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스트는,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암묵적(?) 오해를 받고 있는 직업이기도 하다.
2010년 3월 미국 하원 본회의에서 가까스로 통과한 ‘오바마케어(ACA, Affordable Care Act)’ 법안을 두고 벌어진 로비전은 역사적으로 회자되는 쟁쟁한 로비전쟁 가운데 하나다. 단 7표 차이, 박빙의 승부로 법안이 의결되기까지 제약업계와 병원협회 등을 중심으로 한 찬성진영과 보험업계 등 반대진영이 의회와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각각 수십 억 달러의 자금을 쏟아부었는데, 이 로비전의 화룡점정을 찍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오바마 대통령이었다.
그는 종국에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단체들의 장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직접 협상을 진행했다는데, 그의 협상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지침서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다.
보통은 한 쪽이 유리한 입지를 점하지만, 나머지 한 쪽도 전체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결과. 로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협상은, 정교한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필자의 경우엔 최근 2여 년간 UN 산하기구 중 하나인 ITU(국제전기통신연합)의 정보보호부문 표준화 국제회의에 대한민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해 ‘로비 아닌 로비’를 한 경험이 있다. ITU는 UN의 모태가 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기구다. 필자가 참석한 회의는 ITU의 정보통신기술분야 표준화연구반(ITU-T, SG17)이었는데, 이 회의에는 전세계 정보보호(보안) 관련 전문가들이 각국의 대표단 자격으로 참석해 국제표준 연구와 제정을 위한 활동을 펼친다.
필자는 당시 몸담고 있던 IT기업의 블록체인 기반 패스워드리스 인증기술을 국제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다. 동료들과의 팀워크, 대한민국 대표단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세 번째 회기에서 해당 기술이 국제표준으로 사전채택되는 쾌거를 이뤘지만(보통 소요되는 기간의 절반), 긴장감 최고치로 스위스 제네바 ITU 본부 내 대회의실에서 열린 국제회의의 첫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국제회의 프로토콜에 익숙지 않았던 터라 회의 참석자라기 보단 방청객의 심정으로 ITU 본부 대회의장 맨 뒷자리를 택했는데, 첫 경험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우선 UN기구 회의가 주는 압도적 분위기에 눌렸고, 동시에 국제사회에서의 미국의 강력한 입김을 실황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향한 서방 주요국들의 날선 태도는 회의의 긴장감을 고조시켰고, 마지막으로 표준기술 선점을 두고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총성 없는 기술패권전쟁터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나라 대표단과 라포를 형성해야 할지 윤곽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제 막 국제회의 무대에 데뷔한 새내기에겐 ‘족보’가 없었다. 그나마 희망이라면 로비(?)의 대상들을 2주라는 충분한 시간 동안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발 빠른 정보수집 외에 왕도는 없어 보이는 상황. 외교가 그렇듯, 국제정세의 축소판과 같은 UN기구 회의에서 영향력 있는 국가와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필수다. 한 가지 더 하자면 ‘적’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 UN 의사결정방식의 모태가 된 ITU의 의사결정방식이 ‘만장일치’임을 안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회의가 하루 이틀 이어지면서 주옥 같은 정보들이 하나둘씩 입수되기 시작했다. ‘BTS’와 ‘블랙핑크’로 대표되는 K-POP과 K-드라마가 내 인생을 도와줄 줄이야! K-콘텐츠는 아이스 브레이킹의 훌륭한 소재가 됐다. 한국의 문화파워는 실로 강력했고, 한국은 세계인들이 선망하는 나라였다. 이후에도 ITU가 개최하는 여러 국제행사와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K-콘텐츠는 나의 소통에 날개를 달아줬다. 한국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로 호감을 얻었다.
여기서 필자만의 영업기술을 하나 공개하자면, 회의 집중도가 떨어지고 눈의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하는 오후 미팅 사이사이 ‘콩 하나도 나눠먹는’ 마음으로 나눈 초콜릿과 민트다. 이 지극히 한국적인 정(精)은 어제까지 데면데면했던 사람을 오늘의 ‘마이 프렌드’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초콜릿 하나가 커피 한 잔이 되고, 커피 한 잔이 점심 한 끼가 되고, 점심 한끼가 하루 일과 후 펍(pub)에서의 맥주 한 잔이 되고… 밥을 같이 먹어야 진짜 만난 것이란 말은 유니버설한 진리였다.
물론 일 얘기도 빠질 수 없다. 국제표준 승인이라는 목표를 앞두고 우리 기술의 우수성을 한 번이라도 더 어필하고, 타국 대표단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면 실제 회의에서 공격적인 챌린지를 받을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
회의 참석 2년 차에 접어들 땐 살갑게 지내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해 갔다. 한복 노리개, 자신의 이름이 한글로 새겨진 도장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감사와 아름다움에 대한 표현을 총동원했다. 도장을 찍을 때마다 한국과 필자에 대한 추억도 함께 각인되기를 바란다.
유에너(UNer: UN에서 활동하는 사람)로 활동하며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낸 데 필자의 ‘로비 아닌 로비’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의 그 ‘유사 로비’를 가능하게 한 공(功)의 5할은 브랜딩이 너무나 잘 된 K-콘텐츠에 돌리고 싶다. 혹 나머지 내 몫인 5할의 핵심을 묻는다면, 한국사람 특유의 ‘정(精)’을 담은 관심과 챙김이라고 답하겠다. 로비도 결국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는 것 아닌가.
장헌주 님은 홈쇼핑TV 마케터로 재직 중 도미(渡美), 광고 공부를 마친 후 중앙일보(LA) 및 한국경제매거진 등에서 본캐인 기자와 부캐인 카피라이터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딜로이트 코리아에 이어 IT기업 커뮤니케이션 총괄 디렉터를 역임한 후 지금은 크리에이티브 솔루션 랩 '2kg'에서 PR & 위기관리, 브랜딩 전문가로 세상의 일에 '시선'을 더하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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