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5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코스피 시장에서 차지하는 시가총액 비중 격차가 13년 만에 최소 폭으로 좁혀졌다.
실적도 희비가 엇갈렸다. SK하이닉스가 3분기에 사상 최대 실적을 썼지만, 삼성전자는 이미 낮아진 시장 기대치에도 못 미치는 실적을 내놨다. 업의 본질 바뀐 반도체 시장 HBM 시장을 장악한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슈퍼 호황기를 뛰어넘는 실적을 올렸다. SK하이닉스는 지난 3월 HBM3E 8단을 엔비디아에 납품한데 이어 오는 4분기 12단도 공급하기로 했다. 내년 하반기에는 6세대(HBM4) 12단 양산을 계획하고 있고 2026년에 HBM4 16단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회사는 예측하고 있다.
HBM 공급 과잉설에도 선을 그었다. SK하이닉스는 3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내년에도 AI 메모리 중심의 호실적 흐름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D램서 HBM 생산 비중도 높인다는 계획이다. 3분기 전체 D램 매출의 30%에 달했던 HBM 매출 비중이 4분기에는 40%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늘어나는 AI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회사는 2028년까지 약 82조원가량을 HBM 등 AI 관련 사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대부분 설비 증설에 투입될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삼성전자는 혹한기를 지내는 중이다. 3분기 실적 부진으로 경영진이 사과문까지 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계절이 갈리는 이유는 AI 시대 메모리반도체의 법칙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메모리반도체는 ‘가격’과 ‘시간’의 싸움이었다. 규모의 경제를 통해 원가 경쟁력을 높이고 빨리 공급하는 기업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막대한 설비투자를 통해 생산규모를 확보하고 원가 경쟁력을 앞세우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D램 기술 경쟁력 지표인 ‘나노 경쟁’에서는 삼성전자를 따라올 회사는 없었다. 반도체 설계만 하는 미국 기업이나 파운드리 기술력을 앞세워 수요를 빨아들이는 TSMC만큼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싸게 잘 만들어 놓으면 고객들이 알아서 필요한 만큼 사갔다.
AI 시대에는 과거와 달리 ‘맞춤형 반도체’가 승패를 가른다. ‘선 생산, 후 주문’ 방식이 아닌 ‘선 주문, 후 생산’ 방식, 즉 고객사가 원하는 대로 반도체를 설계해 납품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파트너십이다. 변화된 반도체산업의 본질이기도 하다. 기술은 기본이고 여기에 고객과의 파트너십이 중요해지면서 양산업에서 ‘수주업’으로 변했다.
AI에 특화한 대용량 D램인 HBM이 전면에 등장했고 일찌감치 개발에 나선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TSMC와 협업하며 삼성전자를 제치고 이 시장 1위에 올랐다. SK하이닉스가 “내년까지 수주 완판”을 자신 있게 외치는 이유 역시 내년 엔비디아 블랙웰 물량까지 엔비디아, TSMC, SK하이닉스 간 캐파 조율이 끝났기 때문이다. AI 파트너십이 공고해지는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갑자기 추격자 처지가 됐다.
HBM처럼 고사양 제품이 아닌 범용 D램 시장에서는 중국의 추격이 거세다. 스마트폰, PC 등 반도체 수요 시장이 부진한 와중에 중국의 범용 D램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중국 메모리 업체의 레거시(구형) 제품 공급 영향으로 실적이 하락했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 PC 등 완제품 수요가 부진한 와중에 중국 반도체 업체들의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범용 D램 가격이 낮아지고 수익성이 악화했다는 분석이다. 메모리의 또 다른 축인 낸드플래시에서도 중국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10년간 90조 투자에도 전략 수정 없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또 다른 축인 파운드리 사업 역시 AI 반도체 열풍에 올라타지 못했다. 수율 문제로 고객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으며 1위 TSMC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 2분기 파운드리 시장점유율은 TSMC가 62.3%, 삼성전자가 11.5% 수준이다. 특히 TSMC는 3나노, 5나노와 같은 선단 공정 부문에서 시장점유율이 92%에 달한다.
삼성전자는 평택 파운드리 공장 일부 가동률을 낮추고 파운드리 라인을 메모리로 전환하는 등 속도조절에 나섰다. 미국 테일러시에 짓고 있던 파운드리 공장은 가동 시점을 연기했다.
엔비디아 칩을 생산하고 빅테크 물량을 쓸어담은 TSMC는 최대 실적을 새로 썼다. 전문가들은 메모리와 비메모리를 아우르는 종합 반도체 회사로서의 정체성이 오히려 독이 됐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메모리 사업에서 이룬 성공 공식을 답습하느라 혁신과 전략 수정이 부족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2019년 이재용 회장이 ‘2030년 시스템 반도체 세계 1위’ 전략을 선포한 이후 비메모리 사업으로 인력과 투자를 집중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센터장은 “대대적인 투자를 앞세운 규모의 경제는 삼성 메모리반도체의 성공 공식이었지만 비메모리와 메모리는 본질적인 비즈니스의 성격이 엄연히 달랐다”며 “고객과 기술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대규모 투자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2011년부터 비메모리 사업에만 무려 90조원 이상의 금액이 투자됐지만 낮은 투자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비메모리 사업에 대한 전략적 수정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의 변화가 시장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엔비디아가 인텔의 시가총액을 넘어선 건 불과 4년 전이다. 2020년 엔비디아 시가총액이 처음 인텔을 추월했다. 하지만 4년 만에 산업과 증시의 판이 완전히 뒤집혔다. 파운드리 시장에 호기롭게 뛰어들었던 인텔은 최근 파운드리 사업 부진으로 사상 최악의 위기를 겪으며 파운드리 분사에 나섰다. ASML의 주요 고객이던 삼성전자와 인텔의 파운드리 사업이 부진하면서 관련 장비 투자를 급격하게 줄이자 장비 기업인 ASML 역시 3분기 수주액이 반토막 났다.
주가도 엇갈렸다. 1년 동안 엔비디아(247.4%), TSMC(131.5%), SK하이닉스(64.5%), 마이크론(63%) 등 엔비디아 생태계에 속한 반도체 기업이 폭풍 상승할 동안 삼성전자(-12.1%), 인텔(-37.2%)은 반도체 상승장에서 소외됐다.
세계를 호령하던 한국 반도체는 분기점에 서 있다. 부동의 1위였던 삼성전자는 흔들리고 있다. SK하이닉스도 AI 흐름에 올라탔지만 기술적 리더십은 엔비디아와 TSMC에 넘어가 있다. 한국 반도체산업이 과거의 영광을 이어가려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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