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동행 체험

수많은 이의 갈채를 받는 꿈의 직업.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전문직 종사자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남몰래 흘린 땀의 양은 겪어보지 않고는 쉽게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잔잔해 보이는 수면 아래로 발버둥치고 있는 백조의 비밀. 그들의 생활을 상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일일 동행 취재를 제안했다.

그 두 번째 순서는 프라이빗뱅커(PB)다.
PB(Private Banker) ‘슈퍼리치’ 밀착 마크하는 만능 금융인
프라이빗뱅커(PB).고액 자산가의 재산을 관리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일반 은행 거래와는 달리 은행 업무는 물론 부동산투자·증권투자·세무·법률 등 종합적인 자산운용 서비스를 제공한다. 최근 금융계에서 고액 자산가들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은행뿐 아니라 증권사, 보험사 등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단골 우량고객 확보를 위해 PB를 운영하고 있다.

부자들만을 상대한다는 측면에서 PB는 언뜻 화려해 보인다. 비밀스러운 상담실에서 푹신한 소파에 슈퍼리치와 마주 앉아 일반인은 꿈도 못 꾸는 거액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굳이 비유하자면 아름답고 도도한 페르시아 고양이 같은 느낌이랄까.

지난 12월 3일 PB의 하루를 체험하기 위해 서울 대치동에 위치한 KB국민은행 대치PB센터를 찾았다. 들어가면서부터 일반 은행 지점과는 다른 럭셔리한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다시 한 번 ‘페르시아 고양이’가 떠오른다.

“내부 장식이 멋있죠? 아무래도 고액 자산가들의 수준과 취향에 맞춰야 하니까요. 최근에 생기는 PB센터들은 훨씬 화려하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건 PB의 겉모습일 뿐입니다.”

이른 아침임에도 말쑥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기자를 맞이한 이는 신동일 팀장이다. 국민은행 내 최고의 포상인 ‘국은인상’을 최초로 두 번 수상하고, 언론사에서 뽑은 ‘베스트 PB’에 선정될 만큼 은행 안팎으로 인정받고 있는 PB다. 최근에는 직접 부자 고객을 상대하면서 배운 노하우를 모아 ‘슈퍼리치의 습관’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05:00

잠깐 상담실에 마주 앉아 신 팀장의 아침 일정을 물었다. 그의 기상 시간은 5시다. 일어나자마자 시차가 다른 해외시장 동향을 체크하고, 조간신문을 훑는다. 간밤에 있었던 미국 등 주요 국가의 경제 관련 기사를 꼼꼼히 점검한다. 그는 “PB는 누구보다 금융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직종”이라며 “고액 자산가들은 워낙 많은 정보를 갖고 공부도 많이 하기 때문에 고객보다 10cm라도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PB(Private Banker) ‘슈퍼리치’ 밀착 마크하는 만능 금융인
08:00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면 PB센터에 도착한다. 오전 8시 30분, 신 팀장은 PB가 ‘진짜’ 일하는 곳이라며 센터 뒤편에 위치한 PB실로 안내했다. PB실은 PB들이 고객을 만나기 전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등 일반적인 업무를 보는 곳이다. 고객과 만나는 공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비교적 좁은 공간에 각자의 자리가 있고 군데군데 잡동사니가 쌓여 있다. 보통의 사무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신 팀장은 잠깐 할 일이 있다며 컴퓨터를 켰다. 화면을 보니 금융 관련 퀴즈를 푼다.



08:30

“매주 월요일 오전 8시 30분이면 온라인상으로 시장 전망과 금융 상품에 대한 시험을 봐요. 주말에도 공부해야 하죠. PB는 금융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거든요. 시험이 없는 날 아침에는 컨퍼런스콜을 하거나 내부 회의를 합니다.”

문제를 푸는 와중에 전화가 온다. 수화기 너머로 고객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11시쯤 가도 될까요? 전에 말씀 드린 비과세 상품에 대해서 상담을 하고 싶어서요. 그리고 그거 말고 1억 정도 더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09:00

오전 9시, 신 팀장의 손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고객에게 제공할 자료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PB의 업무는 일괄적인 매뉴얼보다는 고객 맞춤형 서비스에 가깝다. 고객마다 투자 성향이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자산 구성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고객과 오랜 상담을 통해서 성향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자산 구성을 제안하는 것이 PB의 일이다.



09:30

오전 9시 30분 첫 상담 고객이 찾아왔다. 아쉽게도 상담에는 동석할 수 없었다. 자산운용 상담 내용에 대해서는 외부로 노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신 팀장은 그저 “자산 승계와 관련해서 상속·증여 상담을 하러 오신 분”이라고 넌지시 말했다.
PB(Private Banker) ‘슈퍼리치’ 밀착 마크하는 만능 금융인
끝없는 자기 계발로 고객 수준 맞춰야

PB가 고액 자산가를 직접 만나는 접점이긴 하지만 모든 일을 혼자 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각 기관마다 어드바이저리(advisory) 조직이 있다. 이곳에서 고액 자산가를 위한 상품을 개발하고 부동산·세무·법률·증시 등 각 분야의 정보를 종합해 PB에게 제공한다. 때로는 PB가 고객과의 상담 내용을 바탕으로 자산운용사의 상품개발자와 상품을 만들기도 한다.

또 각 PB센터에는 Pre-PB라고 하는 일종의 주니어PB가 다른 PB 팀장의 상담 업무를 지원하거나 서류 및 창구 업무를 담당한다. 주니어라고는 하지만 이들 역시 지점의 VIP 창구에서 5년 이상 경력을 쌓고 각 금융기관 내 PB 공모 시험을 통해 뽑힌 인재들이다. 국제재무설계사(CFP), 개인종합재무설계사(AFPK), 자산관리사(FP) 및 보험 관련 자격증도 기본으로 소지하고 있다.
PB(Private Banker) ‘슈퍼리치’ 밀착 마크하는 만능 금융인
Pre-PB는 업무 지원을 통해 PB의 ‘기본기’를 익힌다. 2~3년의 경력이 쌓이면 PB 팀장이 돼 본격적인 고객 상담에 투입된다.

PB 팀장이 됐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보수 교육이 필요하다. 신 팀장 역시 주말을 이용해 서울대 은퇴설계전문가 과정을 공부한다.

PB에게 이처럼 많은 경력이 필요한 것은 다양한 분야를 커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PB는 지난 10여 년간 다양한 서비스로 발전했다. 은행·증권·보험의 PB센터는 고객의 자산을 불려주는 금융 투자 관련 서비스는 물론이고 세무·법률 등 재테크 전반에 대해 조언해주는 수준까지 왔다. 요 몇 년 사이에는 미술품 감정, 골프 레슨 등 문화생활을 넘어 자녀의 맞선을 주선해주는 등 고객의 개인적이고 독특한 입맛까지 만족시키는 맞춤형 서비스로 진화했다.

PB는 개인의 능력이 중요하다. 자산가를 밀착 마크하며 재테크의 영역이건 사생활이건 간에 홀로 모든 것을 척척 해내는 ‘슈퍼맨’이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경험 있고 노련한 PB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만큼 얻을 수 있는 것도 많다. 장명화 KB국민은행 대치PB센터장은 “금융이 세분화되면서 정교하고 복잡한 일을 위한 자질이 중요해지고 있다”며 “그런 면에서 PB가 갖는 전문성은 앞으로 더 각광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PB 시장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금융권, 특히 은행 내부에서는 고액 자산가들을 상대한 경험이 풍부한 ‘PB센터장’ 출신들이 소속 요직을 꿰차고 있다. 부자 고객들을 상대하면서 얻은 노하우와 경험, 풍부한 네트워크가 이들의 핵심 경쟁력으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PB의 전화는 24시 대기 중
PB(Private Banker) ‘슈퍼리치’ 밀착 마크하는 만능 금융인
12:00

정오가 되자 두 건의 상담을 끝낸 신 팀장이 돌아왔다. 손에는 서류가 한가득하다. 상담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내외지만 복잡한 서류 작업까지 하다 보면 시간이 길어지기 일쑤다. 보통 미리 약속을 하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갑작스레 방문하는 고객도 많다. 하루에 만나는 고객 수는 1~5명 정도다.

“대하는 고객의 수가 적어서 편하지 않겠느냐고 많이들 생각해요. 그런데 워낙 금액이 크고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아서 힘들어요. 또 ‘슈퍼리치’가 된 사람들은 그만큼 더 꼼꼼하기 때문에 세세하게 따져야 할 것도 많고요.”

오전 상담이 끝나고 점심 식사를 한다. 이날은 약속을 잡지 않았지만 보통 고객과 점심을 할 때가 많다. 식사도 상담의 연장선이 되는 셈이다. 상담은 PB센터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고객 중에는 거동이 불편하거나 시간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서 상담을 하기도 한다.

점심을 마칠 때쯤 한 고객에게서 전화가 왔다. 신 팀장은 한참 통화한 후 상담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한밤중이나 새벽에 전화가 올 때도 있습니다. 고액 자산가 중에는 해외에 있는 분이나 바쁜 분이 많거든요. 자산관리라는 게 타이밍도 중요하고요. PB의 전화는 24시 오픈이에요.”



17:00

점심을 마치고 다시 상담이 시작된다. 오후 5시, PB센터의 문이 닫힌 이후까지 상담은 계속 이어졌다. 이날 신 팀장이 만난 고객은 6명. 연말이라 주로 절세와 관련된 상담이 많았다고 전했다.



18:00

오후 6시, 상담은 끝났지만 업무는 아직 남았다. 신 팀장은 상담에서 나온 거래나 계약에 대한 서류 작업을 마무리하고 퇴근해야겠다며 기자를 먼저 돌려보냈다. 몸에 밴 몸짓으로 문 앞까지 나와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뒤돌아 바쁜 걸음으로 PB실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 기자의 머릿속에서 PB와 도도하기만 한 페르시아 고양이의 이음새는 사라졌다.



글 함승민 기자│사진 서범세 기자│취재협조 KB국민은행 대치PB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