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시련을 만날 때 대부분은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미숙한 청춘에게 세상이 바로 답을 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끝없는 반문 끝에 자신이 겪은 실패가 인생에서 필연적인 경험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삶의 결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은 그때부터다.

가수 김장훈의 삶에는 필연적 상처가 많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유년 시절, 교통사고 11번·자살 시도 2번으로 점철된 불운한 과거, 공연 중 추락 사고 등 그의 삶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장훈 “네 삶의 무대에 서서 더 치열하게 노래하라”
지난한 삶의 여정을 털어놓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극단적인 허무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오뚝이처럼 끝없이 일어선 삶 속에서 오히려 강한 ‘긍정’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인터뷰 말미 그는 ‘행복’이란 단어를 여러 번 입에 올렸다.

불안한 만큼 많이 꿈꿀 수 있는 것이 청춘의 역설이라면 그는 오랜 청춘을 살아왔다. 거칠지만 푸른 인생길이었다.


눈물에 가려진 세상 보며 난 노랠 불렀지 언제나 멋진 날을 꿈꾸면서 노랠 불렀지
- 3집 수록곡 ‘노래만 불렀지’ 중에서

소년은 유난히 창밖을 바라보는 날이 많았다. 환자복을 입은 소년의 마른 팔에는 언제나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다. 봄의 생동감도, 여름의 치열함도, 가을의 넉넉함과 겨울의 쓸쓸함도 소년에겐 모두 남의 이야기 같았다. 하루에 세 차례 링거를 교체하는 것이 유일한 일상의 변화였다. 병상의 계절은 무심히 지나가곤 했다.

가수 김장훈이 말하는 어린 시절의 풍경이다. 기관지염과 악성 빈혈로 3년을 병원에서 보낸 기억이 대부분이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에 다니고 뛰어놀 시간에 매일 창밖만 바라보고 있으니 어릴 때부터 삶이 허무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남부럽지 않게 안 좋은 상황이었다”고 농담을 할 만큼 역경이 많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다. 홀어머니는 세 남매와 함께 지내는 시간보다 일터에 나가는 시간이 많았다. 몸이 아파 병원 신세를 지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차압 딱지가 붙는 것도 세 차례나 봤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상처는 사춘기의 풍랑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등학교 때 가출을 했어요. 학교 수업을 빠지는 날도 많았죠. 결국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시계 외판원부터 막노동, 분식집 디제이, 웨이터…. 가수가 되기 전까지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일을 선택하는 첫 번째 기준은 ‘노래’였다. 노래 연습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여고 앞 분식집에서 디제이를 했을 때는 저녁에 남산에 올라가 몇 시간이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는 일화를 전했다.

“처음부터 노래를 잘한 건 아니었어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노래를 하면 사람들이 제 목소리는 묻힌다고 하더라고요. 기관지염을 오래 앓았기 때문에 노래하기에 좋은 목 상태가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소리를 지르고 나면 가슴속 울분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강박적으로 노래 연습에 몰두했다. “이웃집에서 시끄럽다고 항의할까봐 옷장에 들어가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연습을 했어요. 노래라기보다 소리 지르기에 가까웠죠. 아·에·이·오·우를 최대한 높은 음으로 내는 연습만 하기도 하고, 노래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하루 종일 그 부분만 반복하는 식이었어요.”

평균적으로 하루 10시간은 노래를 불렀다. 그의 소리는 점차 거칠고 호소력 있는 독특한 음색으로 바뀌어갔다. 다른 이들에게 묻히기 일색이었던 그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김장훈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서 ‘한국사람’이라는 학과 밴드를 결성하면서부터다. 노래 연습에 몰두하는 그를 본 어머니가 “음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을 테니 대학에 들어가라”고 말했고, 검정고시 합격 후 대학에 입학한 그가 가장 처음 한 일이 음악밴드를 만드는 일이었다.

경원대 영문과 88학번 멤버로 구성된 ‘한국사람’은 학예회 시낭송 무대에 선 것을 시작으로 매주 공연을 열었다. “그 당시 밴드의 연습량도 엄청났죠. 하루에 19시간씩 30일 동안 매일 연습한 것이 최고 기록이에요. 수업도 빠지고 매일 노래 연습만 했으니까요.” 모든 것이 허무했던 소년은 노래라는 꿈을 만나며 삶에 대한 열정을 되찾게 됐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장훈 “네 삶의 무대에 서서 더 치열하게 노래하라”
하루를 생애처럼 무대 위의 삶, 삶 위의 무대

우여곡절 끝에 가수의 꿈을 이뤘지만 그 길 역시 순탄하게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1집 앨범을 냈을 때 김현식 신드롬이 일어났다. 앨범 수록곡인 ‘내 사랑 내 곁에’가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에 삽입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

노래는 떴지만 주인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사람들은 ‘김현식의 동생’으로 알려진 김장훈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대에 올라 김현식의 노래를 불러야 했다. 음색도 이미지도 비슷했던 그에게 많은 이가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갈채가 반갑지 않았다.

“형의 죽음을 딛고 서는 것 같아 싫었다”고 했다. 결국 그 해 연말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앞두고 김장훈은 잠적했다. 그 후 오랫동안 방송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상곡을 부르기로 했던 신인가수가 생방송을 펑크 낸 ‘괘씸죄’가 적용된 까닭이었다.

7년의 무명 시절을 보냈다.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뒤에도 꾸준히 열어 온 공연은 그를 알리는 또 다른 이름이 됐다. 네 번째 앨범을 냈을 때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나와 같다면’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등의 노래를 통해 그의 거친 목소리가 대중에게 어필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공연장에 관객 수도 늘어났죠. 어느 날 공연을 하다가 문득 ‘내가 없으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억하는 깊이는 달라지겠지만 세상은 잘 흘러갈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만일 관객이 없다면?’ 하고 생각했더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가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는 “대중가수는 그 운명을 대중이 결정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오랜 무명 시절을 보내고 얻은 깨달음은 그의 가수 인생을 관통하는 철학이 됐다.

지금까지 김장훈이 선 무대는 5000여 곳, 단독공연만 2000번 가까이 했다. 그의 공연은 상상치 못할 이벤트로 가득하다. 와이어를 달고 2층 관객석까지 날아가기도 하고 날개 위를 걷기도 한다. 드라마틱한 무대장치와 세심한 이벤트 연출로 ‘공연 관계자들이 뽑은 가수 1위’라는 명예로운 꼬리표를 얻었다.

2002년,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다. 공연 중 와이어가 끊어지는 사고로 무대에 추락해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은 것. 총 100일로 예정된 콘서트 일정 중 3분의 2가량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모든 이가 공연 취소를 기정사실화했고 그의 실패를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정확히 43일 만에 김장훈은 다시 무대에 올랐다. 어깨에 철심을 박고 깁스를 한 상태로 남은 34일간의 공연을 마무리했다.

“공연을 못하는 상태라는 걸 다 아는데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느냐”며 모두가 그를 말렸다. 하지만 “어깨가 부서진 것도 삶이고, 그 삶도 공연”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공연을 좋은 추억으로 마치고 싶었습니다. 그때 소원은 부서진 어깨뼈가 붙어서 마지막 날 깁스를 풀고 무대에 서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앙코르 곡으로 ‘my way’를 부르고 싶었어요.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그게 진짜 노래였을 거예요. ‘이것이 삶이고 이것이 노래다’ 보여줄 수 있었겠죠.”

노랠 부르고 춤을 추면서 웃고 또 울었던 어제 분칠을 하고 무대에 서면 사람들 웃음 짓네 내일도 이렇게 무대에
- 7집 수록곡 ‘광대’ 중에서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장훈 “네 삶의 무대에 서서 더 치열하게 노래하라”
더욱 치열해져라 극복하지 않은 행복은 불안이다

공연뿐 아니라 각종 봉사활동과 기부활동을 활발히 해온 사실이 알려지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에 독도를 알리는 광고를 싣고, 독도에서 선상 콘서트를 열며 ‘독도를 지키자’는 목소리를 냈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 때는 팬들을 모아 단체 봉사활동을 떠나기도 했다. 이제 김장훈 하면 ‘애국’ ‘봉사’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베풀고 나누는 삶을 통해 가수로서의 모습 외에 또 다른 목소리를 얻게 된 것이다.

“기부천사와 같은 별명이 부각되고, 사회 현상에 대해 발언한 내용이 연일 보도되면서 상대적으로 가수로서의 이름이 묻히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다”는 그다.

하지만 노래와 삶을 구분할 수 없음을 알게 된 뒤에는 세상을 향한 뜨거운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기로 결심했다.

“노래에 대해서는 아직도 갈증이 있습니다. 하지만 노래만 부르고 싶다고 세상의 부조리한 모습을 무시한다면 ‘진짜 노래’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결국은 노래도 세상 속에서 하는 것이니까요. 온몸으로 세상에 뛰어들고 거기서 생긴 생각을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 그것이 나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의 삶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쓰러질 때마다 일어섰던 과거는 “‘극복하는 습관’을 만들어준 것 같다”고 고백한다.

“‘인생은 가까이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을 좋아합니다. 제 삶에도 그 말을 항상 접목시키려 하죠. 지금 일어난 일이 비극처럼 느껴지더라도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변하면 별일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합니다.”

이 시대 대학생들에게도 위기를 극복하며 행복을 찾을 것을 강조했다. “요즘 대학생들 많이 힘들죠. 하지만 현재는 과정일 뿐, 목적지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힘든 오늘도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닌 과거로 느끼게 돼요. 그러니 당장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냥 얻어진 행복은 오히려 불안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해요. 어려움을 극복해 얻은 행복이 아니면 그 행복을 제대로 누릴 수 없죠.”


내가 눈을 떠야 세상이 있어
내가 찾아가야 인생이 있어

- 디지털 싱글 ‘소나기’ 중에서


그러나 사회가 정해놓은 행복의 틀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틀을 깨고 나와야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가는 길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행복의 틀일 뿐입니다. 전부 그렇게 살 수는 없는데 정해진 틀을 만들어놓고 그것이 행복이라고 조장하니까 모두가 불행해지는 게 아닐까요?”

사회가 만들어놓은 행복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더욱 치밀하게 목표를 찾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이들이 헤매는 이유는 제대로 된 목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목표를 찾으면 절반 이상은 이루는 겁니다. 목표가 정해지면 그 다음에는 그 길을 가면 됩니다. 단, 하고 싶은 일을 찾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더욱 괴롭혀야 할 거예요.”

치열하게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갈 것을 주문했다. “다른 어른들처럼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하는 얘기는 못하겠습니다. 젊었을 때는 실수도 하고 시행착오도 겪는 거죠. 젊을 때는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에 감사하기가 힘든데 그런 어려운 날들을 극복해야 행복이 온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지금의 불안을 넘길 수 있는 열정을 찾아가기 바랍니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김장훈 “네 삶의 무대에 서서 더 치열하게 노래하라”
가수 꿈 심어준 인생의 멘토 김현식

김장훈에게 ‘노래’라는 선물을 준 사람은 가수 김현식이다. 김현식은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등의 히트곡을 남긴 싱어송라이터다. 어머니들의 친분으로 어린 시절부터 김현식과 함께 자란 김장훈은 그를 친형처럼 따랐다. 김현식 역시 동생 김장훈에게 노래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사람’이라는 밴드 이름 역시 그가 지어준 것이다.

김현식은 1990년 11월 1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나던 날을 김장훈은 덤덤히 회상했다. “학교 축제가 열렸을 때 바둑대회에 나갔어요. 바둑을 잘 둬서 결승까지 올라갔죠. 결승전을 앞두고 집에 전화를 해서 어머니께 ‘별일 없지?’ 물었는데 어머니가 ‘응, 근데 현식이가 죽었다’ 그러시더라고요. 끝나고 현식이 형에게 갔더니… 정말 죽었더라고요.”

김장훈은 인생의 멘토를 잃은 상실감을 추모 공연으로 달랬다. 이듬해인 1991년 봄, 음반 기획사에서 그를 찾아왔다. 세상을 떠나기 전 김현식에게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음반을 내자고 했다. 음반 1장 계약에 계약금 600만 원과 인세 200만 원. 신인으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데뷔했다. 그에게 ‘가수’라는 꿈을 심어준 김현식은 세상을 떠나며 가수의 길도 열어준 셈이다.


경원대 영어영문학과 중퇴
데뷔 1991년
1집 늘 우리 사이엔(1991)
2집 이제야(1993)
3집 노래만 불렀지(1996)
4집 Ballads for tears(1998)
5집 바보(1999)
6집 Innocence(2000)
7집 Natural(2001)
8집 조각(2005)
9집 It’s me(2006)
김현식 헌정 앨범-레터 투 김현식(2010)
디지털 앨범, OST, 라이브 음반 등 발표
영화 ‘긴급조치19호’ ‘라디오스타’ 등 출연

2008년 한국방송대상 가수상
2009년 서울가요대상 공연문화상
2009년 대한민국 나눔대상 통일부장관상
2010년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나눔봉사 부문 등

글 김보람 기자 bramvo@hankyung.com

사진제공 하늘소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