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의 안식처가 된 종로, 거리에서 들어본 그들의 이야기
[우리도 언젠가 노인이 된다①]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창피스러워서..." 디지털 시대 속 설 자리를 잃은 노인들[우리도 언젠가 노인이 된다②] ‘80세 평균 연 수입 800만원’ 돈 없는 고령층, 종로로 모이는 까닭은?
[한경잡앤조이=강홍민 기자/이아연 대학생 기자] 누구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노인들, 갈 곳 없고, 시간을 함께 즐길 이들이 없는 그들은 노인들의 놀이터라 불리는 종로 ‘탑골 공원’에 모인다. 탑골공원 주변에는 무료 급식소를 비롯해 저렴한 음식점·술집·이발소 등 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곳들이 즐비하다. 또한 탑골 공원 옆 낙원 악기 상가 공터에서는 낮 동안 여기저기 장기판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사계절 내내 매일 장기를 두는 이들과 훈수 두는 노인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장기 둘 사람 기다리고 있어요. 여기서 장기 두고 있는 사람들 다 집 있는 사람들이에요. 집에 말동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종로에서 장기판을 지켜보고 있던 이기주(80·가명)씨는 기초생활수급자라 일을 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고 씨는 수급자가 되기 전에는 주민 센터에서 한 달에 열흘씩 일하고 27만 원을 받았다. 2년 동안 했던 일은 올해 6월부터 수급자가 된 이후로 할 수 없게 됐다. 수급료에서 버는 돈 만큼 깎이기 때문이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고 씨는 개인적인 이야기도 꺼냈다. 함께 시간을 보낼 말동무가 필요한 노인들은 하는 일 없이 앉아 장기판을 구경하다가도 말을 걸면 그들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냈다.
조규순(74·서울 은평구)씨는 실업급여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전 8시에 나와 무료 급식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먹고 오후 6시 해가질 때까지 다른 노인들과 장기를 두며 하루를 보낸다. 그는 “집에 있는 것보다 종로에 나와 있는 게 근심도 없고 몸이 안 아파서 좋다”며 종로에서 ‘세월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 오면 사고 난 거야. 자주 오니까 얼굴 낯익은 사람도 많고 여기서 친해지는 거지” 이곳 종로에 모이는 노인들은 짧으면 5년, 길면 10~15년 동안 거의 매일 종로에서 하루를 보냈다. 서로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지만, 안부를 물어가며 그들끼리 하나의 작은 사회를 구성해 살아가고 있다.
종로3가역 앞으로 이어지는 노인들의 거리는 접근성이 뛰어나 그들이 찾기 편하다. 이기필(75)씨는 “종로3가역에서 3, 4번 출구로 나오는 사람의 반이 노인”이라며 말했다. 그들이 종로로 모이는 이유는 또 있었다. 오후 5시가 되면 펼쳐지는 포장마차, 나이도 이름도 모르지만 소주 한 잔에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노인들이 모이는 이유다. 해가 지면 모이는 노인들, 외로움 벗어나기 위해 찾는 종로 포장마차
5시가 되면 종로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종로3가역 앞 익선동으로 이어지는 거리와 큰 도로에 포장마차들이 하나 둘 씩 불빛을 켜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종로 포장마차에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는 노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술집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다. 이곳에서 일주일에 4~5번은 포장마차를 이용한다는 이 모(남·68)씨를 만났다. 장기로 술값 내기를 한 이 씨는 종로의 지인들 사이에서 ‘장기왕’으로 통한다. 그는 일주일 내내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던 적도 있다고 말했다. 이 씨는 “정년퇴직 후 시간에 여유가 생겨 친구 따라 종로에 나왔다가 이제는 매일매일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며 노인들에게 이만한 곳이 없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홍대, 신촌, 명동, 건대 등 돌아가며 다닐 곳이 많지만 노인들이 그럴 수 없어 종로만큼은 지키고 싶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씨와 술잔을 기울이던 김 모(남·67)씨는 낮에 다른 일을 하더라도 밤에는 꼭 종로를 찾는다고 말했다. 5년 전부터 종로를 찾았다는 그는 최근 아파트 경비 업무를 시작했다.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게 지루하고 아까워 종로를 찾기 시작한 그는 일을 시작하며 바빠졌지만 종로에서 얼굴 아는 친구들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삶의 낙이다.
김 씨처럼 종로를 찾는 노인들 중에서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 종로를 찾는 이들도 생각보다 많다. 대부분 혼자 지내기 때문에 하루를 공유하며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로를 찾는 노인들이 대다수다.
10년 넘게 종로3가역 앞 한자리에서 계란빵을 팔고 있는 안 씨는 “노인들이 많이 오긴 하지만 요즘에는 젊은 층이 늘어 상대적으로 줄었다”며 “예전 같은 분위기는 아니다”라고 전했다. 종로3가역 앞은 거리 하나를 두고 노인들의 거리 ‘종로’와 젊은이들의 거리 ‘익선동’으로 나뉘는데 최근에는 젊은 사람들이 익선동을 많이 찾는 터라 노년층의 비중이 줄었다는 것이다.
고령화 지속되는데, 노인 일자리는 제자리걸음
종로를 찾는 노인 대부분은 ‘실업 급여’를 받거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다. 이러한 노인들이 모이는 종로는 노인 일자리 문제, 복지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노인 일자리 충족률은 42.7%, 2019년 기준으로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를 원하는 노인은 119만 5000명인데, 준비된 일자리 수는 51만개에 불과하다. OECD 불평등 고령화 방지 보고서에 따르면 66~75세 노인의 상대적 빈곤률이 42.7%로 회원국 평균치(10.6%)의 무려 4배에 이른다. 고령화 속도를 사회보장 제도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하나같이 “일을 할 수 없다”,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일을 하기엔 몸이 성치 않고, 버는 만큼 실업 급여에서 깎이기 때문에 선뜻 나서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종로는 빈곤과 낙후성이 존재하며,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노인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노인들의 시간, 경험의 축적을 지니며 나름 활기를 띤 문화공간으로 형성된 종로, 다양한 이유로 종로를 찾는 그들이 안정된 소득 속에서 여가생활을 즐기며 살 수 있도록 노인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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