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약 대신 '러닝' 처방
혼자 뛸 때보다 같이 뛸 때 효과 극대화
동기부여·사회적 연결성 강화
'러닝 크루 민폐' 시선에 자정 노력도

[커버스토리 : 러닝의 경제학]
클투를 통해 하와이 호놀룰루 마라톤에 참가한 러너들./클투
클투를 통해 하와이 호놀룰루 마라톤에 참가한 러너들./클투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 러닝화 기업 온홀딩(온러닝)의 주가는 지난 1년간 74% 뛰었다. 러닝화 브랜드 호카를 보유한 데커스 아웃도어 역시 70.3% 상승했다.

빅테크 대장주인 마이크로소프트(22.5%)와 애플(30.2%)의 상승률을 훌쩍 뛰어넘는 성적이다. 주가 상승세만큼 러닝에 대한 관심도 전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국내에서도 골프 열풍이 지고 러닝 열풍이 불었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골프 카테고리 매출은 2022년 대비 감소했지만 러닝 카테고리는 35% 성장했다. 업계는 국내 러닝 인구를 10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들은 왜 달릴까. 1. 건강 : 우울증 약 대신 ‘러닝’ 처방
600명의 러너가 속한 트래블러닝크루(TRC)./TRC
600명의 러너가 속한 트래블러닝크루(TRC)./TRC
“사연 없는 러너가 없다.”
서울에서 600명이 속한 트래블 러닝크루(TRC)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러너가 모여 있다. 이들 중 대다수가 30대 초반 직장인이다.

문현우 TRC 크루장은 “병원에서 우울증 약 대신 ‘러닝’을 처방받고 크루에 가입한 이들도 있다”며 “번아웃이나 우울증으로 괴로워했던 직장인이나 이별을 겪고 힘들어 하는 이들이 러닝을 통해 아픔을 극복한다”고 말했다.

달리기가 항우울제보다 우울장애와 불안장애에 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암스테르담 대학병원 연구진에 따르면 우울장애와 불안장애를 겪는 환자 141명에게 16주 동안 달리기 요법과 항우울제를 처방한 결과 달리기를 처방받은 그룹에서 개선 효과가 더 컸다.

달리기를 처방받은 환자군이 주 2~3회, 매회 총 45분 동안 운동을 시행한 결과 정신건강 지표와 신체건강 지표가 모두 상승했다. 반면 항우울제를 복용한 환자군의 정신건강 개선 지표는 달리기 처방군과 비슷했지만 신체건강 지표는 이전보다 더 악화했다.

전문가들은 달리기를 통한 ‘몰입’이 집중력을 향상시키고 우울증을 극복하는 힘이 된다고 말한다.

홍덕기 경상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러닝을 할 때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가 활성화되면서 새로운 신경세포가 생성되고 학습 능력과 인지 능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달리기에만 집중하는 ‘몰입’을 통해 뇌가 처리할 일이 늘어나면 뇌에 비필수적인 전전두엽 기능이 서서히 약화되고 현재의 순간에 완전히 빠져들며 시간 개념이 왜곡되는 쾌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달리기가 과도한 걱정을 덜고 우울증과 스트레스를 연소하는 과정인 것이다.

러닝 열풍은 건강과 직결돼 있다. 전 세계적으로 러닝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것은 건강과 사회적 연결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다. 스포츠 회사 런리피트(RunRepeat)의 러닝 관련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0%가 코로나19 기간 중 러닝을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프랑스에서는 코로나19 팬데믹 직후 ①병원에 가거나 ②장을 보거나 ③혼자 조깅하거나 ④강아지 산책 외에는 모든 사회적 활동이 금지됐다.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가 달리기였던 것이다.

문 대표는 “유럽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이야기를 들어보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달리는 것 말고는 허용되는 야외활동이 없어 유럽 내에서 러닝에 대한 관심이 급격하게 증가했다고 말한다”며 “러닝으로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느낀 이들이 많아지면서 코로나19가 종결된 후에도 러닝 열풍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2. 사회적 연결 : 러닝크루 열풍
600명의 러너가 속한 트래블러닝크루(TRC)./이도권 작가
600명의 러너가 속한 트래블러닝크루(TRC)./이도권 작가
국내에서는 아마추어 러너가 참여하기 좋은 러닝크루를 기반으로 시장이 커지며 러닝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10월31일 기준 #런린이 해시태그는 68만 건(3월 대비 20% 상승), #러닝크루 해시태그는 61만 건(3월 대비 13% 상승) 등 러닝 관련 콘텐츠가 꾸준히 생산되고 있다.

러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소셜미디어에서는 부정적인 인식도 확산하고 있다. 특히 일부 러닝크루의 일탈이 크게 조명받으면서 ‘민폐족’이라는 비난의 시선이 따라붙거나 '달리기는 수단일 뿐 이성을 만나는 게 목적'이라는 오해도 번져 있다.

달리기에 진심이었던 기존 러너들은 부정적인 면만 부각되는 것이 아쉽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러닝크루는 소음과 질서에 대한 에티켓이 있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같은 러너들 사이에서도 욕을 먹기 때문이다. 소음이나 민폐와 관련한 문제는 대부분 일회성이나 단발성 모임으로 끝나는 러닝크루에서 주로 나타난다는 분석이다.

또 반포종합운동장 등 주요 코스에서 러닝크루 ‘진입 금지’ 등 관련 규제가 생겨나면서 러닝 문화 정착을 위해 자정 노력을 기울이는 크루도 많아졌다.

“혼자 뛰면 되지 왜 굳이 같이 뛰냐”는 아니꼬운 시선에도 할 말이 있다. 같이 뜀으로써 얻는 이점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홍 교수는 “혼자 뛸 때보다 러닝크루 안에서 유대감을 확인하고 목표한 거리와 속도를 함께 달성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 동기 유발 효과가 더 크다”며 “이는 특히 혼자 뛸 의지가 생기지 않는 한여름이나 한겨울 ‘런태기(러닝 권태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뇌과학자 장동선 교수 역시 자신의 유튜브를 통해 남과 함께 뛰면 정신적 행복 중 하나인 ‘연결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장 교수는 “누군가와 같이 뛰면 서로 호흡과 맥박이 같은 박자로 동기화 되고 뇌파의 파장까지 동기화된다는 논문 결과가 있다”며 “사람들 사이의 공감과 신뢰, 친밀감이 증가하는 효과가 있는 만큼 외로움을 느낄 때 나가서 누군가와 함께 뛰면 정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도 러닝크루를 통해 사랑과 우정을 찾는 젊은 세대가 많아졌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점점 더 온라인화되는 세상에서 젊은 세대가 그 어 느때보다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며 “데이트앱에 대한 신뢰를 잃고 실제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러닝크루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현실에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보도했다. 외로움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정보 공유의 목적도 있다. 러닝크루에 속하면 마라톤 대회 일정이나 러닝화 등 쇼핑 정보를 얻기가 더 쉽다. 3. 성취 : 남이 아닌 나와 경쟁한다
러닝크루 TRC 소속 러너들이 뛰기 전 몸을 풀고 있다./최승민 작가
러닝크루 TRC 소속 러너들이 뛰기 전 몸을 풀고 있다./최승민 작가
러닝은 자신과의 승패를 가리는 운동이다. 남의 기록이 아닌 내 기록에 도전하고, 뛰기 싫은 게으름을 극복해야 한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한 골프나 테니스, 수영과 달리 성취를 빨리 얻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특별한 장비 없이 편한 운동화 하나만 있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어 진입 장벽도 낮다.

스마트워치와 러닝 앱의 발달로 개인 맞춤형 훈련도 가능해졌다. 달린 거리, 시간, 속도 등 자신의 운동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분석해주는 앱을 활용하는 이들도 많다. 오늘 달리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성취감을 느끼며 활력을 얻는 것이 핵심이다.

홍 교수 “달리기를 꾸준히 하는 사람은 목표를 세우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고 어떤 일에 몰입하는 경향이 강하며 자기 자신과 인생에 더 큰 만족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