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 전공자 취업 현실

최근 대학 4학년생들 사이에서 ‘新 카스트제도’가 돌고 있다.
취업률을 기준으로 신분 등급을 매기는 것인데 ‘문과 여학생’이 바로 천민이란다. 귀족 등급은 이공계다. 그중에서도 잘 나간다는 ‘전·화·기’(전기전자·화학·기계) 전공자는 왕족이라고.
[인문계 전공자 서바이벌 전략] ‘新 카스트’에 속 타는 문·사·철
“학문관 소극장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난 4월 2일, 서울 이화여대 교정에서 연신 남학생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들은 이날 열린 롯데그룹의 상반기 채용설명회에 참여하러 온 구직자들이었다.

지방대에 다니다 취업을 위해 서울역 근처의 한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는 김원중(문헌정보학 전공·28) 씨는 “남성이 취업시장에서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인문계열은 예외”라며 “여대에서 하는 행사라 걱정했는데 남학생들도 많이 와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인문·상경계열 vs 공학계열 취업률 17%p 차이
인문계열의 취업난은 통계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교육부가 지난 2013년 8월 발표한 ‘2013년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건강보험 DB연계 취업통계’에 따르면 인문·사회계열(교육·예체능계열 제외) 졸업자의 평균 취업률은 50%로 공학계열 67.4%에 비해 17%포인트나 낮았다.

이 중 취업률이 가장 낮은 전공은 법학이었다. 법학의 취업률은 40.2%로 경영학(59.2%)과는 19%포인트의 차이가 났다. 이는 지난 2008년 로스쿨 설립 이후 사법고시의 존립이 불투명해지면서 기존 법대생들의 진로가 크게 좁아진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어문계열에서는 국문학과의 취업률이 41.2%로 가장 낮았다. 프랑스어(46.6%), 영어(46.9%) 전공 졸업생의 취업률도 낮은 편이었다. 그나마 중국어, 일본어를 제외한 기타 아시아어 전공자의 취업률은 56.8%로 높은 편이다.
[인문계 전공자 서바이벌 전략] ‘新 카스트’에 속 타는 문·사·철
인문계 뽑는 대신 ‘상시채용’, ‘산학인턴’ 활용
채용 시즌이 본격화되면서 기업들의 인문계 기피 현상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매년 상반기 100여 명을 채용해왔던 삼성엔지니어링은 이번에 인문계열을 채용하지 않는다. 삼성SDI도 이번 상반기에 연구개발과 기술직만 채용한다. 이 회사는 지난해 같은 시기 경영지원과 영업직에 신입사원을 채용한 바 있다.

지난 3월 7일 현대차는 올해부터 상반기 공채에서 인문계열 전공자를 뽑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전체 신입사원 중 30%에 불과한 인문계 전공자가 매번 공채에 과도하게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는 게 이유였다. 대신 상시채용을 통해 이들을 수용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채용 규모가 예년 수준을 기록할지는 미지수다. 기아차도 같은 이유로 채용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상반기를 택해 올해부터 상시채용으로 전환한다.

여기에 모집 전공에 제약이 없는 금융권이 이번 상반기 채용 규모를 대폭 축소하겠다고 밝히면서 인문계 채용은 더욱 ‘바늘귀’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상·하반기 두 차례에 걸쳐 450명을 채용했던 기업은행은 올해는 상반기 채용을 없애고 하반기 공채에서 200명을 뽑겠다고 말했다. 작년의 절반 이하 규모다. 하나은행도 올해는 200명에서 100명대로 줄인다. 우리은행은 상반기 채용에 대해 아직 말을 아끼고 있는 상태다.

정규직 공채 대신 산학인턴을 도입하고 이공계열만 채용하는 곳도 늘었다. 지난 2013년 상반기 트레이딩(trading)과 경영기획 부문에 인문계열 정규직 사원을 뽑았던 GS칼텍스는 이번에는 엔지니어 산학인턴을 통해 화학공학, 전기전자공학 등 이공계열만 채용하기로 했다. 현대건설도 올 상반기에는 석사 학위 이상 연구개발 인력만 채용한다.


‘융합형 인재’는 인문학 소양 갖춘 이공계 전공자?
이처럼 기업이 인문계 채용에 소극적인 데는 ‘장기화된 경기불황’의 영향이 가장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매출 저조로 신규 채용에 부담을 느낀 기업들이 당장 기술개발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이공계열을 중심으로 뽑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지난 2월 초, 한 대기업 임원은 ‘요즘 상황이 안 좋으니 올해는 상반기 공채를 건너뛰자’는 의견을 냈다. 채용팀은 고심 끝에 이미 인력을 확보해 놓은 ‘경영지원’ 직군의 채용을 보류하기로 했다.

인문계열 전공자의 업무가 별다른 기술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채용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 대기업 채용팀 관계자는 “최근에는 마케팅이나 기획실 등 경영지원 부서에도 인문·상경계열 대신 제품이나 기술에 대해 잘 아는 이공계 출신을 뽑아 인문학 소양을 가르치는 추세”라며 “기업들은 이공계열 전공자에게 인문학 역량을 더하는 것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기업이 말하는 ‘융합형 인재’란 ‘인문학 소양을 갖춘 이공계 전공자’라는 것이다.

최경희 링크스타트 대표는 “관리자가 됐을 때 회사의 기술에 대해 잘 알아야 부서에 상관없이 지시할 수 있기 때문에 전문지식이 필요한 이공계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인문계 전공자 서바이벌 전략] ‘新 카스트’에 속 타는 문·사·철
MINI INTERVIEW 김종필 건국대학교 인재개발센터장

“수학이 직업 결정하는 교육구조 개선해야”
건국대는 매년 전체 입학생 3000명 중 이공계를 제외한 인문계, 예체능계열 전공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김종필 건국대 인재개발센터장은 “순수문학 전공자들이 아예 대기업 취업을 포기한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건국대의 전공별 취업률은 어떠한가
최근 3년간 취업률을 기준으로 했을 때 흔히 ‘문과’라고 말하는 사학, 철학 등 전공은 40%를 넘기가 힘들다. 그나마 사회계열에서 경영학, 경제학 전공이 65~70%로 인문계열 중에선 가장 높은 편이다. 이에 비해 공학계열은 75~80%에 달한다. 물리, 화학 등 순수자연계열은 45~50%, 응용 쪽은 조금 높은 60% 내외다.


공대 입시 경쟁률도 높아지는 추세인가
그렇진 않다. 이 같은 불일치의 원인은 고등학교 교육의 문·이과 구조에 있다. 문·이과는 대부분 수학을 기준으로 나눈다. 아무리 과학적 탐구능력이 뛰어나도 수학을 못하면 문과를 택한다. 대학들도 입시 기준으로 수학을 활용하다 보니 문과 중에서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들은 경영이나 경제학을 택하고 나머지는 순수인문학 쪽으로 빠진다. 결국 수학이 학생들의 진로를 결정하는 셈이다.


기업이 이공계를 많이 뽑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우선 제조업 기반의 산업 구조 때문이다. 메인 사업에 투입할 이공계열을 뽑아 놓고 마케팅이나 기획은 이들에게 인문계 소양을 가르쳐서 병행하도록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기업의 직급 체계다. 많은 기업이 직급이 높아질수록 인원이 적어지는 피라미드 구조를 활용하는데, 이처럼 관리자 수를 줄이는 데는 이공계열이 적합하다.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후배들이 올라오기 때문에 순환이 빠르다.


글 이도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