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이미지 / 사진=넷플릭스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 이미지 / 사진=넷플릭스
“애순아, 엄마가 가난하지 니가 가난한 거 아니야. 쫄아 붙지 마. 너는 푸지게 살아.”

악착같이 일해도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았던 시절. 부모는 그 모진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으면서도 귀한 내 자식에게만큼은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언젠가 가난의 대물림이 끊어져 아이가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없이 마음껏 꿈을 펼치길 원했다.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낸 수많은 부모님들의 모습이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엄마 광례(염혜란 분)의 딸 애순(아이유 분)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그래서인지 더욱 절절하게 와닿는다. 1960년대 제주에 살고 있는 광례는 언제나 애순이를 생각하며 잠녀(해녀)로서 물질을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애순은 광례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딸 금명(아이유 분·1인 2역)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지난 3월 7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큰 울림을 선사하고 있다. 작품의 배경과 내용 자체는 장르물을 중심으로 한 최근 트렌드와는 거리가 멀다. 그에 비해 훨씬 전개가 느리고 서정적이며 한국적인 특색이 강한 작품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 묘한 매력에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고 있다. 한참 동안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만 보다가 숨을 가다듬고 한국의 현대문학 소설을 한 페이지씩 찬찬히 넘기기 시작한 기분이랄까. 그렇게 ‘폭싹 속았수다’는 글로벌 콘텐츠 시장의 분위기를 새롭게 환기하고 있다. 해외까지 사로잡은 아름답고 묵직한 울림
‘폭싹 속았수다’는 ‘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의미의 제주 방언이다. 이 작품은 16부작 드라마로 60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투입됐다. 아이유, 박보검, 문소리, 박혜준, 염혜란 등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면서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제작진도 화려하다. ‘쌈, 마이웨이’, ‘동백꽃 필 무렵’의 임상춘 작가가 극본을, ‘나의 아저씨’, ‘시그널’의 김원석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사실상 국내에선 이미 흥행이 예고된 셈이다. 하지만 해외에선 다소 어려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지극히 한국적인 배경과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속도 역시 빠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전 세계적으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공개 2주 만에 넷플릭스 비영어권 시리즈물 중 세계 2위에 올랐다. 외신에서도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매체 포브스는 “스토리라인이 수십 년에 걸쳐 전개되면서 배우들은 성장하는 성숙함을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을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움직이는 방식, 표정의 깊이, 목소리 톤을 변화시킨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영원한 사랑과 인내의 독특한 이야기를 만든다”고 평가했다. 홍콩 매체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도 “친밀하고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아름답게 쓰였으며 생생하게 이야기가 실현된다”고 분석했다. 결국 자극적인 설정과 화려한 기법을 내세운 장르물의 홍수 속에서도 한국적이지만 보편적이고, 느리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서사에 해외 팬들도 감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폭싹 속았수다’의 큰 매력 중 하나는 시청자의 ‘최대공약수’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960년부터 2025년에 이르기까지 65년에 걸쳐 제주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그 안에선 광례, 애순, 금명 3세대에 걸쳐 인생의 여정과 질곡, 사랑과 애틋함이 펼쳐진다. 최근 나오는 장르물들은 보통 여러 세대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이에 따라 개인의 취향에 맞게 즐기는 콘텐츠의 개인화, 파편화가 심화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여러 세대의 이야기를 한데 엮어내면서도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게 했다. 작품을 보다 보면 애순의 입장이 되어 엄마 광례를 애타게 그리워하기도 하고, 딸 금명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또 금명이 나올 땐 금명의 입장이 된다. 엄마 애순과 아빠 관식의 크나큰 사랑이 너무나 감사하지만 그들의 조건 없는 희생을 생각하면 괜히 답답해지기도 하고 울컥하게 되기도 한다.
현대인들이 잊고 지내는 소중한 가치를 재각인시키기도 한다. 나라는 존재는 완벽하게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뒤엔 부모, 부모의 부모, 그리고 연인과 이웃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서 있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아이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서라면 가족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한 법이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누군가에 기대고 또 어깨를 빌려주며 살아가지 않는가. 하지만 일상에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쉽게 망각하고 만다. ‘폭싹 속았수다’는 이 점을 다시 되짚으며 깊은 깨달음을 선사한다. 애순의 집에 쌀이 똑 떨어졌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매일 조금씩 쌀독이 차오르고,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닥쳤을 때도 따뜻한 마음과 손길이 이어진다. 이웃의 이름도 모르고 이웃과 인사도 잘 나누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 주변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관련된 대사 역시 깊이 각인된다. “같이 가라. 같이 가. 같이 가면 백리 길도 십리 된다.” 신맛 가득한 날, 드라마가 건네는 위로

‘폭싹 속았수다’는 스토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략도 돋보인다. 이 작품은 1~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16회분을 4회분씩 나누고 한 개의 막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매주 한 막씩 공개, 총 4주에 걸쳐 방영된다. 이는 넷플릭스 드라마의 공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보통 넷플릭스는 시청자의 ‘빈지 워치(binge watch·몰아보기)’를 유도하기 위해 전 회차를 일시에 공개한다. 이와 달리 회차를 나눠서 공개하면 작품을 차근차근 감상할 수 있게 하고 화제성을 보다 길게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다. 하지만 매일 전 세계에서 많은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는만큼 쉽게 묻힐 수도 있다.

그런데 ‘폭싹 속았수다’는 영리한 전략으로 이 리스크를 없애고 있다. 우선 작가는 애순의 삶 전체를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로 나눠 서사 안에 녹였다. 다음에 찾아올 계절을 기다리듯 시청자가 새로운 4회분을 자연스럽게 기다리도록 한 것이다. 그 기다림의 시간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마케팅도 진행하고 있다. 4회분이 끝나고 나면 다음 막에 대한 티저 영상을 곧장 이어서 볼 수 있도록 했다. 복선을 담은 포스터도 미리 공개해 다음 막의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기분 좋은 기다림’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폭싹 속았수다’의 영어 제목은 무엇일까? 제주 방언의 질감을 표현하면서도 의미까지 잘 전달할 수 있어야 하다보니 번역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그렇게 나왔을 고민의 결과물은 감탄을 자아낸다. 이 작품의 영어 제목은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이다. ‘인생이 당신에게 귤을 줄 때’ 또는 ‘살다가 귤이 생길 때’라는 의미다.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인생이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라는 미국의 철학자 엘버트 허버드가 남긴 말을 각색한 것이다. 제주의 특산물 귤을 적용했다는 점, 귤에서도 가끔 신맛이 느껴질 때가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을 꿈꾸던 문학 소녀 애순. 하지만 그 꿈은 거센 바람에 쉽게 꺾이곤 한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접어두게 되기도 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 생각보다 순탄치 않고 신맛 가득한 날에 울게 될 때도 많다. 그러나 눈물을 닦고 씩씩하게 나아가다 보면 그것이 나의 모든 것을 담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인생 자체가 되기도 한다. “살면 살아져”라는 광례의 얘기를 회상하며 애순은 말한다. “어떻게 살까 싶더니만 진짜로 살면 살아졌네. 살면 살아졌어.”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위로와 응원이 아닐까.

김희경 인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영화평론가 kimhk@inje.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