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기업엔 왜 이렇게 회장이 많을까[안재광의 대기만성's]
정유경 (주)신세계 총괄사장이 회장이 됐습니다. 2024년 신세계그룹 정기 임원인사에서 회장 승진을 했죠. 그래서 신세계는 회장이 총 세 분이 됐습니다. 정유경 회장의 어머니 이명희 총괄회장, 오빠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그리고 정유경 (주)신세계 회장입니다.

신세계만 회장님이 많은 건 아니죠. 현대백화점 그룹도 이번 정기 임원인사에서 정지선 회장의 동생인 정교선 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정지선 회장이 그룹 회장이고, 정교선 회장은 현대홈쇼핑 회장입니다. 어쨌든 현대백화점도 회장님이 두 분 됐습니다.

원래 회장이 ‘회사의 장’이란 의미인데 여러 명인 것은 좀 이례적인 겁니다. 해외에선 잘 보기 힘든 일이고요. 한국에서도 그동안에는 여간해선 잘 없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의 대기업에 회장님이 많아진 이유가 뭘까요.
◆LS·GS·두산 등 형제경영에 다수의 회장 배출
한국 대기업 가운데 회장님이 가장 많은 곳부터 볼까요. 바로 LS그룹입니다. 무려 여섯 분이나 됩니다. 구자은 LS그룹 회장을 비롯해 구자엽 LS전선 회장, 구자철 예스코홀딩스 회장, 구자열 LS 이사회 의장, 구자용 E1 회장,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입니다. 선대 회장 때부터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회장을 하고 있어서 그렇고요. 그 후손들, 사촌이 되겠죠. 사촌 형제끼리 돌아가며 지금도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LG에서 떨어져 나온 또 다른 그룹인 GS도 그렇습니다. 초대 회장이었던 허창수 회장과 그 뒤를 이어 총수가 된 허태수 회장뿐만 아니라 허정수 GS네오텍 회장, 허진수 GS칼텍스 회장도 있습니다. 이분들은 다 형제죠. 이들의 사촌인 허동수 GS칼텍스 명예회장도 그룹 회장 직함이 있습니다.

두산그룹도 비슷한데요. 박정원 회장이 그룹 회장 직함을 갖고 있지만 그 동생인 박지원 두산에너빌리티 회장도 회장이죠. 형은 그룹 회장, 동생은 주력 계열사 회장입니다.

이런 그룹사들의 특징은 계열분리 없이 ‘형제경영’을 이어간다는 것입니다. 두산의 경우 4대에 걸쳐 형제경영을 하고 있고 LS와 GS는 3대까지 회장을 지냈죠.

이런 형제경영이 일반적인 것은 전혀 아닙니다. 보통은 계열분리를 하죠. 삼성이 한솔, CJ, 신세계로 계열분리 된 것처럼요. 계열분리 없이 함께 있을 땐 형제간 분쟁이 많이 생겼습니다. 현대의 그 유명한 ‘왕자의 난’이 그랬고 롯데그룹의 ‘형제의 난’, 효성그룹의 ‘형제의 난’이 다 형제간 다툼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제경영을 어쩔수 없이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대백화점이 그런 사례인데요. 현대백화점은 애초에 형 정지선 회장이 주력인 백화점 같은 유통업을 맡고 동생 정교선 회장은 현대그린푸드, 현대리바트, 현대에버다임 같은 비유통 부문을 떼어서 나가려고 했어요. 계열분리를 실제 시도했습니다. 2022년에 현대백화점과 현대그린푸드를 각각 인적분할한 뒤에 두 개의 지주사를 세우는 안을 발표했어요. 하지만 계열분리는 끝내 실패합니다. 백화점 인적분할에 주주들이 반대했거든요. 결국 지주사는 정교선 회장의 현대그린푸드만 생겼고요. 그게 지금의 현대지에프홀딩스죠. 이 지주사로 정지선, 정교선 형제 회장가 지분을 몰아서 1, 2대 주주에 오릅니다. 그러면서 동생 정교선 회장을 현대백화점 대표 겸 회장으로 세웠어요. 만약 계열분리를 했으면 총수에 오를 수 있었는데 총수는 못 했으니 회장 직함을 달아준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승계 시점 늦춰지고 사업기회 감소
평균 수명이 길어진 것도 회장 수 증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회사 승계가 이뤄지는 시점이 과거엔 굉장히 빨랐습니다. 한화그룹이 대표적이었죠.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이 1981년에 유언도 없이 갑자기 사망했는데요. 당시 29살이었던 아들 김승연 회장이 곧바로 회장에 오르게 됩니다. 최태원 회장도 30대 후반에 총수가 됐고요. 이때도 부친 최종현 회장이 지병으로 사망한 뒤였습니다.

요즘은 이런 일이 잘 없죠. 50대 이전에 대기업 회장에 취임하는 사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경우 56살이었던 2011년에 회장이 됐습니다. 원래 부친이 경영활동을 하거나 생존해 있으면 그 자녀가 회장 타이틀을 달지 않는다는 게 재계의 ‘불문율’ 같은 것이었는데요. 당시 창업주인 신격호 회장이 생존해 있었고 심지어 경영활동까지 하는데도 이례적으로 아들 신동빈 회장이 회장 취임을 합니다. 신동빈 회장 나이가 60을 바라보는데, 부회장으로 남아 있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거든요.
공교롭게 유통 라이벌인 신세계도 비슷했습니다. 이명희 회장이 그룹 경영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정용진 부회장이 50대 중반까지 부회장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올 3월에서야 비로소 회장이 됐습니다. 정용진 회장과 사촌이자 1968년생 동갑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도 2022년에 회장이 됐죠. 정용진 회장이 언제까지 부회장에 머물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또 동생 정유경 총괄사장을 회장으로 올리면서 곧바로 계열분리까지 공식화했죠.

수많은 회장님들은 저성장 시대의 단면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엔 계열분리를 해도 이후에 빠르게 성장하는 사례가 많았어요. 현대가 쪼개져서 현대자동차, HD현대, 현대백화점 같은 그룹이 됐죠. 한국 재계 순위로 현대자동차가 3위, HD현대가 8위, 현대백화점이 24위입니다. 2000년대 이전까진 경제성장률이 높아서 계열분리를 해도 성장기회를 잘 찾았던 것 같아요. 비슷하게 삼성에서 떨어져 나온 CJ, 신세계, 한솔도 대기업으로 잘 성장했고요. LG에서 떨어져 나온 LS, LX 같은 회사들도 대기업이 됐습니다. 이렇게 계열분리를 하면 회장님이 한 회사에 여러 명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회사를 쪼개서 사업을 확 키우는 게 과거에 비해 훨씬 어렵습니다. 경제성장률 10% 안팎 하던 시기와 2~3%인 시기는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과거처럼 역동성 있게 사업을 키우는 게 어렵습니다. 오히려 계열분리 하지 않고 덩치가 큰 상태에서 함께 사업을 벌이는 게 더 유리할 수 있어요. 실제로 그런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예컨대 롯데에서 떨어져 나온 농심은 창업주인 신춘호 회장이 2021년 세상을 떠난 뒤에도 형제경영을 택했습니다. 신춘호 회장의 장남인 신동원 회장이 그룹 회장을 맡았고요. 동생인 신동윤 부회장은 그룹에선 부회장이지만 자회사 율촌화학에서 회장을 하고 있어요. 삼남 신동익 부회장은 메가마트의 최대주주인데요. 여기도 아직 계열분리는 안 하고 있습니다.

한화도 비슷한데요. 이미 계열분리 작업은 상당 부분 해놨어요. 승계할 사업을 대략 정해 놓았거든요.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부회장이 주력사업인 우주항공, 방위산업, 석유화학, 신재생 에너지 사업을 맡고요. 차남 김동원 부사장이 한화생명을 비롯한 금융 계열사를 경영하고 있어요. 또 삼남 김동선 부사장은 한화호텔, 한화갤러리아 같은 유통과 호텔, 식품 등의 사업을 맡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화는 계열분리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아요. 부친 김승연 회장이 그룹 경영에 여전히 많은 부분 관여를 하고 있는데요. 김승연 회장은 계열분리를 한다 해도 회사를 최대한 더 성장시킨 뒤에 하겠다는 의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동관 부회장도 이미 40을 넘겨서 마냥 젊진 않거든요. 계열분리 이전에 회장으로 올라설 수도 있죠. 조만간 한화그룹에 회장님이 추가로 더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대기업에 회장님이 많아진 건 결국 경영승계에서 나타나는 한 단면인 듯 하네요. 그것이 계열분리든 형제경영이든요. 한국의 많은 대기업이 지금도 승계 절차를 밟고 있는데요. 경영승계가 도약의 모멘텀이 되고 한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된다면 승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자연히 작아질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안재광 한국경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