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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 홍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서수인(가명·25) 씨.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를 만큼 바쁘게 생활하고 있는 2년차 직장인이다. 군대 갔다 온 남자 동기들이 아직도 학생 신분인 걸 감안하면 ‘잘나간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친구들 사이에선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대학 시절을 돌이켜봐도 각종 대외활동, 봉사활동, 학점 관리, 어학 점수 등 4년 내내 누구보다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자부한다.

벚꽃 잎이 흩날리기 시작하는 4월이면 캠퍼스의 낭만과 자유로움이 문득문득 그리워진다는 서 씨. 하지만 3년 전 그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저절로 진저리를 치게 된다. 대학생이 된 후 세 번째 맞았던 축제. 과 친구들이 문을 연 주점에서 A 교수와 합석한 게 화근이었다. 몇 년 전 이혼해 혼자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A 교수. 수업 시간에도 유독 여학생들을 편애하고, 심지어 성적인 농담도 종종 내뱉어 눈총을 받던 인물이었다.

과 주점에서 제자들과 어울려 술잔을 돌리던 A 교수는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서 씨에게 뜻밖의 제안을 꺼냈다. “내 연구실에 좋은 CD가 있는데, 가서 함께 듣자”는 것. 갑작스럽고 생뚱맞은 제안에 당황해한 건 그녀나 주변 친구들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장 전공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 신분으로 ‘교수님’의 청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A 교수를 따라간 그녀를 위해 남자 동기 몇 명이 몰래 뒤를 따랐다.
캠퍼스 내 성폭력 비상 “No!” 단호하게 거부 의사 밝혀라
캠퍼스 내 성폭력 사례 급증

이윽고 들어간 교수 연구실. 음악을 켠 교수는 차 한 잔을 권했고, 몇 마디 대화가 오가다 갑자기 서 씨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황급히 연구실을 박차고 나온 서 씨.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걱정하며 문밖에 대기했던 동기들이 그녀를 에스코트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서 씨를 따라나왔던 A 교수는 남학생들을 보자 급히 문을 닫고 다시 연구실로 들어갔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친구들 사이에선 ‘대자보를 붙이자’ ‘성추행으로 고소하자’ 등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피해자인 서 씨가 더 이상 일이 커지거나 A 교수가 처벌받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 부적절한 사건에 휘말리며 이름이 알려지기도 싫었고, 당장 학점을 받아야 하는 ‘약자’ 처지에서 해볼 수 있는 대응도 별다를 것 없는 게 사실이었다. 얼른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남자 동기들이 보호해준 덕분에 다행히 불미스러운 일이 커지지 않았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김두나 활동가는 “성폭력을 남성의 성충동 때문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말한다. 교수나 교직원, 선배 등은 피해자의 진로, 미래, 생활, 학점 등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들이다. 바꿔 말하면 문제가 생겨도 공론화하기 어려운 구조라는 뜻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2년 상담 사례 통계를 봐도 대학 내 성폭력 문제가 생각 밖으로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피해 연령별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통계를 보면 20세 이상 성인 중 ‘학교’ 안에서 ‘아는 사람’에게 피해를 봤다는 비중이 전체 상담 사례의 8.2%를 차지했다.

20세 이상 성인 중 ‘직장 내 아는 사람(28.5%)’과 ‘모르는 사람(12.0%)’에 이어 학내 피해 사례가 세 번째로 많다는 뜻이다. 연령 범위를 청소년(14~19세)까지 넓히면 학교 내 피해 사례가 21.4%까지 치솟는다.

앞서 언급했듯 캠퍼스 내 성폭력은 ‘문화’와 관련이 깊다. 예를 들어 성적인 농담을 즐기거나 외모 품평하길 즐기는 교수들을 종종 볼 수 있는 게 사실. 이런 경우 계획했든 우발적이든 성폭력 가해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게 전문가의 말이다.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교수 말고도 또래 간 성폭력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남녀공학이 대다수인 대학의 특성상 아직까지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게 현실. 물리적으로 남학생 수가 많기도 하고 군대 문화, 선후배 간 서열 문화 등은 성폭력을 유발할 수 있는 여지를 크게 한다. 특히 학기 초 MT나 OT, 개강파티 등 술자리가 잦아지면서 성희롱·성추행 사건은 크게 늘어난다. 성인이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성폭력 예방 교육조차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보니 성폭력을 성폭력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가해자도 많다.
캠퍼스 내 성폭력 비상 “No!” 단호하게 거부 의사 밝혀라
평소 대응방법 ‘시뮬레이션’ 해봐야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성추행이나 성희롱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불쾌하다”거나 “그만해달라”고 즉석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다. 이럴 때는 차후 대응을 위해서라도 주변의 목격자 진술을 확보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혼자 힘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어려울 경우 공동 대응을 위해서다.

‘그런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다’는 막연한 불감증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2년 전체 성폭력 상담 사례 중 ‘아는 사람’이 가해자인 경우가 무려 83.2%를 차지했다. 학교, 그중에서도 남녀공학이 대부분인 대학 캠퍼스는 그만큼 친근하면서도 위험한 공간으로 돌변하기 쉽다. 남의 일이 아닌 ‘내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평소 마음가짐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김두나 활동가는 평소 ‘시뮬레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내가 성폭력의 피해자라면, 내가 이러저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보자는 얘기다. ‘교수님이 회식 자리에서 다리를 만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본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실제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대응력은 엄청난 차이라는 게 전문가의 말이다.

대다수의 피해자가 여학생인 걸 감안하면 거부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거나 화를 내는 것조차 익숙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상대가 ‘괴성’이라고 느낄 정도로 무섭게 소리를 지르는 등의 방법은 미리 상상하고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켜 놓지 못할 경우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어렵다.

내가 당하진 않았지만 주변의 친구에게 불상사가 생길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생각보다 피해자 편에 서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놀라게 될 확률이 크다. 학교 당국은 교수나 선배 등 가해자 입장에서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덮으려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피해자는 ‘원래 행실이 좋지 않았다’거나 ‘둘이 원래 그런 사이였다’는 등의 악소문으로 2차 피해를 입는다.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K대 의대생 성폭행 사건’도 “형사재판 결과를 보고 징계를 결정하겠다”는 게 학교의 입장이었다.

피해자의 친구 입장에선 일단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지지자가 돼주는 게 우선이다. 이후 다양한 해결 방법을 함께 모색한다. 때론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누구의 편을 든다기보다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범죄 여부를 인식하고, 가해자에게 이 점을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강간’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면…

강간 등 가해자의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성폭행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병원’에 가는 것이다. 상해를 입은 신체를 치료하는 목적 외에 중요한 것이 바로 ‘증거 수집’이다. 특히 사건 발생 직후 씻지 않은 상태로 병원에 가야 증거 확보가 쉽다. 경찰병원, 보라매병원 등 전국에 개설된 ‘여성 학교폭력 피해자 원스톱 지원센터’에서 피해자에 대한 상담, 수사, 의료, 법률 지원을 24시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캠퍼스 내 성폭력 비상 “No!” 단호하게 거부 의사 밝혀라
글 장진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