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기 기업 대외채무액 260조
국제유가 하락해도 달러 상승으로 에너지 비용 증가
중국은 값싼 러시아산 석유 수입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한국의 비금융기업(기업) 대외채무액은 역대 최대인 1761억5060만 달러(약 260조원)에 달했다. 환율이 100원씩 오를 때마다 대외 채무액은 약 17조6000억원씩 증가한다. 기업 달러빚, 환율 100원 오르면 17조 증가공급망 체계가 복잡해지면서 ‘강달러=수출호재’ 공식도 깨졌다. 그동안 달러 가치가 오르면 수출 기업은 웃었다. 똑같이 10억 달러를 벌더라도 환율이 1200원일 때 이익은 1조2000억원, 1500원일 때 이익은 1조5000억원으로 3000억원 차이가 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국내 기업들의 이익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배경이다.
강한 달러로 벌어들인 돈을 원화로 환산하면 기업 매출과 영업이익률은 올랐고 무역흑자는 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우리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생산기지 구축에 나서면서 기업들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일본은 이 문제를 우리보다 먼저 겪었다. 2024년 3월 일본은 17년 만에 마이너스 금리 시대를 끝냈다.
금리를 올렸으면 엔화 가치가 올라야 하는데 엔·달러 환율은 3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 내에서는 기업들이 해외에서 달러로 벌어들인 수익을 자국으로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을 원인으로 꼽았다.
엔화 가치가 떨어지자 일본 기업이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돈을 송금하는 대신 현지에 유보금으로 쌓아뒀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해외 자금을 일본으로 가져오면 일시적으로 세금을 낮춰주는 ‘자금 송환 감세’까지 검토했다.
과거 일본은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엔화 가치를 낮다. 1985년 미국 레이건 행정부가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화 대비 엔화 가치를 대폭 절상한 것도 엔저를 등에 업은 일본 기업의 과도한 무역흑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기업, 해외에서 번 달러 송금 안 한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일본 기업은 각종 무역규제와 환율 변수를 피하기 위해 1990년대부터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했다.
현지 생산을 하면 해당국 정부로부터 각종 세제 혜택이나 보조금 혜택을 얻을 수 있고 환율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엔저 덕에 얻던 수출 경쟁력 상승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특히 해외에서 번 외화를 본국으로 송금하지 않고 현지에 묶어두면서 외환시장에 달러가 공급되지 않아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엔·달러 환율이 150엔을 찍었던 2023년 말 일본 기업 해외 법인의 내부유보금은 48조 엔(약 427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올해와 내년 본격적으로 해외 공장이 가동되면 한국 역시 일본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 2023년 미국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국가였다.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했던 IRA, 반도체법 기준을 맞추기 위해 반도체, 배터리 기업이 생산기지를 미국 내에 건설한 영향이었다.
변정규 미즈호은행 본부장은 “해외로 생산기지를 적극 이전한 기업들은 향후 벌어들인 달러를 현지에서 재투자하거나 외화 부채 부담을 덜기 위해 해외 법인에서 유보금으로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며 “기업이 벌어들이는 달러가 우리 외환시장이나 국내 투자에 공급되지 않으면 ‘강달러=수출호재’ 공식이 깨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원자재, 기름값 걱정에 제조업 울고
해외 매출 큰 게임은 웃는다원·달러 환율 급등으로 딜레마를 겪는 대표 업종이 반도체와 배터리다. 반도체, 전자업계는 단기적으로 제품을 더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어 이익이 늘어날 전망이다.
SK하이닉스는 2024년 3분기 기준으로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할 경우 5797억원의 세전이익이 늘어날 것으로 추산했다. 반도체는 국내 생산이 많고 해외에 수출할 때 달러화로 받으니 환율이 오르면 원화로 환산한 이익은 더 증가할 여지가 있다.
반도체 외에 스마트폰, TV 사업 등을 함께하는 삼성전자도 상황은 비슷하다. 가전이 주력인 LG전자는 환율 10% 상승 시 817억원의 세전이익이 추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강달러로 기름값이 올라 해상 운임이나 항공 운임비를 자극하면 기업의 물류비가 높아지면서 지출도 함께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해외 생산기지에 투입하는 비용도 증가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에 대규모 공장을 짓고 있는 만큼 강달러 추세가 장기화하면 시설 투자 및 장비·설비 반입 비용과 인건비가 뛴다.
해외 투자 규모가 큰 배터리업계는 외화부채 비중이 높아 환율상승 여파를 직격타로 맞고 있다. SK온은 2024년 3분기 실적 보고서 기준으로 환율이 5% 상승할 때 순손실이 176억원가량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됐다. LG에너지솔루션 역시 환율이 10% 오르면 세전이익이 2388억원 감소한다고 밝힌 바 있다.
예전에는 강달러를 반기던 자동차업계도 해외 생산 비중이 절반이 넘어서면서 환율 효과가 미미해졌다. 한국 기업의 수출전략이 가격경쟁보다 기술경쟁으로 변하면서 환율과 수출의 인과관계가 약해졌다는 분석도 있다.
김태훈 산업연구원 연구원은 2022년 보고서를 통해 “환율 10% 상승 시 대기업 영업이익률은 0.29% 하락한다”며 “이는 대기업의 수출전략이 점차 가격경쟁에서 기술경쟁으로 변화하면서 원화 가치가 하락했을 때 제품의 수출가격 하락을 통한 매출 증대 효과가 사라졌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산 석유 쓰며 공급 쏟아내는 중국한국 기업의 수출경쟁력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리는 요인도 있다. 석유다.
최근 3개월 동안 서부텍사스유(WTI)와 두바이유 등 국제 유가는 하락하거나 보합세였지만 결제 통화인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국내 기업들의 에너지 비용은 오히려 증가했다.
반면 중국과 인도는 값싼 러시아산 석유를 루블화로 결제하며 강달러 영향을 피해 수출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이 공급을 쏟아내면서 피해를 입은 철강, 화학업계도 고환율에 신음하고 있다.
포스코는 원·달러 환율이 10% 상승하면 당기순이익(법인세비용 차감 전)이 5835억원 줄어드는 것으로 추정(사업보고서 기준)된다. LG화학도 원·달러 환율 10% 상승 시 당기순이익이 3599억원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기업은 업황 부진에 고환율 충격까지 더해지면서 생존을 위한 비상경영에 나섰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자체적으로 통화스와프를 맺는 등 여러 가지 환헤지 장치를 마련해 뒀지만 중국발 공급과잉과 경기부진으로 업황이 악화된 상황에서 환율까지 예상치를 벗어날 정도로 치솟아 이익을 내기 힘든 구조다”라고 말했다.
항공업계는 외화부채 부담으로 날개가 무겁다. 항공사들은 항공기 리스 비용과 유류비를 달러로 결제하는 만큼 외화부채 규모가 크다. 2024년 3분기 말 기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외화부채는 각각 4조8470억원, 4조6092억원에 이른다. 대한항공은 환율이 10원 오르면 330억원의 외화평가손실이 발생한다고 추산했다.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산업도 있다. 설비 투자나 원자재 구입 없이 해외 매출을 얻는 게임업계다. 특히 국내 매출보다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게임사는 달러를 원화로 환산하는 과정에서 차익을 낼 수 있다. 크래프톤과 펄어비스가 대표적이다.
크래프톤의 2024년 3분기 누적 매출액 2조922억원의 약 93%가 해외에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 12월 공시한 분기보고서에 따르면 환율이 5% 상승하면 552억1867만원의 환차익을 얻을 수 있다. 해외 매출 비중이 80%인 펄어비스는 환율이 5% 오를 경우 118억6783만원의 환차익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이준호 하나증권 연구원은 “강달러로 인한 환차익 외에도 국내 게임사 중 달러 자산이 많은 기업의 영업 외 수익 인식으로 순이익 개선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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