에 달했다. 이로 인해 주가는 폭락했고 애크먼이 이익을 얻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억만장자이자 행동주의 투자자인 칼 아이언이 끼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아이언은 애크먼과 대립하며 허벌라이프를 좋은 회사라고 평가하며 공매도 규모의 2배인 20억 달러어치 주식을 사들였다. 애크먼의 비난 이후 26달러대까지 떨어지던 주가는 70달러대로 올랐다. 애크먼의 최초 공매도 시점 대비 70% 상승한 가격이다.
심지어 2016년 7월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는 2년간의 조사 끝에 허벌라이프가 다단계 사기 업체는 아니라고 결론 냈다. 또다시 주가는 올랐고 2018년에는 100달러대에서 거래됐다. 애크먼이 공매도에 베팅한 당시 대비 4배 가까이 뛰었다. 결국 애크먼은 2017년 말부터 2018년 초까지 허벌라이프 주식을 사서 공매도 포지션을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잃은 금액은 수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 크리스 사카1975년 미국 버펄로에서 태어나 구글의 임원을 지낸 크리스 사카는 실리콘밸리의 전설적 투자자다.
사카는 32살이었던 2007년 돌연 구글을 퇴사하고 ‘벤처캐피털리스트’로 직업을 바꾼다. 이때 사카는 무선인터넷 보급에 따라 제2의 인터넷 붐이 올 것을 확신, 2010년 로어케이스캐피털을 설립했다. 그의 장기는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의 비상장 기업) 찾기다. 트위터, 우버, 인스타그램, 트윌리오 등이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할 쯤 이들 회사에 투자하며 40대에 억만장자가 됐다.
그러나 놓친 것도 많다. 고프로(액션 카메라), 드롭박스(클라우드 기반 파일 보관 서비스), 에이비앤비(숙소 공유 서비스), 스냅챗(휘발성 사진 공유 서비스), 핀터레스트(이미지 공유 서비스) 등이 대표적인 사카의 ‘후회 리스트’다. 사카가 잃은 기회를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만 달러에 달한다.
사카는 구글 근무 당시 닉 우드먼 고프로 창업자를 만났었다. 당시에도 사카는 고프로를 부정적으로 봤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백인의 회사가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카메라 업체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드롭박스도 같은 이유로 투자하지 않았다. 사카는 드롭박스가 와이 콤비네이터(실리콘밸리 스타드업 인큐베이터)에 참여할 때부터 회사를 알고 있었으나 이들의 사업이 구글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드롭 휴스턴 드롭박스 창업자에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말까지 했다. 에어비앤비, 스냅챗, 핀터레스트 등도 마찬가지다.
훗날 사카는 “나는 늘 빗나간 판단을 한다. 지나쳐버린 기회에 관한 악몽은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수진 기자 jinny06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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