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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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과 금리를 예측하려고 하지 마라”던 피터 린치(월가 유명 펀드매니저)의 격언이 새삼 와닿는 때다. 불과 한 달 전 1달러에 1312원까지 떨어졌던 원·달러 환율이 1390원대까지 상승했다. 한 달 새 80원 가까이 급등하자 시장에서는 심리적 저항선으로 불리는 달러당 1400원을 넘을 수 있다는 관측, 심지어 ‘1400원이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번질 정도다.

중동발 리스크에 미국 경제 호조, 한국 경제의 침체, 미 대선의 도널드 트럼프 재선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사실상 대내외 시장의 재료는 ‘강달러’를 뒷받침하고 있다.

강달러 기습에 다른 통화들도 속수무책 평가절하됐다. 그중에서도 엔캐리트레이드를 청산하며 강세를 보였던 엔화, 금리인하에도 환율의 안정성을 기대했던 원화 등 한국과 일본의 타격이 가장 컸다. 다시 덮친 환율 리스크, 투자 전략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전쟁 중 러시아보다도 평가절하전쟁 중인 러시아보다 가치가 절하됐다. ‘환율’ 얘기다.

미국 기준금리 인상 시점부터 지금까지의 달러 대비 주요국 통화 환율을 비교하면 지난 9월 19일부터 10월 29일까지 절하폭이 가장 큰 통화는 엔화(-7.6%)였다. 그다음이 원화(-4.3%)다. 이어 러시아 루블화(-3.8%), 유로화(-2.8%), 캐나다 달러(-2.1%), 영국 파운드(-1.5%), 태국 바트(-1.2%), 중국 위안(-0.7%), 대만 달러(-0.1%) 순이다.
‘1400원’ 턱밑까지 오른 환율…“R의 공포 피했더니 환율이 또”
한·일은 주요국 중에서도 절하폭이 컸다.

강달러의 ‘대외’ 요인은 모두 동일했다. 미국의 고용지표(9월) 호조와 지정학적 위험 부각의 영향, 여기에 11월 5일로 예정된 미 대선 리스크다.

‘R의 공포’를 의심하던 미국 경제는 노랜딩을 향해 순항 중이다. 미국 9월 비농업 부문 신규 고용은 25만4000명으로 6개월래 최대폭으로 증가했으며 실업률은 4.1%로 전월 대비 0.1%포인트 하락했다. 11월 FOMC에서의 빅컷 가능성이 급감했으며 미국 경기침체 가능성 역시 현저하게 낮아졌다. 문정희 KB국민은행 자본시장사업그룹 수석이코노미스트는 “10월 초 미 고용 결과와 소비자물가, 소매 판매 등 핵심 경제지표가 이전치, 예상치를 넘어서면서 미 국채금리가 오르고 달러화 지수도 큰 폭으로 상승했다”고 설명했다.

시장도 트럼프에 베팅했다. 미 대선 구도에서 공화당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이 급격히 커지면서 미 국채 금리가 상승하고 달러화 가치가 뛴 것이다. 트럼프 당선 가능성이 커진 11월 6일 오후 2시 현재 원달러 환율은 1395원에서 등락중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재정 지출 확대, 보호무역주의 확산, 이민자 유입 축소 등으로 물가상승 압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트럼프 1기’는 세계가 함께 경험한 강달러의 시대였다. 진옥희 하나은행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원은 “무역 갈등 격화와 이민 제한 정책은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 성장에 하방 압력으로 작용해 안전자산 선호 속 달러 강세로 연계될 수 있다”며 “실제로 트럼프 1기 시절 무역 갈등이 격화된 2018∼2019년 달러는 강세 흐름을 이어갔다”고 밝혔다.

여기에 우크라이나, 중동 지역 등 최근 고조되고 있는 지정학적 리스크에 북한의 경의선 및 동해선 도로 폭파, 우크라이나 전쟁 합류까지 지정학적 위험이 세계 곳곳에서 터지면서 대표적 안전 자산인 달러가 힘을 받기 시작했다. 모든 게 ‘강달러’의 재료가 됐다. 특히 북한의 가세는 원화 가치에 치명적인 리스크였다. ‘GPD 쇼크’ 환율 좌우하는 경제 체급“지난번(10월 금융통화위원회)에는 고려 요인이 아니었던 환율도 다시 고려 요인으로 들어왔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환율 리스크를 꺼내 들었다. 이 총재는 10월 25일(현지 시간)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와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그룹(WBG) 연차 총회 참석차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한 자리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달러 환율이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는 굉장히 높게 올라 있고 상승 속도도 크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미국이 ‘피벗’(통화정책 전환)을 하면 환율이 안정적인 방향으로 가겠구나 했는데 지난 통화정책 방향 회의 이후 2주간 달러가 강해졌다”고 덧붙였다.

9월 18일 Fed의 빅컷(0.5%p 인하) 이후 시장에서는 환율의 안정을 기대했다. 당시 원·달러 환율도 1312원까지 하락했다. 한은 역시 지난 10월 금통위에서 0.25%포인트 금리인하를 단행하며 환율은 주요 변수로 삼지 않았다. 제19차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에 따르면 ‘금융시장 여건은 대체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가운데 점진적 하향 흐름을 보이고 있는 원·달러 환율은 당분간 현 수준에서 균형점을 찾으면서 등락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일부 위원이 지정학적 요인이나 견조한 미국 경기 흐름 등으로 환율의 변동성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안정 요인이 더 컸다. 한은 측은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 무역수지 호조, 양호한 대외건전성 등이 원화 강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고 미국이 추세적인 금리인하 사이클에 진입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시에도 원·달러 환율은 안정적인 흐름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환율의 방향은 불과 2주 만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10월 11일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 당시 1340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10월 25일엔 1390.50원까지 올랐다. ‘심리적 마지노선’ 1400원이 목전이었다. 원화 가치가 이렇게 급격하게 낮은 수준을 나타낸 건 달러화 강세를 부추기는 대내외 변수 그리고 한국 경제의 약해진 체급에 문제가 있었다.

기준금리가 내리면 대체로 해당 통화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환율은 상승한다. 한은 측은 금리인하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의 체력이 원화 강세 요인으로 작용해 원·달러 환율의 안정을 뒷받침할 것으로 예측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기준금리 인하 이후 원·달러 환율은 2주 새 50원이 넘게 올랐다. 한국 경제 체력을 낙관한 탓이 컸다.

올해 3분기 한국 경제 성적표는 ‘쇼크’ 수준이었다. 한은이 집계한 ‘3분기 국내총생산(GDP) 속보치’에 따르면 전분기보다 0.1% 성장에 그쳤다. 2분기에 마이너스 0.2% 역성장했던 것을 고려하면 사실상 ‘성장’이란 단어가 무색했다. 당초 한은이 전망했던 0.5% 성장에도 한참 미치지 못했다. 여기엔 6분기 연속 성장하던 수출이 마이너스 0.4%로 가라앉은 영향이 컸다. 한은은 “자동차와 화학제품 등 비IT 부문의 부진이 예상보다 컸다”고 설명했다. 무역수지 호조에 기대 환율의 안정성을 낙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이었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성장률이 부진한 것도 금리인하 기대 등으로 이어지면서 환율 상승에 분명한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기업의 경기 전망도 어둡다. 한국경제인협회의 11월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는 91.8로 비관적이었는데, 특히 전월 대비 4.4포인트 하락해 13개월 만에 가장 큰 낙폭을 보였다. 한경협은 “내수 의존도가 높은 서비스업 기업들 중 겨울 수요 증가가 예상되는 전기·가스를 제외하고 전 분야에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외국인의 국내 주식 순매도도 원화 가치를 끌어내린 요인 중 하나다. 코스피 성적은 최근 전쟁통인 러시아 지수보다 못하다. 이에 외국인이 국내 주식을 대규모로 매도하면서 원화 가치 하락을 주도했다(외국인 투자자들이 대규모로 자산을 현금화해 송금하면 외환시장에서는 달러 수요가 높아지고 이로 인해 원화는 약세를 보인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외국인은 10월에만 유가증권시장에서 약 3조2601억원을 순매도했다. 외환 당국 관계자는 “외국인 주식 순매도 등으로 원화가 다른 통화 대비 더 약세를 나타냈다”고 말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민간 회복이 어려운 상황에서 믿었던 대외건전성에도 발등이 찍혔다. 정부가 올해 30조원에 이르는 세수 결손을 메우기 위해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에서 4조~6조원 등 최대 16조원의 기금 여윳돈을 투입하기로 결정하면서 외환시장에서 외평기금의 역할에 대한 신뢰가 약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외평기금은 환율 안정을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할 때 활용되는 자금. 투자자 입장에서는 환율 방어의 수단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자본을 유출하거나 원화 가치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부의 재정 관리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고 대외건전성에 대한 부정적 신호를 줄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청산할 땐 언제고 다시 슈퍼엔저?옆나라 일본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엔저’ 탈출을 논하며 엔캐리트레이드(일본 엔화를 빌려 다른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전략) 청산으로 글로벌 시장에 큰 혼란을 일으켰던 일본 금융시장은 또다시 ‘슈퍼 엔저’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1400원’ 턱밑까지 오른 환율…“R의 공포 피했더니 환율이 또”
7월 초 달러당 162엔까지 치솟았던 엔화는 같은 달 31일 일본은행(BOJ)의 금리인상을 계기로 140엔대로 떨어졌다. 엔저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분석과 함께 미국과 일본 간 금리차가 축소될 것이란 시장의 기대가 높아지면서 엔화는 강세 전환됐다. 저금리 통화인 엔화를 차입해 미 달러화 등의 고금리 통화나 고수익 자산에 투자하는 엔캐리트레이드 자금의 청산 움직임도 큰 폭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엔캐리 자금의 규모를 정확히 추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시장에서는 전체 엔캐리 자금의 잔액을 506.6조 엔(3.4조 달러) 수준으로 파악하고 이 중 32.7조 엔(전체 엔캐리 자금의 6.5%)의 청산 가능성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나 일본 엔화 가치는 최근 약 3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10월 28일엔 엔·달러 환율이 153.88엔까지 상승해 엔화 가치가 7월 31일(153.89엔) 이후 약 3개월 만에 가장 약세를 보였다. 달러 가치를 끌어올린 대외적 변수 외에도 일본 내부에서 문제가 터진 게 컸다. ‘이시바 쇼크’, 정치적 급변이었다.

엔저가 꿈틀거리기 시작한 건 10월 1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취임 이후다. 취임 전까지 통화정책 정상화에 긍정적이었던 이시바 총리는 돌연 금리인상에 신중한 발언을 내놨다. 그는 10월 2일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와 취임 후 처음 만난 뒤 “개인적으로 추가로 금리를 올릴 환경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우에다 총재에게 (금융) 완화 기조를 유지하면서 경제가 발전하기를 기대한다는 의견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이시바 총리의 비둘기파(통화완화 선호) 발언에 시장은 당황했다. 8월 로이터와의 인터뷰 당시 “서서히 금리가 있는 세계를 실현하는 것이 물가상승을 억제하면서 구조개혁에도 도움이 된다”고 언급했던 그다. 결선 투표에서 그가 역전승했을 땐 146엔대에서 움직이던 엔화 가치가 달러당 143엔대까지 급격히 떨어지면서 엔고로 바뀔 정도였다.

이시바 총리가 돌연 ‘금융 완화’ 유지로 돌아서면서 엔화 가치는 다시 큰 폭으로 떨어졌다. 그의 발언 다음 날 엔·달러 환율은 하루 만에 3엔가량 상승(엔화 가치 하락)하며 달러당 146엔대에서 움직였다. 이시바 쇼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0월 27일엔 이시바 총리가 이끄는 집권 자민당이 2009년 이후 처음으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면서 엔화 약세를 부추겼다. 취임 한 달 만에 이시바 총리의 입지가 흔들리면서 투자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정책의 안정성은 흔들릴 가능성이 높아졌고 추가 금리인상에 대한 불확실성은 더 커졌다.

투자자들도 ‘엔저’에 강하게 베팅하고 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데이터에 따르면 10월 22일 기준 레버리지 펀드의 엔화 포지션 중 약 82.3%가 순매도이다. 이는 엔화 약세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크며 일본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 변화가 캐리트레이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은행은 10월 31일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진행해 기준금리를 결정한다. 안팎에선 여당의 중의원 선거 참패와 미국 대선에 따른 불확실성 고조 등을 이유로 현상 유지(동결)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엔화 약세 흐름도 거세질 수밖에 없다. ING 애널리스트인 프란체스코 페솔레는 “당국이 개입하기 전에 달러에 대한 엔화 약세가 얼마나 용인될지에 이제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일본은행 회의와 미국 선거를 앞두고 엔화가 더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일본 경제 상황이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면 엔화 가치가 오를 가능성도 남아 있다. 일본의 고용 시장은 여전히 안정적이고 실업률은 2.4%에 머물고 있다. 물가도 오르고 있어 중앙은행이 조금씩 금리를 올릴 여지는 충분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앞으로 몇 주 동안 미국과 일본의 정치적 바람이 시장 심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구름이 걷히면 일본의 경제 상황이 여전히 엔화 강세를 뒷받침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달러당 1400원은 뉴노멀? 이제 남은 건 미국에서 곧 열릴 선거다. 한국과 일본은 물론 전 세계 통화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변수다. 시장에서는 트럼프의 당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트럼프는 달러가 약해지기를 원한다고 말했지만 그가 추진하고 있는 세금 감면과 관세 인상 같은 정책들은 오히려 달러 가치를 높이고 인플레이션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경우 Fed도 금리인하를 늦출 가능성이 커진다. 트럼프 대 해리스. 당선자가 누구냐에 따라 연말 환율 차이는 50원 이상일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남아 있지만 궁극적으로 외환 전문가들은 당분간 환율 상승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주원 대신증권 애널리스트는 “환율의 상승 추세가 지나치게 빠르다”며 “지난 전고점(1400원)을 넘을 공산이 크다”고 했다. 진옥희 하나은행 하나금융연구소 연구원은 “트럼프 후보 당선 시 환율이 최대 1450원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은과 정부는 현재 환율이 위기로 여겨질 수준은 아니라며 특정 목표치보다는 변동성에 중점을 두고 보겠다는 입장이다.

대신 환율이 주요 변수로 떠오르면서 한은이 올해 추가로 금리를 인하하긴 쉽지 않아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창용 총재는 “미 대선 결과에 따라서 대외 여건이 굉장히 많이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 대선 이후에 달러의 강세가 어떻게 될 건지 봐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