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 오너리스크란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오너의 일탈이 기업경영이나 주가에 악영향을 미치는 현상. 당사자의 갑질, 자녀들의 마약이나 비행, 경영권을 둘러싼 가족 간 심각한 분쟁 등이 원인이었습니다. 두산그룹 경영권 분쟁,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뿐 아니라 오너들의 폭행 사건도 있었습니다. 오너리스크는 경영권의 편법 승계 문제와 맞물려 반기업 정서를 만드는 주범으로 지목됐습니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대기업 오너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마치 ‘셀럽’을 보는 것과 비슷해졌습니다. 팬덤까지 생겨났습니다. 커뮤니티에는 오너들에 대한 호감도 높은 글들이 올라옵니다. 네이버 데이터랩에 검색을 해봤습니다. 오너리스크, 반기업정서 두 단어를 집어넣었더니 최근 10년간 볼 수 없었던 낮은 수치가 나왔습니다.
이 반전을 해석하려면 과거를 봐야 합니다. 2000년대 초 재벌에 대한 한국인들의 코드는 ‘악당’에 가까웠습니다. 정경유착, 문어발 확장, 황제경영 등이 연관 단어였습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책임은 국유화한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이런 정서에 2000년대 중반 두산그룹 내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격화되며 오너리스크란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갑질 사건과 경영권 분쟁, 마약 폭력 등에 일가가 연루된 사건들의 영향이었습니다. 2014년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은 상징이 됐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대기업의 세대교체와도 맞물려 있었습니다.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까지 재계에는 3세, 4세들이 등장했습니다. 앞세대들과는 달리 이들은 사회적 검증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창업자들과 2세들은 창조와 혁신의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작은 문제들을 덮기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3세들은 검증받지 않았습니다. 일탈은 가차 없는 질타를 받아 마땅했습니다.
2020년대 들어 분위기는 달라졌습니다. ‘대투자의 시대’로 접어든 영향이 컸습니다. 누구나 자산을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을 인정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주주가 됐습니다. 이해관계가 일치되기 시작한 셈이지요. “기업은 고용과 가치를 창출함으로써 사회 발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주체”라는 쪽으로 정서가 옮겨 갔습니다. 더 가진 사람들에 대한 분노는 누그러졌습니다. 2020년 이건희 삼성 회장의 별세에 대한 추모 분위기는 변화를 보여줍니다.
작년과 올해는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오너들을 친근하게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상징적 인물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입니다. 이들이 입은 옷은 화제가 됩니다. 이재용 회장이 부산 한 시장에서 취한 익살스러운 표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올해는 사고 친 오너들도 없었습니다. 오너들이 오너리스크를 이해하기 시작한 결과입니다.
자녀들도 거들었습니다. 최근 이재용 회장 아들의 입대는 특권층이 아니라 의무를 다하는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더해줬습니다. 정유경 신세계그룹 회장의 딸은 K팝 그룹 멤버로 데뷔한 후 털털한 모습으로 대중에게 다가갔습니다.
이번 주 커버스토리 인물인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그는 범접하기 어려웠던 과거 회장님의 이미지를 벗겨 냈습니다. 동네 아저씨 같은 외모, 유튜브 광고 영상에 등장해 ‘이 차 누가 만들었지 진짜 잘 만들었네’라며 너스레를 떨던 모습, CES 등 공개 행사에서 직접 PT를 하고, 기자들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모습은 황제경영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실제 그를 만났던 사람들이 전하는 겸손하고, 경청할 줄 아는 모습은 바이럴되며 호감을 더했습니다.
하지만 정 회장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결정적 이유는 ‘검증된 경영자’란 것입니다. 그는 기아를 디자인 회사로 변모시켰습니다. 제네시스를 고급차의 대명사로 키운 것도 그의 기획이었습니다. 지금은 로봇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해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높은 점수를 받습니다. 현대차 주가가 사상 처음 30만원을 넘어선 것은 그 결과입니다.
현대차·기아의 헤리티지를 기반으로 미래 모빌리티 기업이라는 비전을 갖고 있는 정 회장. 그리고 기업을 이어받은 수많은 오너 3, 4세들, 그들이 준비해야 할 일은 100년 기업을 향한 혼을 불어넣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기술 있는 기업은 패러다임이 바뀌면 무너질 수 있지만 영혼 있는 기업은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는 문화적 힘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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