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인생] '국민 의사' 이시형 “살아남으려면 열려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살기는 더 쉬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불안은 한겨울 녹지 않는 눈처럼 우리 가슴 깊숙한 곳에 쌓인다.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기대고 싶지만 이미 어른이 돼버린 자신에게 세상은 홀로서기를 요구한다. 그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이 말쑥한 정장 차림의 노 신사는 말한다. “세상은 원래 힘든 것이다.”

노 신사의 이름은 이시형. ‘국민 의사’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직업 앞에 ‘국민’이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커다란 영향력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가 국민을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국민 의사’로 만든 것일까? 그리고 ‘국민 의사’가 되기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예일대 박사’라는 화려한 이력 속에 감춰진 그의 회한과 후회, 기쁨과 행복을 그가 그려온 인생 궤적을 따라 하나씩 좇아가 봤다.

세상을 바라보는 냉철한 시선, 77년 세월의 질곡, 그리고 온화한 미소 속의 행복. ‘국민 의사’ 이시형 박사에게 받은 첫 느낌이다. 이 박사는 193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아래 어려운 시절을 몸소 체험했을 터. 유년 시절에 대해 물어봤다.

“신발 한 켤레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축구를 할 때 고무신에 끈을 묶어서 할 정도였어요. 도시락을 쌀 형편도 안 됐고요. 친한 짝꿍이 있었는데 그 녀석도 가난해서 우리 둘은 점심시간이 되면 수도 펌프 물로 배를 채우고 잔디밭에 누워 있었죠.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절대로 배는 굶지 말자고 했던 것 같아요.”
[나의 꿈 나의 인생] '국민 의사' 이시형 “살아남으려면 열려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때의 맹세가 이뤄진 것일까? 그는 자신이 얻고 있는 국민적 인기만큼 넉넉한 삶을 살고 있다. 그가 설립한 세로토닌 문화원도, 힐리언스 선마을도 모두 자신의 돈으로 만든 작품이다. 배고픈 어린 시절을 보낸 그였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풍요로운 정신을 위해 혼신을 다하고 있다. 문득 궁금했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그 친구는 사범대를 갔어요. 내가 미국에서 돌아오니까 그 친구는 대구에서 제일 유명한 수학 강사가 돼 있었죠. 때마침 일어난 학원 붐에 상당히 많은 돈을 벌었는데, 덕분에 그 친구를 만날 때는 돼지갈비며 소주며 많이 얻어먹을 수 있었어요. 말하자면 먹는 것으로 한풀이를 한 거죠.”

하지만 그 친구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다. 간암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강사라는 직업은 그 당시에도 굉장히 고단한 것이었다. 누군가 대신해줄 수 있는 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없이 밀려드는 강의와 그에 뒤따라오는 스트레스. 이 박사는 평생을 함께하리라 다짐했던 그 친구를 그렇게 보냈다.

“이 녀석이 어느 날 얼굴이 굉장히 노랬어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진찰해보니 ‘간암 말기’ 판정이 나온 겁니다. 결국은 입원하고 석 달 만에 작고했는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내가 이 녀석에게 생활을 좀 다듬으라고 얘기했으면 좋았을걸’ 하고 아직도 후회합니다.”

떠나보낸 친구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그는 현재 누구보다 사람들의 건강을 위해 힘쓰고 있다. 61권에 이르는 저서는 그 노력의 일부분이다. 특히 작년 발표한 ‘세로토닌하라’와 ‘행복한 독종’은 2010년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풍요와 여유의 중요성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국민 의사' 이시형 “살아남으려면 열려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유년 시절을 추억하며 그는 이웃나라 일본의 한 인물을 꺼냈다.

“중학교 때부터 나의 우상은 사카모토 료마라는 사무라이였습니다. 지금도 내 서재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사진이 있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그를 생각하면 잠깐의 흔들림도 바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는 ‘간사한 관리를 물리쳐 일본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근대 일본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 일본에서는 그를 국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 뭔가 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 생각의 바탕은 바로 ‘애국심’이죠.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서 그 애국심을 발현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이 되든 국가와 국민을 위해야겠다는 것이었죠.”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길은 의사. 문득 그가 의학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대대로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에는 사범대를 지망했다고 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현실이 그의 미래를 바꿔놓았다.

“의사 집안 아들은 밥을 굶지 않더군요. 옷도 반듯하게 잘 입고 다녔죠. 도시락 반찬으로 달걀을 가져오기도 했었어요.”

그렇게 시작해 딱 열흘 공부하고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물론 짧은 기간 열심히 준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운이 따랐던 결과이기도 했다. 당시 피난 다니느라 다른 지역 학생들이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인 대구는 피난 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입학한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 어려운 경제 사정에 흔치 않던 미국 유학이었지만 그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끈 것은 유년 시절의 경험 때문이었다.

이 박사는 고등학교 시절 아르바이트로 하우스보이(미군 부대에서 심부름하는 일)를 했는데, 영어를 잘한 덕분에 SG(Special Guard·경호 경비 담당)로 진급할 수 있었다. 비행장 외곽 경비를 섰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유도등 달린 지붕 밑에서 잠시 쉬고 있다가 순찰하던 미군에게 걸려 회초리로 수도 없이 맞았다고 한다.

“울며 집에 들어왔는데 너무 화가 났어요. 그때 우리 집에 서울 상대를 다니는 형이 잠시 피난을 내려왔었는데 그 형을 붙들고 하소연했죠. 그랬더니 그 형이 ‘그 원수를 갚으려면 예일대나 하버드대를 가라. 가서 성공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더군요. 당시 나는 경북대가 세계에서 최고인 줄 알았어요. 서울대가 유명한지도 몰랐습니다.”

그때의 한마디가 이 박사를 미국으로 이끌었다. 미국에서 그가 선택했던 전공은 정신과. 당시 흔치 않았던 정신과를 택한 것은 고국에 대한 마음 때문이었다.

“정신과와 성형외과 사이에서 고민했어요. 내 손재주를 눈여겨본 성형외과 주임교수가 성형외과를 추천했었죠. 하지만 난 정신과를 택했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된다면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는 남과 북의 사람들이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 것인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이 박사는 지금까지 5년마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회 정신과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로 주제를 잡아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 5년간의 숙제는 ‘어떻게 하면 세로토닌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다.

성공의 개념 바뀌어야

세로토닌은 3가지 중요한 기능이 있는 신경전달물질이다. 첫째 폭력과 파괴를 일으키는 공격성 물질인 노르아드레날린과 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엔도르핀의 활동을 조절하는 기능, 둘째 주의집중 및 기억력을 향상시켜 업무 능률 및 창조성을 올리는 기능, 셋째 생기와 의욕을 불러일으켜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하는 행복 기능이 그것이다.

산업사회 시절 앞만 보고 달리던 때에는 노르아드레날린과 엔도르핀이 플러스 기능을 했지만, 품격 있는 선진국으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것들을 조절할 수 있는 세로토닌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젊은이들이 가고 싶은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죠. 경쟁을 헤쳐 나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에요.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멈춰서는 안 되죠.”

그는 “공부는 평생 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취업을 했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새로운 분야를 개발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성공이라는 개념도 바꿀 필요가 있다고 했다. 기존 사회가 말하는 성공이 부와 명예와 권력의 또 다른 말이었다면 세로토닌 시대에는 ‘적성에 맞춰 직업을 잡아 일을 하고, 고맙게도 그 일을 통해서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성공’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두뇌’입니다. 서비스 산업 시대로 들어온 지금, 두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지금까지 앞을 향해 달려왔지만 이제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옆을 둘러보고 이웃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성공의 의미가 이렇게 바뀔 때 사람과 사회와 나라가 행복하고 건강해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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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가지지 않아도 된다

사회의 어른으로서 젊은 세대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몸짱’이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 청년들이 육체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많이 뒤떨어진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정신이 굉장히 불균형하게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도전 정신이나 성적(性的)인 측면에서는 경제 발달과 문화 개방에 맞춰 발달했지만 인격적으로는 상당히 미숙하죠. 요즘 기본적인 예의를 갖추지 않은 젊은이들을 많이 목격하게 됩니다.”

그가 말한 ‘기본적인 예의’란 책임 의식과 관련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대한 소명감 결여가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예의’의 부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요즘 대기업의 연수 과정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싼 돈을 들여 ‘인사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어요. 가정과 학교에서 ‘성공을 위한 경쟁’만을 가르친 결과입니다. 남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하다 보니 인성 측면이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공은 자연스레 따라오겠죠.”

덧붙여 열린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꿈을 가지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꿈이라는 것은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실제로 미국 사회처럼 역동적이고 다변화하는 사회에서는 그 사람의 인생 방향이 30대 후반에 결정됩니다. 그 정도 나이가 돼야 자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죠.

너무 어린 나이에 자신의 길을 정해버리면 시야가 좁아져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밥을 먹을 수 있으려면 열려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나의 꿈 나의 인생] '국민 의사' 이시형 “살아남으려면 열려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좋아하는 일로 밥 먹을 수 있다면 행복해

지금까지의 삶에서 후회되는 일은 없었을까? 가난은 성공한 의사로 우뚝 선 지금도 가장 아쉬운 기억 중 하나라고 한다.

“‘돈이 많았으면 좋았을걸’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수학여행도 다녀오지 못했으니까요. 대학 다닐 때 미팅 같은 것도 해본 적이 없어요. 이런 것들이 정말 아쉽긴 하지만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에 지금 작은 일에도 만족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 마지막 질문은 “행복하신가?”였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행복합니다.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며칠 전 서울사이버대에서 강연을 했는데 그 추운 강당에 300명의 학생이 입추의 여지없이 몰렸어요. 강연이 끝나고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줬습니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보람차고 행복한 일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것으로 밥만 먹을 수 있다면 계속 행복할 것 같습니다.”


‘국민 의사’ 이시형

정신과 의사
현 세로토닌 문화원 원장, 자연의학종합연구원 원장, 힐리언스 선마을 촌장, 서울사이버대 석좌교수
1934년 4월 30일 대구 출생
1959년 경북대 의과대학 졸업
1966~1968년 예일대 정신과 P.D.F.
1970~1975년 경북대 의과대학 정신과 주임교수
1976~2000년 강북삼성병원 정신과
1991~1994년 강북삼성병원 원장
1996~1999년 성균관대 의과대학 교수
2002년 한국정신의학연구재단 이사장
2005~현재 한국자연의학종합연구원 원장
2007~현재 생명보험 사회공헌재단 이사장
2009~현재 서울사이버대 석좌교수
2009~현재 사단법인 세로토닌문화 이사장
2009~현재 사단법인 한국산림치유포럼 회장

저서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중앙북스, 2009)
세로토닌하라(중앙북스, 2010)
행복한 독종(리더스북, 2010) 등 61권


글 양충모 기자 gaddjun@hankyung.com/@herejun(Twitter)
사진 김기남 기자 kn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