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디슨에 가려 우리는 한 인물을 완전히 잊고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니콜라 테슬라. 그가 역사 속에서 현실로 나온 것은 2000년대입니다. 그의 이름을 딴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등장한 것이지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상식이 얼마나 편협한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가 테슬라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의 업적은 논문으로 써도 될 정도입니다. 에디슨이 직류를 고집할 때 교류를 발명해 현재와 같은 전력공급 체계를 만든 게 테슬라입니다. 자기장을 이용한 유도 전동기를 개발해 산업용 모터, 전동차, 가전제품이 탄생할 수 있는 길을 열었습니다. 전파를 이용한 무선 신호 송신인 라디오 기술을 개발한 것도, 원격조정 기술과 네온 형광조명을 최초로 발명한 것도 테슬라였습니다. 그의 X선 연구와 고주파 전류 연구는 의료영상장비와 레이더, 고주파 의료기기의 개발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이뤄졌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노년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세계인들에게 공짜 전기를 만들어 공급하겠다는 워든클리프 타워 프로젝트 실패 이후 자금난과 건강 악화에 시달렸습니다. 한 호텔에서 1943년 쓸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후 그는 60여 년간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습니다. 미국의 전기차 업체 테슬라의 창업자들이 그를 다시 불러냈습니다.
지금 우리는 테슬라가 만든, 그가 꿈꾼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면 과언일까요. 그에게는 철학과 비전이 있었습니다. “나는 돈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나는 인류를 위해 일한다”는 말은 유명합니다. 워든클리프타워 프로젝트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100년 뒤 현실이 되는 스마트그리드와 무선충전 인프라 개념과 유사합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인류의 진보는 물리학의 법칙을 따르는 것만큼이나 이상을 따르는 것에 달려 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비저너리, 미래의 설계자라고 부릅니다.
테슬라에 대해 길게 쓴 이유는 이번 주 커버스토리가 ‘전기의 재발견’이기 때문입니다. 인공지능(AI) 시대는 전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전기의 중요성은 앞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생태계 전반을 짚어봤습니다.
테슬라를 불러온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트럼프의 등장과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의 변화 때문입니다. 자유무역의 가치는 빛이 바랬습니다. 그 자리를 국가가 차지했습니다. 변형된 형태의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산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체제입니다. 과거 한국과 중국의 성공모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자본주의에는 큰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 단기주의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정책 집행에 속도가 붙지만 그 속도는 종종 정치 주기와 맞물려 장기적 비전을 상실합니다. 산업 구조개편, 장기적 개혁과제는 내팽개치고, 당장의 인기를 위해 달려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인들도 현재 나라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한국도 소용돌이 속에 있습니다. 미국과의 관계 변화, 산업구조의 급변 속에 국가 장기전략 수립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미래를 말하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탁월한 비전을 가진 기업가도 찾기 쉽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비저너리가 실종됐다”는 말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습니다.
비저너리는 “꿈을 전파하고 삶의 양식을 바꿔놓은 리더”라고 합니다. 한국의 1, 2세대 창업가와 국가발전 계획을 설계하고 추진한 정치인과 관료들이 그 범주에 들어갑니다. 미국에는 현존하는 비저너리들이 득실거립니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오픈AI의 샘 올트먼, 엔비디아의 젠슨 황 등이 대표적이지요. 어쩌다 한국에서 비저너리들이 사라졌는지는 더 긴 얘기라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약점이 많은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정치의 타임라인이 아니라 산업과 문명의 흐름을 간파하고 앞서가는 비저너리가 더더욱 필요한 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의 인선이 그런 면에서 아쉽습니다. 미래와 비전보다는 현안을 처리할 실무형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가자본주의 시대, 한 국가의 성공 여부는 권력의 크기가 아니라 비전의 질에 달려 있습니다. 한 켠에서 새로운 꿈을 꿀 국가전략실이라도 신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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