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을 우선순위에 두는 한, 안전은 언제든 타협 가능한 ‘선택 조건’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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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초 기업 경영진이 발표하는 신년사나 경영 방침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있다. 바로 ‘올해의 최우선 가치는 안전’이라는 선언이다. 실제 많은 기업이 사내 게시판과 작업장 입구에 ‘안전 제일’이라는 문구를 대대적으로 걸어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선언이 무색할 만큼 산업 현장의 크고 작은 재해는 끊이지 않는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2025년 재해자 수 11만3305명, 사고 사망자 수 872명으로 많은 근로자들이 일터에서 목숨을 잃거나 다치고 있다.

경영진은 안전 시스템을 구축하고 법적 규제를 준수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는데 왜 현장의 위험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그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우선순위(Priority)’라는 단어의 함정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언제든 뒤바뀔 수 있는 순위 경쟁

안전은 결코 경영의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일까? 우선순위라는 개념은 본질적으로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동될 수 있다는 속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 시장이 안정적이고 공장이 정상 가동될 때는 안전이 손쉽게 1순위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납기가 극도로 임박하거나 당장 가시적인 생산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압박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상황은 바뀐다. 현장에는 은밀한 압박이 형성된다. “이번 한 번만 급하니까 넘어가고 내일부터 다시 철저히 지키자.”

이 지점에서 안전은 생산성, 비용절감, 품질이라는 강력한 비즈니스 지표들과 ‘순위 경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눈앞의 단기적 이익과 압박 속에서 안전은 너무나 쉽게 뒷순위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이번 한 번의 예외’가 두 번, 세 번의 예외를 낳고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기업을 파멸로 이끄는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안전을 우선순위에 두는 한 안전은 언제든 타협 가능한 ‘선택 조건’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우선순위 vs 루틴

안전을 다른 경영 지표와 경쟁시키는 ‘우선순위’ 방식과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 ‘루틴’ 방식의 차이는 기업의 생존을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우선순위는 ‘상황에 따라 순서가 수시로 바뀐다’. 하지만 루틴은 ‘상황과 무관하게 무의식적으로 반복된다’.

“오늘은 바쁘니 내일부터 지키자”는 우선순위는 생산·비용·품질과 늘 순위 경쟁을 하지만 루틴은 비즈니스 지표와 비교 대상이 아니고 “아무리 바빠도 이건 그냥 하는 것”이다.

우선순위는 사고가 터진 직후에만 반짝 강조되고 타인의 눈치와 압박에 의해 움직이지만 루틴은 매일매일 일상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되며 몸에 밴 무의식적 습관으로 작동한다.

◆대안은 ‘안전 루틴(Routine)’

그렇다면 기업은 이러한 인간의 본성과 시스템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미국의 행동심리학자 스콧 갤러 교수는 “안전은 인간 본성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라고 단언했다. 본능을 이기기 위해서는 안전을 의식적 선택 영역인 우선순위에서 내려놓고 무의식적 행동 영역인 ‘루틴(Routine)’으로 전환해야 한다.

안전 루틴이란 비즈니스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예외 없이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안전 행동을 기계적·반사적으로 실천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면 아무리 바빠도 화장실로 가 기계적으로 양치질을 하는 것처럼 안전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의 습관으로 안착해야 한다는 뜻이다.

1980년대 후반 심각한 경영 위기에 처했던 글로벌 알루미늄 제조 기업 알코아(ALCOA)에 취임한 폴 오닐 회장의 경영 혁신 사례는 이를 명확히 증명한다. 월가의 투자자들은 그가 취임사에서 재무 플랜 대신 오직 ‘직원들의 안전’만을 이야기하자 경영의 우선순위를 모르는 낙제점 CEO라며 비난했다.

그러나 오닐 회장의 진짜 의도는 안전을 단순한 우선순위가 아닌 조직원 전체의 완벽한 ‘핵심 루틴’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사고나 불안전 행동이 발생하면 규정과 절차에 따라 즉시 작업을 멈추고 이를 전사에 투명하게 공유하여 재발 방지책을 세우는 시스템을 예외 없이 가동했다.

초기에는 생산이 중단되어 손실이 나는 듯 보였으나 데이터가 투명하게 공유되고 현장의 위험 요인이 근본적으로 조기에 발굴·제거되면서 조직 전체의 소통 체계와 공정 효율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결국 알코아는 재해율을 획기적으로 낮췄을 뿐만 아니라 턴어라운드에 성공하며 사상 최대의 성과를 기록했다. 안전을 타협 불가능한 루틴으로 만들었을 때 비즈니스의 퍼포먼스 역시 최고 수준으로 동반 상승한다는 것을 증명한 역사적 지표다.

◆보고 장려 문화, 안전한 일터를 만든다

많은 경영진이 범하는 오류는 현장의 ‘사고 보고 건수’가 제로(0)에 가까울수록 우리 사업장이 안전하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행동과학적 데이터가 보여주는 진실은 정반대다. 초기에 현장의 사소한 아차사고나 규칙 위반을 투명하게 보고하고 활성화하는 기업은 단기적으로 사고 건수가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잠재적 위험을 조기에 발굴해내고 있다는 증거이며 장기적으로는 대형 재해율이 지속해서 하락하는 곡선을 그리게 된다.

반면 처벌이 두려워 현장의 작은 실수나 오작동을 은폐하고 묵인하는 기업은 단기적 지표는 깨끗해 보일지 몰라도 수면 아래에서 통제 불가능한 위험이 임계점까지 끊임없이 누적된다. 결국 임계점을 초과하는 순간 단 한 번의 사고로 기업의 존립이 흔들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경영자가 주목해야 할 것은 가공된 ‘무사고 일수’가 아니라 현장에서 위험을 마주했을 때 침묵하지 않고 서로 조언하며 투명하게 공유하는 ‘소통 루틴’의 활성화 정도다.

우리 기업의 안전은 매번 다른 비즈니스 목표 앞에 눈치를 보며 흔들리는 ‘우선순위’인가, 아니면 어떤 폭풍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기업의 기초 체력을 지켜주는 타협 불가능한 ‘루틴’인가.

답은 명확하다. 본능이 아닌 절차와 루틴만이 기업과 사람을 살린다.

이준희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커니코리아 파트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