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배출권 90%가 '유령 크레딧'…블록체인, 탄소시장의 신뢰를 짓다[비트코인 A to Z]
지난 2023년 1월 영국 가디언, 독일 주간 디차이트, 비영리 탐사보도매체 소스머테리얼이 9개월간의 공동 조사 결과를 내놨습니다. 세계 최대 탄소배출권 인증기관 베라(Verra)가 발급한 열대우림 상쇄배출권(열대우림 보호로 흡수·유지된 이산화탄소만큼을 다른 곳 배출을 상쇄하는 데 쓸 수 있는 크레딧) 가운데 90% 이상이 실제 감축을 입증하지 못한 ‘유령 크레딧’이었다는 내용입니다.

케임브리지대 연구를 근거로 산림 훼손 위협이 평균 400% 부풀려졌다는 분석도 나왔습니다. 이 크레딧을 사들여 탄소중립을 홍보했던 디즈니, 셸, 구찌 같은 대기업들의 신뢰도 함께 흔들렸습니다. 베라는 반박했지만 ‘그린워싱’ 논란이 세계 탄소시장 전체로 번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신뢰의 위기가 시장을 만들다 세계 탄소시장은 지난 10년간 크게 확대됐지만 이런 신뢰 문제가 겹치면서 최근 성장세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원인은 겹쳐 있습니다.

첫째, 중복 계산입니다. 크레딧의 발행·이전·폐기 이력을 기록하는 공식 장부인 등록소(registry)가 나라·기관마다 따로 있다 보니 같은 감축분이 서로 다른 등록소에서 이중 발급되거나 감축이 일어난 나라와 크레딧을 사용한 나라 양쪽에서 잡히는 사례가 생겼습니다.

둘째, 성과 측정·보고·검증(MRV)이 여전히 수작업 서류 위주라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오류가 뒤늦게 드러납니다. 셋째, 위 사례처럼 감축 실체 없는 프로젝트가 인증을 받는 그린워싱입니다.

이런 신뢰 결핍을 기술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가 블록체인입니다. 크게 세 가지 해법이 논의됩니다. 첫째, 크레딧을 토큰으로 만들어 소액 분할과 실시간 거래를 가능하게 하는 토큰화. 둘째, 위성·센서·인공지능을 결합해 감축 성과를 실시간 측정하는 디지털 MRV(dMRV). 셋째, 한 번 쓴 배출권을 스마트컨트랙트가 자동 소각해 재사용을 원천 차단하는 방식입니다.

이 흐름은 지난 몇 해 사이 실험 단계를 지나 제도권 인프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세계은행, 국제배출권거래협회(IETA), 싱가포르 정부가 공동 설립한 ‘기후행동 데이터 신탁(CAD Trust)’입니다.

2022년 말 출범해 여러 나라와 기관의 등록소를 하나의 블록체인 위에서 연결하는 오픈소스 플랫폼입니다. 부탄은 국가 등록소를 새로 구축하는 대신 이 오픈소스에 통합하는 방식을 택해 초기 비용을 줄이고 시장 진입 시점을 앞당겼습니다. 지금은 베라, 골드스탠다드, 미국탄소등록소 등 주요 민간 등록소 대부분이 이 플랫폼에 연결돼 있습니다.

대형 금융기관의 움직임도 뚜렷합니다. 지난해 7월 JP모간의 블록체인 자회사 키넥시스(Kinexys)는 S&P글로벌, 에코레지스트리, 국제탄소등록소와 손잡고 탄소배출권 토큰화 파일럿을 시작했습니다. 나스닥은 2023년 말 발행·결제 자동화 서비스를 출시했고 세일즈포스는 신뢰도 평가업체 실베라, 캘릭스 글로벌 등과 협력해 선별된 크레딧만 유통하는 ‘넷 제로 마켓플레이스’를 운영합니다. 탈중앙화 실험 실패의 교훈
다만 4년 전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블록체인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2021년 10월 출시된 폴리곤 기반 투칸(Toucan) 프로토콜은 베라 등록소의 크레딧 약 2200만 개를 ‘사용 완료(retired)’ 처리한 뒤 그만큼의 토큰을 블록체인 위에 새로 발행했습니다. 원래 등록소에서는 쓸 수 없게 만든 다음 블록체인에서 거래되게 한 것입니다. 이 크레딧을 묶어 만든 지수형 토큰이 BCT(Base Carbon Tonne)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KlimaDAO라는 프로젝트가 꾀를 냈습니다. 시장에서 크레딧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면 시장에 남은 크레딧 가격도 오르고 자기들의 코인도 함께 오를 거라는 계산이었습니다. 실제로 KLIMA 코인 가격은 급등했습니다.

그러나 이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무차별로 쓸어담다 보니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2005년부터 발효된 교토의정서 체제에서 만들어진 구형 온실가스 감축 크레딧도 토큰화되어 슬그머니 블록체인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 크레딧은 감축량이 부풀려졌거나 실체가 부실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사실상 아무도 사려하지 않는 ‘좀비 크레딧’ 상태였습니다. 온체인 탄소시장의 품질이 낮아졌습니다. BCT 가격은 8달러대에서 2달러대로 함께 떨어졌습니다. 3000달러대까지 치솟았던 KLIMA도 몇 달러 수준으로 무너졌습니다.

결국 베라는 2022년 5월 이 방식을 전면 금지했습니다. 본디 ‘사용 완료’는 배출 상쇄에 실제로 쓰였다는 뜻인데 단지 블록체인으로 옮기려고 사용 완료 처리를 남용하면 등록소 통계가 왜곡된다는 이유였습니다.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 ‘사용 완료’ 대신 ‘블록체인에 반영돼 잠금’ 상태를 새로 두는 방식입니다. 투칸 방식의 운영은 규제상 막혔습니다. 실험은 사실상 종결됐습니다. 앤드리슨 호로위츠, 삼성넥스트 등이 7000만달러를 투자했던 플로우카본이라는 프로젝트도 결국 토큰 출시를 접고 2024년부터 투자자 환불을 진행했습니다.

교훈은 단순합니다. 인증기관과 규제 체계 없이 홀로 가는 탈중앙화 단독 실험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탈중앙화라는 이상도 중요하지만 기존 제도와의 상호운용성, 그리고 규제 순응도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한국 시장에 열린 창 지난해 11월 세계금융포럼에 참석한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블록체인 기반 탄소배출권 거래소의 필요성을 공식 언급했습니다. 2027년 2월 시행되는 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에 대응하려면 지금의 불투명한 거래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은 지난해 ‘블록체인 민간분야 확산사업’의 일환으로 운송 분야 탄소배출권 거래지원 플랫폼 구축 사업을 추진했고 지난 6월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ICT 전시회에 ‘블록체인 한국관’을 꾸렸습니다. 환경부는 배출권거래제(K-ETS) 위탁매매 시범사업자로 NH투자증권을 선정해 지난해 시스템 상용화를 마쳤고 지난 8월에는 IBK투자증권이 베라와 손잡고 아시아 자발적 탄소시장 진출에 나섰습니다.

여기에 토큰증권(STO) 제도가 내년 1월 시행됩니다. 블록체인은 여러 해법 가운데 하나로 기능하고 있고 탄소배출권을 자본시장법상 금융상품으로 편입할 접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은 한국 자산운용사와 핀테크 기업에 드문 기회의 창일 수 있습니다.

블록체인은 오프체인 원데이터의 오류까지 고쳐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신뢰가 무너진 자리에 검증과 추적의 인프라를 다시 놓는 일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조건입니다.

김외현 우석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