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장에서 가장 관람객이 많이 다니는 곳에 넓게 자리 잡았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업체는 당시만 해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도시바, 파나소닉, 소니 등 일본 업체들이 아니었다. 중국 업체들이었다. 중국 기업의 성장과 침투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한국의 가전 산업도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선진국의 벽을 하나 하나 넘어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1990년대까지 세계 가전업계를 쥐고 흔들던 일본 업체들은 물론 전통의 독일과 미국 업체들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진격에 하나둘 후퇴하고 말았다. 미국의 월풀 정도만 이들의 경쟁자로 남아 있을 정도다.
하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 가전산업 지형의 변화는 한국 기업들이 조금도 방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4년 전 CES 현장에서 느꼈던 일이 현실이 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글로벌 가전 시장 매출 1위는 중국 메이디그룹이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가전업체의 주문자생산방식(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을 오랫동안 담당한 기업이었지만 지난 몇 년간 프리미엄 시장에서도 약진하며 상반기에만 40조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해외 매출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상반기 전체 매출에서 해외 매출 비중은 41.92%다.
삼성전자나 LG전자처럼 단일 브랜드로 승부를 본 것은 아니지만 기술력까지 등에 업고 유럽 시장에서 존재감이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중국산은 ‘싸게 사서 막 쓰다가 자주 바꾸는’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로봇청소기, TV, 와인냉장고 등 가격대가 높은 가전 시장에서도 중국산의 역습이 시작됐다. 한국 기업은 프리미엄 전략과 인공지능(AI), 운영체제(OS) 등 소프트웨어 기술력을 앞세우며 ‘가전 명가’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2위 삼성전자는 고급화 전략을 유지하며 세계 최대 가전 시장 미국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글로벌 TV 시장에서는 2007년 이후 굳건한 1위를 지키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전 세계 TV 시장에서 금액 기준 점유율 28.8%로 1위를 기록했다.
LG전자는 글로벌 가전 시장 수요가 부진한 와중에도 순항하고 있다. 3분기에는 전체 영업이익의 약 70%가 생활가전 사업에서 나왔다. 생활가전사업을 맡은 H&A사업본부 영업이익은 5.5% 증가하며 전체 실적을 견인했다. TV 사업은 올레드 TV 주요 시장인 유럽 지역의 출하량 증가에 힘입어 매출액이 전년 동기 대비 5.2% 늘었다.
LG전자는 '가전 구독' 등 새로운 성장동력에도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가전 구독은 매월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가전제품을 이용하는 사업 모델이다. 가전제품만 이용하는 게 아니라 필터 교체, 정기 청소 등 관련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 정수기, 공기청정기 같은 소형가전뿐 아니라 TV, 냉장고, 에어컨, 스타일러, 청소기 등 거의 모든 가전 상품을 구독할 수 있다.
LG전자는 말레이시아와 대만, 태국 등 해외 시장에서도 가전 구독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LG전자 가전 구독 서비스는 빠르게 성장해 지난해 1조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LG전자의 국내 가전 매출 중 구독 비중은 지난해 15%에서 올해 20%를 넘어섰다. 올해는 연매출 1조8000억원이 예상돼 ‘미래 동력’으로 확실하게 거듭날 전망이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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