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최고 수준
美 트럼프 취임이 증폭제 될 수도
“1500원이 뉴노멀 될 가능성도”
내수 부진, 환율 안정 사이 한국은행 딜레마
한번 천장을 높인 환율은 당국의 개입에도 위로 향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환율의 심리적 마지노선이었던 ‘1400원 선’이 2년 만에 깨졌고 한 달도 안 돼 환율은 장중 1480원을 뚫었다.
안팎의 모든 변수가 ‘강달러’와 ‘원화 약세’를 가리켰기 때문이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됐고 미국 경제는 계속 좋았다. 경기가 좋으니 미국 중앙은행(Fed)은 금리인하 속도를 조절했다. 미국이 시장의 기대만큼 금리를 인하하지 않는다고 하자 달러 가치는 계속 뛰었다.
여기에 12·3 계엄사태가 기름을 부었다.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커지자 증시, 채권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가 빠져나갔고 환율은 12월 27일 장중 1480원을 뚫었다. 금리인하에도 멈출 줄 모르는 달러 지난해 8월까지만 해도 달러를 보는 기대감이 지금과 달랐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이 “통화정책을 조정할 때가 왔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물가를 잡기 위해 2022~2023년 금리를 공격적으로 올렸다. 하지만 경제상황은 반대로 흘러갔다. 통화정책이 무색할 만큼 고금리 긴축에도 미국 경기 지표는 여전히 호조를 보였고 증시는 신고가를 갈아치웠다.
중앙은행은 경기가 좋을 때 금리를 인하하지 않는다. 물가를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만 Fed는 9월 FOMC에서 금리를 0.5%p 인하하는 ‘빅컷’을 단행했다.
Fed가 스스로 선을 그었듯, 경기침체 조짐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예외적으로 금리를 대폭 인하한 것이다. Fed의 금리인하가 사실상 확정돼 있어 달러 가치는 떨어지지 않았고 기준금리 역시 여전히 4.75~5%로 높은 수준이었다.
이후 Fed는 12월 FOMC 회의에서도 금리를 0.25% 추가로 인하했다. 달러 가치는 반대로 더 뛰었다. Fed가 2025년 예정된 금리인하를 4번에서 2번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한 영향이다.
예상 금리 밴드는 3.75~4%로 역시나 시장 기대보다 높았다. 미국 물가상승률은 여전히 높았고 고용시장과 경기흐름이 좋았기 때문에 금리를 내려도 미 국채금리는 오히려 상승했다.
FOMC 회의 이후 시장에서 장기 채권금리는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다.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심리적 저항선인 4.5%를 뛰어넘었다. 국채금리가 오르면서 달러화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한때 108을 넘어서며 2022년 1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치솟았다.트럼프 ‘약달러’ 원하는데 ‘갓달러’로 가는 외환시장 올해 1월 취임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 역시 ‘강달러’ 원인으로 작용했다. 트럼프가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내건 정책들 때문이다.
트럼프는 관세를 높여 다른 국가의 제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세금은 줄여 미국 기업을 지원한다고 공약했다. 강달러 시대에 마침표를 찍어 미국의 수출경쟁력을 높이고 Fed를 압박해 독립성을 약화시킨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트럼프는 대선 당시 미국 내 제조기업 법인세는 15%로 낮추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근로자를 위한 대규모 세금 감면도 언급했다. 감세가 기업 투자, 가계 소비 여력을 늘려 경제성장과 세수 증대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법인세와 소득세를 낮추는 대신 해외 기업에 관세를 더 받아 곳간을 채우겠다는 계획이다.
관세 전쟁도 선포했다. 모든 국가에서 수입하는 모든 제품에 10~2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산 제품에는 최소 60%의 관세를 매기겠다고 했다. 관세가 오르면 수입물가를 자극해 미국 내 물가상승 압력이 강해질 수 있다.
여기에 이민 문턱을 높이면서 고용시장 노동력 공급이 감소하면 임금 상승까지 더해져 물가상승을 자극할 수 있다. 이른바 ‘트럼플레이션’(트럼프의 정책으로 촉발되는 인플레이션)이다.
트럼플레이션에 대한 우려 때문에 환율은 미국 대선 이후 본격적으로 상승했다.내수 부진vs환율 안정
한국은행의 딜레마최근 달러 강세로 휘청이는 게 원화뿐만은 아니다. 주요국 통화 모두 달러 가치 대비 절하됐지만 원화 약세는 유독 심각한 수준이다. 달러인덱스(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는 2024년 4분기부터 꾸준히 상승해 트럼프 당선 이후 108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달러인덱스가 더 높았던 2022년 9월에도 원화가 1450원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당시 달러인덱스가 110까지 오르며 ‘갓달러’라 불리는 와중에도 원화는 1430원대에 머물렀다.
환율이 1450원을 넘어선 것은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단 두 번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엄 사태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이 겹치면서 환율은 1480원까지 치솟았다. 이는 정치적 혼란이 환율상승의 도화선 역할을 하며 시장 심리를 한층 악화시킨 결과다.
환율이 급등하자 채권시장, 증권시장에서는 외국인 매도세가 이어졌다. 이는 다시 환율상승을 부추기고 국내 자산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낳는다.
12월 3일 계엄 이후 12월 27일까지 약 한 달간 외국인이 순매도한 국채만 17조원에 달한다. 채권시장이 흔들렸다는 건 한국의 대외 신인도가 타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내수부진 역시 ‘강달러’가 장기화할 수 있는 요인이다. 한국은행이 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올해 국내 경제성장률이 1%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저성장의 터널로 들어가는 것이다.
내수 지표인 소매판매액지수는 2024년 3분기까지 10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지난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수출 전망 역시 올해는 어둡다.
한국은행은 경기부진을 이유로 금리인하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소비자들의 지갑이 굳게 닫힌 상황에서 수출 부진까지 겹치자 한국은행이 1월 추가 금리인하를 단행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환율이 급등한 상황에서 금리를 인하하면 원화 가치는 더 떨어지고 미국 달러에 대한 수요는 더 높아진다. 환율상승을 부추길 수 있는 것이다. 경기부양과 환율안정 사이에서 한국은행은 딜레마에 빠졌다.
시장과 전문가들의 전망도 엇갈린다. 한은이 1월 기준금리 인하에 나설 것이란 관측과 원·달러 환율의 1500원대 진입 우려도 있는 만큼 금리를 동결할 것이란 예상이 맞선다.
한국은행은 자산 ‘큰손’인 국민연금 환헤지 물량이 원·달러 환율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입장이다. 또 정치권의 여야정 협의체 가동 합의와 헌법재판관 임명 등의 움직임도 환율안정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봤다.
1월 2일 윤경수 한은 국제국장은 “곧 국민연금에서 환헤지 물량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 부분이 환율안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연금이 환헤지를 한다는 것은 원·달러 환율 수준이 일정 기준보다 높을 경우 보유한 해외자산의 일부를 선물환을 통해 매도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원·달러 환율이 떨어지면 국민연금은 차익을 거두고 달러 매도를 통해 환율을 낮출 수 있다.
금리인하를 통한 유동성 공급으로 내수 진작을 유도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미 금리차가 벌어지고 가계부채가 턱끝까지 차오른 상황에서 금리인하는 또 다른 숙제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윤제 연세대 특임교수는 “가계부채 연착륙을 위해서는 소득증가율보다 부채증가율이 낮아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정부가 경기침체 시 경기부양을 위해 금융정책을 동원하려는 유혹을 우선 절제해야 한다”며 “손쉬운 금융정책으로 부동산 경기침체, 소비침체 등에 대응하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다. 때로는 고통을 감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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