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태광산업은 △부동산 △에너지 △화장품 △블록체인 등 13개 신규 사업 목적을 정관에 추가했다.
특히 애경산업 인수전 참전, 국내 1위 부동산 자산운용사인 이지스자산운용 인수 추진,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남대문 호텔 인수 등 과감한 외형 확장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사업 확장과 더불어 복잡한 승계 구도가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티투PE→애경산업’…3세 승계 가시화
태광그룹의 핵심 신사업 중 하나인 애경산업 인수의 중심에는 사실상 오너 일가의 사적 투자회사로 불리는 ‘티투프라이빗에쿼티(티투PE)’가 있다. 이 투자회사는 태광산업과 IT 계열사 티시스가 각각 41%, 이호진 전 회장의 장남 이현준 씨와 장녀 이현나 씨가 각각 9%씩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현준 씨는 티시스 지분도 11.3% 보유하고 있어 티투PE에 대한 직간접 지분율은 약 13.6%에 달한다. 애경산업의 경우 AK홀딩스와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 일가가 보유한 총 63%의 지분이 매각 대상이다.
티투PE는 직접 지분을 인수하지 않지만, 유안타인베스트먼트와 함께 외부 투자자 유치에 나서며 이번 거래의 핵심적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애경산업을 그룹 내 생활소비재 사업을 총괄하는 주력 계열사로 재편하려는 구상 속에서 티투PE가 중추적 역할을 맡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애경산업 인수 자금으로 태광산업이 자사주를 활용해 3200억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하려 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특히 이번 EB는 태광산업이 보유한 자사주(24.4%)를 기초자산으로 활용한 것으로, 단순한 자금 조달 차원을 넘어 지배구조와 관련된 전략적 의도가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B는 자사주를 외부 투자자에게 넘기는 구조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오너 측이 기존 지분율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도 의결권을 우회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호진 전 회장은 2023년 8·15 특별사면으로 복권됐지만, 최근 경찰 수사를 받으며 다시 법의 심판대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는 지난해 9월 이 전 회장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이 전 회장이 계열사 자금을 통해 수십억원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태광 측은 “비자금을 조성해 사용한 것은 김기유 전 경영협의회 의장이며, 경찰 조사에서도 이호진 전 회장이 비자금 조성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수사로 그룹 내 저축은행 계열사인 고려저축은행(지분 30.5%), 예가람저축은행 등에 대한 대주주 적격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점이 중대 변수다. 상호저축은행법상 대주주는 사회적 신용 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이 전 회장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해당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게 된다. 이 경우 금융당국은 10% 초과 지분에 대해 처분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실질적 의결권은 대폭 축소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부상한다는 점이다. 고려저축은행 지분 23.15%를 보유한 이원준 씨다. 그는 창업주 이임용 회장의 장손이자 고(故) 이식진 전 부회장의 외아들이다. 지분만 놓고 보면 이 전 회장이 적격성을 잃을 경우 고려저축은행의 최대주주는 자연스럽게 이원준 씨로 전환된다.
이원준 씨는 태광산업 3대 주주(지분 7.49%)로 티시스(2.08%), 흥국생명(14.65%) 등 주요 계열사의 지분도 광범위하게 보유하고 있다.
대한화섬과 태광산업을 거치지 않고 금융계열 지분을 직접 보유하고 있는 독립 주주라는 점에서 지배구조 개편이나 지주사 전환 시 핵심 변수로 떠오를 가능성이 있다.
그는 과거 이호진 전 회장을 상대로 상속 지분을 둘러싼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당시 소송은 이호진 전 회장 누나인 이재훈 씨, 이복형제 이유진 씨 등 창업주의 다른 자녀들도 동참한 바 있다.
실제 지주사 전환 논의가 본격화될 경우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비금융계열사가 금융계열사 지분을 보유하는 것은 금지된다. 대한화섬과 태광산업이 보유 중인 흥국화재, 흥국생명, 고려저축은행 등의 지분은 매각이 불가피해지고, 결국 독립적으로 금융계열사 지분을 들고 있는 이원준 씨의 입지가 상대적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태광그룹 승계 구도는 이호진 전 회장의 장남 이현준 씨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이지만 이현준 씨는 흥국증권 우선주 43만 주를 제외하면 금융계열사 지분이 하나도 없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원준 씨가 앞으로 지분 매각 혹은 우호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오너 3세 승계 작업에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이 존재한다. 특히 장기적으로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명분이 약해질 경우 이원준 씨의 지분이 협상 카드로 활용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에 대해 태광그룹 관계자는 “이호진 전 회장은 안정적인 지분을 확보하고 있어 장조카에 의한 경영권 분쟁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현재 태광그룹의 지배구조는 이호진 전 회장이 보유한 지분과 이 전 회장 일가가 대부분의 지분을 소유한 사실상의 가족회사 티알엔(TRN)을 통해 이뤄지는 이중 구조다.
티알엔은 이 전 회장과 두 자녀가 90%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회사를 통해 대한화섬·태광산업을 지배하고 있다. 대한화섬은 흥국생명(10.43%), 고려저축은행(20.2%), 예가람저축은행(22.16%)의 지분을, 태광산업은 흥국화재(39.13%), 고려저축은행(20.2%)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태광그룹의 자산이 8조6680억원으로 공정위의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명목GDP의 0.5%, 자산 11조6000억원 이상) 지정 기준에 근접하고 있다. 향후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지정될 경우 지주사 전환 압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계열사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들은 구조조정이나 지분 매각 요구에 직면할 여지도 있다. 금융계열사 지분을 보유한 대한화섬·태광산업은 이를 매각해야 하며 티알엔 중심의 현 체제에 균열이 생길 것이란 관측이다.
이호진 전 회장이 법적 리스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이원준 씨의 독립 지분 구조는 향후 경영권 승계에서 예기치 않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재계는 승계 측면에서 오너 3세의 명분과 실질적 지분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거세질 경우 이원준 씨가 협상의 키 플레이어로 부상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치고 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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