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시민이라면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말이다. 대전 중구 중심가에서 1996년 문을 연 계룡문고가 29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지난 9월 영업을 종료했다. 지역 문화를 대표하던 곳이자 지역 주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어온 이 서점은 2007년 선화동 대전테크노파크 건물 지하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러나 대형 온라인서점과 전자책 시장의 확장으로 계룡문고는 경영난에 빠졌다. 다른 지역 향토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상황에서도 계룡문고는 시민주 모집 등 다양한 방법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했지만 끝내 임대료 문제와 법적 갈등을 넘어서지 못했다. 서점주인 이동선 대표는 지난 9월 27일 폐업을 알리며 “끝내 지키지 못해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계룡문고에서 책과 함께한 경험이 여러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길 바란다”고 말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대전 시내 유성호텔도 올해 초 문을 닫았다. 1915년 문을 열어 109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유성호텔은 한때 한 해 방문객 1000만 명을 기록할 정도로 유성온천의 랜드마크로 활약했지만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지난 3월 폐업했다.
내 고향의 만남의 장소, 랜드마크가 속속 사라지고 있다. 부산에서는 취업준비생과 직장인들로 문턱이 닳았던 남포동의 YBM어학원 부산광복센터가 지난 10월 31일 영업을 종료했다. 제주에선 지난 30년간 한림읍 학생들의 방앗간이었던 문구점 프리박스가 문을 닫았다. 한때 강북 최고의 상권이었던 신촌에선 크리스피크림 도넛, 맥도날드, 투썸플레이스에 이어 롯데리아 신촌로터리점마저 개점 18년 만인 지난 1월 23일 영업을 종료했다.
서울·경기권의 소개팅 필수코스이자 복잡한 강남역의 만남의 장소로 통했던 메가박스 강남대로점마저 지난 4월 문을 닫았으며, 신도림역의 상징이었던 현대백화점 디큐브시티의 내년 폐점 소식은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내가 살던 곳의 만남의 장소였던 ‘랜드마크’는 지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폐업률 역대 최대 자영업의 위기를 보여주는 바로미터는 아슬아슬하다. 지난해 폐업 신고를 한 자영업자의 숫자는 98만6487명으로 2006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역대 최대 규모다. 폐업률만 10%에 달한다.
공식적인 통계는 지난해에서 멈췄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올해의 폐업 현황은 싸늘하다. 국내 최대 규모의 자영업자 커뮤니티인 ‘아프니까 사장이다’에서는 폐업·정리를 알리는 글이 하루에도 수시로 올라온다. 일산에서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는 A 씨는 “이 정도로 안 팔린 적은 올해가 처음이다”며 “10월 말부터는 주문이 일주일에 1~2건, 지난주부터는 아예 0에 그친다”고 토로했다.
위기는 더욱 가시화될 전망이다. 선행지표로 통하는 구글트렌드에서 ‘폐업’의 검색량은 5년래 올해가 역대 최대다. ‘5인 이상 집합금지’로 자영업자의 위기가 가시화된 코로나 때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 값이 100이면 해당 용어가 가장 많이 검색된 상태를 의미하는데 지난 5월 100을 기록했다. 2022년 가장 높은 값이 83으로 “코로나19 때보다 심각하다”는 자영업자의 말을 반영한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물가가 안정세에 있고 금리도 내려갈 수 있는 만큼 내수 회복 가능성은 있다”면서도 “자영업자·소상공인들의 부채 부담을 해소할 만큼의 충분한 매출 회복은 당장 어려울 것으로 보여 폐업은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국책연구원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7월 경제 동향에서 경기 판단을 ‘다소 개선’에서 ‘개선세 다소 미약’으로 부정적으로 조정했다. 주된 요인은 ‘회복되지 못하는 내수’였다.
지난 3분기까지 10개 분기 연속 감소한 소매판매액 지수는 내수 부진의 깊이를 여실히 드러낸다. 소비의 또 다른 축인 서비스업 생산 역시 3년 반 만에 가장 낮은 증가율을 기록하며 내수 회복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통계청 산업활동동향에 따르면 올해 3분기 소매판매액지수는 100.7(불변·2020년=100)로 작년 같은 분기보다 1.9% 감소했다. 소매판매는 2022년 2분기(-0.2%) 꺾이기 시작한 이후 10개 분기째 감소하고 있다. 이는 1995년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 가장 긴 기간의 감소 흐름이다. 1990년대말 ‘IMF 외환위기’ 때에도 보지 못한 불황이다.
‘위기의 자영업’, ‘자영업의 추락’과 같은 표현들은 업계를 묘사해 온 단골 소재였다. 그만큼 자영업자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KDI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와 2003년 신용카드 대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굵직한 거시경제 충격과 소비 침체가 닥칠 때마다 자영업은 큰 폭으로 출렁였다. 이진국 KDI 연구위원은 “국내 자영업의 위기는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현재까지 지속되는 추세적 현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오늘의 위기는 어제보다 더 깊어지고 있다. 인플레이션의 고착화와 과당 경쟁, 너무 빠르게 변하는 산업 트렌드가 한국 자영업 문제의 상수라면 코로나19 이후 ‘괴물’이 된 배달앱과 소비 양극화를 가속화하는 고급화 트렌드는 ‘변수’가 되어 시장의 판도를 180도 바꿨다. “취소하고 다시”…괴물 된 배달앱?“주문건은 제가 취소할게요. 가게 주문이 1000원이나 더 싸요.” 경기도 화성시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B 씨는 배달앱으로 주문이 올 때마다 번번이 전화를 걸어 주문을 취소하고 다시 주문을 받는다. 배달앱을 통하지 않자니 주문율이 낮아지고 배달앱을 통하자니 수수료로 내는 비용이 더 커 이런 편법을 쓰게 됐다고 했다.
B 씨가 처음부터 이런 편법을 쓴 건 아니다. 그가 신도시에서 첫 가게를 냈을 땐 저렴한 이용료를 바탕으로 홍보도 배달도 도와주는 든든한 조력자가 배달앱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비대면으로 배달이 폭증하면서 배달앱의 이용자 수가 급증했고 배달앱은 자영업 생태계를 집어삼켰다. 그는 매출이 100만원이면 재료비 40%인 40만원을 제하고, 배달앱에 약 30만원의 수수료를 주고 나면 손에 쥐는 건 대략 30만원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실제 정산내역을 보니 2만5000원짜리 세트를 시키면 배달앱 자체 배달료로 2900원, 서비스 중개수수료(9.8%)로 2450원, 결제 수수료(3%) 750원, 부가가치세(10%) 610원으로 배달앱 수수료만 6710원, 약 26.84%에 달했다. 사업 초기 건당 1000원이던 배달 중개수수료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매출액의 9.8%까지 올랐다. 프랜차이즈 업계의 한 관계자는 “코로나19 때보다 정확히 수수료가 3배는 늘었다”고 말했다.
부천에서 요식업을 운영하는 C 씨도 최근 수수료가 아까워 직접 배달로 전환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수수료는 0원이다. 그는 “점점 플랫폼의 노예가 되는 것 같았다”며 “몸은 고되지만 원래 이게 정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C 씨처럼 배달앱을 안 쓰고 독자 생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C 씨 역시 폐업 전 막다른 길에서 하는 모험이라고 덧붙였다. “수수료가 비싸면 배달앱을 안 쓰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은 자영업 현실을 모르는 주장이다. 코로나19 이후 배달앱은 소비자에게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고 배달앱을 쓰지 않는 자영업자는 선택지에서 제외된다. 자체 배달 시스템은 인건비와 관리 부담이 커 대안이 되기 어렵고 또 다른 대안으로 등장한 공공 배달앱은 아직까지 소비자 접근성이 떨어져 경쟁에서 밀린다. 결국 자영업자들은 높은 수수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시장에서 도태될 위험에 ‘양날의 검’을 감당하며 버티고 있다. B 씨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가져가는 게 요즘 배달 플랫폼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개탄했다.
그나마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통용되는 듯했던 자영업에서도 이젠 플랫폼과 자본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하기조차 어려운 현실이 됐다. 최근 넷플릭스 요리 경연 프로그램 ‘흑백 요리사’에 등장한 요리사의 식당 예약 증가율이 약 148%로 돈방석에 앉았다는 소식은 대다수 자영업자에겐 현실성이 없다. 유명 인플루언서나 미디어에 한 번 노출되면 매출이 급상승하며 자영업 성공의 아이콘으로 떠오르지만 이는 소수에게만 주어진 기회일 뿐이다.
유명 프로그램이나 유명 인플루언서에 의해 주목받는 자영업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며 대다수는 플랫폼의 높은 수수료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그나마 자본력이 있는 자영업자는 초대형 매장과 고급화 전략으로 최근의 트렌드인 ‘가심비 소비’, ‘하이엔드 소비’에 맞춰 나가며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고 있지만 소규모 자영업자는 이러한 흐름에 적응하기 어렵다. 고급화된 상권과 소비 트렌드에 부응할 여력이 없는 이들은 대중적인 소비자층을 대상으로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이며 ‘치킨게임’에 나서고 있다. 자영업 시장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가속화되는 셈이다. 살생협의안 된 상생협의안?
문제가 들끓자 지난 7월엔 정부 주도하에 배달플랫폼과 입점업체 간 수수료 등 상생 방안을 모색하는 상생협의체가 발족, 130여 일 만에 상생안이 도출됐다. 11월 14일 이들이 낸 상생안에 따르면, 배달의민족과 쿠팡이츠의 중개수수료를 현행 9.8%에서 거래액 기준으로 2.0∼7.8%로 낮추는 차등 수수료 방식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적용 기간은 내년 초부터 향후 3년이다.
배민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은 입점 업체의 중개이용료율을 낮추고 영세 자영업자의 부담을 고려해 거래액 규모에 따른 중개이용료율을 차등 적용한 파격적인 안이란 입장이다.
반면 자영업자 사이에선 ‘살생협의체’, ‘살생협의안’이라는 조롱까지 나올 정도로 양측의 입장이 엇갈린다. 1000여 개 회원사와 12만여 개 소속 가맹점사업자를 둔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는 “외식 자영업자 두 번 울리는 졸속 합의”라며 “전체의 80%는 인상 이전과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더욱 악화된 것으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협회에 따르면 이번 개정안으로 외식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이 대부분인 상위 35%의 업주들은 인상 이전 수준인 6.8%보다 이용요율이 1%포인트 오르고 고정액인 배달비는 500원이 오른다. 애초에 배달 매출이 극히 적은 하위 20%에만 요율을 낮춰줄 뿐이란 지적이다. 협회 측은 “독과점 업체들이 좌지우지하는 배달앱 수수료는 이제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며 “이제는 국회와 정부가 수수료 상한제와 같은 입법 규제를 고민해야 할 때”라고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자영업의 성공이 이제 단순한 노력만으로 이룰 수 없는 구조로 변했다고 지적한다. 미디어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대다수는 소비자와의 접점을 확보하기 위해 배달앱과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마저도 수익을 갉아먹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러한 양극화는 자영업을 ‘기회의 장’이 아닌 ‘생존의 전쟁터’로 바꿔놓고 있다. 이에 자영업자의 생존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의 부재는 랜드마크 상실과 같은 ‘지역 경제 쇠퇴’ 현상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실효성 있는 대책을 통해 자영업자의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플랫폼의 독점화로 이제는 참여자 모두가 플랫폼의 노예가 되어 플랫폼이 원하는 걸 따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 됐다”며 “배달앱의 규모가 너무 커진 나머지 또 다른 사업자의 경쟁을 촉진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구조를 건드리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공정거래위원회가 플랫폼 사업자의 문제 행위를 공정하게 제지해 바로잡거나 더 나아가서는 플랫폼의 독점화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현명한 소비자들의 불매 운동도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플랫폼이 상생의 태도를 보여줄 때까지 소비자 운동에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는 “자영업자의 고혈을 빠는 구조로 플랫폼 사업자의 독점화가 진행 중”이라며 “소비자 또한 비용 인상 부담의 폐해를 안는 등 모두가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서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이제는 윤리적 고민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 매거진한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