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위험한 남자 아냐"…’퍼포남’ 유행은 무엇을 말하나
(‘퍼포남’ 스타일링 모습. /사진=틱톡 #performativemale)

최근 해외에서 주목받는 남성들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대신 말차라떼를 즐기며 감성을 살리기 위해 줄 이어폰을 꽂고, 라부부 같은 유행템을 매단 채로 언제 어디서든 페미니즘 서적을 읽는 것이다.

이 남성들은 ‘퍼포머티브 메일(performative male)’, 직역하면 ‘보여주기식 남성’이다. 이 유행이 우리나라에도 알려지며 ‘퍼포남’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퍼포남은 여성들의 시선을 의식해 자신의 행동, 취향, 성격을 ‘보여주기용’으로 구성하는 남성을 의미한다. 사회적 남성성에 부합하면서도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감성적인 모습을 퍼포먼스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보통 ‘말차+줄 이어폰+철학 서적’의 조합이 상징이다.

가장 ‘퍼포남’다운 남성을 뽑는 경연대회까지 열렸다. 8월 1일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퍼포먼스형 남성 콘테스트’에서는 퍼포남 스타일링을 한 수십 명의 젊은 남성들이 공원을 태연한 듯 돌아다니며 수백 명 관중의 평가를 받았다. 대회에 참가한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 헐렁한 바지, 분홍색 나이키 운동화 등으로 스타일링했고 거의 모든 참가자가 아이스 말차 오트밀크 라떼를 마시고 있었다. 우승자 마커스 저니건은 와이드 팬츠를 입고 “걸 파워”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유선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우승 상품으로는 라부부 인형이 주어졌다.

이 대회에는 단순한 코스프레가 아니라 ‘보여주기식’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대회 주최자인 란나 레인은 “퍼포먼스형 남성이란 여성을 유혹하기 위해 페미니즘과 부드러움, 그리고 특정 음악을 소화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입고 이야기하는지 전혀 모르는 남자”라고 설명했다. 실제 대회에서 일부 남성들은 의도적으로 책을 거꾸로 들었다. 시애틀에서 시작된 이 대회는 화제를 모으며 뉴욕과 시카고를 넘어 캐나다 오타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호주 시드니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퍼포먼스(performative)’라는 단어가 새롭게 소비되고 있다. 틱톡에서 #performativemale 태그가 달린 동영상은 28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performative 태그가 달린 동영상은 1억49000만 회 이상 조회됐다. 5월 이후 구글 검색창에는 “말차는 왜 퍼포먼스적(performative)’인가요?” 같은 질문이 잇따르고 있다.
"나 위험한 남자 아냐"…’퍼포남’ 유행은 무엇을 말하나
(‘퍼포남’ 콘테스트 현장. 사진=X)
“나 위험한 남자 아냐”전통적인 남성성에 대한 이미지가 흔들리자 ‘무해한 남성’을 연출하는 새로운 트렌드가 등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워싱턴포스트 평론가 마이클 안도르 브로더는 “퍼포먼스형 남성의 탄생은 깨어있고 무해한 남성성을 드러내는 수많은 요소가 결합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요소들이 작은 셔츠, 와이드 팬츠, 넉넉한 가방 같은 패션 선택에서부터 말차, 에세이집 같은 소품, 그리고 붐비는 카페에 1인 테이블에 앉아 존재감을 과시하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연애를 위협적으로 여기는 여성들에게 무해하고 다가가기 쉬운 남자로 보이려는 일종의 ‘전략적 연출’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표현했다. 브로더 역시 “다른 위험한 남자들과 달라 보이려는 노력 뒤에는 속임수가 숨어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연애를 하기 위해 오히려 연애에 관심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일종의 역할 놀이를 하는 것이다.

여성학 석학 주디스 버틀러의 ‘성별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 개념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퍼포먼스형 남성’에서 ‘퍼포먼스’라는 표현도 여기서 비롯됐다. 버틀러는 1990년 발표한 논문 ‘젠더 트러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에서 “성별은 수행으로써 증명된다. 성별은 언제나 ‘행위’다”라고 밝혔다. 그는 성별을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특정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구성되는 정체성으로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는 진보적인 여성들에게 더 호감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미적 감각을 창조한다고 표현했다. 퍼포남 경연대회 참가자 중 한 명인 기네비어 운터브링크는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맞추려고 한다”고 인터뷰했다. 대회 주최자 린나 레인도 퍼포남들에게 페미니즘은 그저 미적인 요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실제 페미니스트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페미니즘 슬로건이 적힌 티셔츠와 페미니즘 서적을 전시용으로 두르고 다닌다는 것이다.

반(反)인종차별 운동의 맥락과 비슷하다는 반응이다. 지난 2020년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일어났을 때 운동에 참여하거나 지지 의사를 밝히는 사람 중 일부가 실제로는 그 대의에 관심이 없지만 도덕적으로 보이기 위해 행동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지적이다. 경제력으로 남성성 내세우기 어려워져
"나 위험한 남자 아냐"…’퍼포남’ 유행은 무엇을 말하나
('퍼포남' 스타일링 리스트/출처: 커뮤니티 레딧)

미국 취업시장에 ‘히세션(He-cession)’ 징후가 나타났다. 히세션은 불황을 뜻하는 ‘리세션(recession)’에 남성을 의미하는 ‘그(he)’를 붙여 만든 신조어다.

이 단어의 배경은 젊은 남성들의 실업률이 급증한 데 있다. 미국 고용시장이 성별에 따라 분화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노동시장 상황 속에서도 20대 남성들만큼은 경기침체 수준의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다.

미국의 7월 전체 실업률이 4.2%로 양호한 수준을 유지한 것에 비해 20~24세 사이의 젊은 남성 실업률은 8.3%로 경기침체 수준에 근접했다고 블룸버그는 보도했다. 최근 대학 졸업자의 경우 연간 실업률이 5.3%로 젊은 여성 실업률보다 약 두 배 높은 수치다.

남성과 여성이 집중된 산업 분야의 차이가 실업률 격차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여성들은 의료나 교육처럼 비교적 안정적인 분야에 모여 있는 반면, 남성들은 주로 경기 변동에 민감한 건설업이나 제조업에 주로 종사해 젊은 남성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설명했다.

직업이 남성성을 보증하던 시대가 저물고 청년 남성 실업률이 높아지자 일부 남성들이 SNS로 무대를 옮겼다는 분석이다. 말차라떼와 철학 책, 감성 있는 패션으로 연출된 ‘퍼포남’은 경제력이 아닌 이미지로 인정받으려는 새로운 방식의 남성성인 셈이다.

블룸버그는 히세션 현상에 대해 “마치 경기침체처럼 남성의 영향력이 후퇴하고 있으며 남성 중심 마초 시대의 종말을 뜻하기도 한다”고 보도했다.

조수아 인턴기자 joshu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