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백정림 갤러리 이고 대표·<앤티크의 발견> 저자 | 사진 서범세 기자위험을 무릅쓴 항해는 그 끝에 달콤함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로벌 무역이 시작된 찬란한 그 역사적 순간.

[백정림의 앤티크] 향신료와 설탕, 식탁을 장식하다
(사진_왼쪽부터 시계 방향)스털링 디저트 접시(아르데코), 화병으로 쓴 스털링 오버레이 저그(아르누보), 스털링 베이스의 크리스털 화병(아르데코), 흑단 손잡이의
스털링 티포트(아르누보), 앰버색 베네치안 글라스 센터피스(아르누보), 오렌지색으로 핸드페인팅된 티잔(아르데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개인뿐만 아니라 세계와도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채 어느덧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이했다. 개개인에게는 여행에 대한 그리움이 있을 것이고,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닫힌 해외시장이 못내 아쉬운 상황이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발전하는 데 지역 간, 국가 간 교역은 언제나 중요한 이슈였다. 우리가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도 도시 간 교류가 없는 자급자족의 장원 경제였기 때문이다. 15세기 대항해의 시대에 이르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비롯한 탐험가들의 신항로 발견을 통해서 유럽인들은 과거 실크로드에서 시작된 동양을 향한 갈증을 풀 수 있게 됐다.

그러면 무엇이 유럽인들로 하여금 위험을 무릅쓴 항해를 하도록 만들었을까. 인도 캘커타항에 처음 도착한 바스코 다 가마에게 인도 사람들이 처음 건넨 질문은 “무엇이 당신들을 이 먼 곳까지 이끌었소”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향신료를 찾아 이곳까지 왔소”라는 것이 유럽인들의 대답이었다. 본격적인 글로벌 무역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양념의 광기, 십자군전쟁

동방산 향신료가 유럽에 수입된 것은 고대부터였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대 로마의 요리책에 따르면 후추는 80% 정도의 요리에 사용됐고 그 양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중세 말로 갈수록 동방으로부터 유럽으로 수입되는 향신료의 종류는 다양해졌다.

당시 양념이 많이 첨가된 음식은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다. 과다한 양념 사용은 맛을 좋게 하기보다 음식의 품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상류계급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인도제도로부터 아라비아를 건너 수입된 값비싼 조미료들은 그들의 부유함과 권위를 보여 주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중세요리가 ‘양념의 광기’로 일컬어지는 것은 평민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양념을 통해 신분을 과시하고자 했던 상류층들의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향신료와 관련 있는 역사적인 사건 중 하나는 11세기 말에 시작돼 13세기 말까지 계속된 십자군전쟁을 들 수 있다. 당시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들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었던 향신료의 교역로 확보를 위해 동방 이슬람교도와의 여덟 차례에 걸친 전쟁을 지원했다. 십자군전쟁은 이슬람교도의 점령하에 있는 성지 탈환이 본래의 목적이었으나, 십자군 원정을 통해서 당시 유럽인들은 그들보다 훨씬 선진국이었던 이슬람권의 문화를 접하고 문물을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향신료 교역로의 연결뿐만 아니라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설탕을 만드는 기술 또한 유럽에 전파됐다. 단맛을 내는 감미료라고는 꿀밖에 없었던 유럽인들에게 설탕의 맛은 신천지를 발견한 것과 같은 놀라움이었다. 또한 고결해 보이기까지 한 설탕의 흰색은 값비싼 몸값과 더불어 상류층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해서 유럽 사회에 알려지게 된 설탕은 최상류층에 의해서만 향유되는 희귀한 존재였다.

‘세계상품’은 곧 부의 과시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예외 없이 소비하고자 하는 상품을 ‘세계상품’이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물로 후추, 면화, 차, 설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두껍고 무거운 가죽이나 양모로 옷을 만들어 입었던 유럽인들에게 19세기 인도에서 얻게 된 면직물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얇으면서 선명한 색상으로 염색이 가능하며 세탁하기도 쉬운 면직물은 방직기술을 통해 제2차 산업혁명을 이끌며 세계 각국에서 선호하는 세계상품 중 하나가 됐다.

또한 역사상 세계를 움직여 온 세계상품 중 선두에 있는 것이 설탕이다. 이러한 설탕의 탄탄한 인기는 17세기 유럽에 전해진 세 가지 검은 음료와 깊은 관계가 있다. 세 가지 외래 음료인 커피, 초콜릿, 차가 처음 유럽에 전해질 때는 설탕을 넣지 않은 상태로 쓴맛을 지니고 있었다. 17세기 초반 유럽의 왕실들을 비롯한 상류층의 사치는 정점에 달했고,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쌓은 부유한 상공인들 또한 사치의 대열에 합류했다. 부유한 상공인이라는 새로운 계층이 점차 늘어나자 영국의 제임스 1세는 당시 신분에 따라 소비생활을 규제하던 법을 폐지했다.

신분에 따른 소비 규제가 풀리자 이국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과 귀족의 문화를 따라 하고자 하는 문화의 사대사상, 부의 과시욕들이 어우러져 차, 설탕, 도자기, 향신료 등과 같은 이국적 물건들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됐다.

비로소 설탕은 귀한 몸값에도 불구하고 약재를 넘어 식탁으로, 귀족을 넘어 부유한 중산층의 식탁에까지 진출하게 됐다. 당시 향신료는 동일한 무게의 은과 비슷한 가치였고 차는 동일한 무게의 은보다 더 비쌌다. 차를 마시는 것이 곧 신분의 상징이었고 여기에 값비싼 설탕을 넣어 마심으로써 상류층들은 그들의 품격을 더했다.

차와 설탕은 명실 공히 신분의 상징으로서 영국의 헨리 8세 시대에는 채소와 감자, 달걀, 고기에 넣었고, 심지어 와인에도 설탕을 넣어 마셨다.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만찬 테이블의 중앙을 차지했던 설탕 용기는 그리하여 점점 커져만 갔다. 설탕을 식탁에 우아하게 올리기 위해서 제과상인이라는 직업이 등장했다.

제과상인은 다양한 종류의 사탕과자를 만들고 디저트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형태의 사탕 모형을 만들어 식탁을 장식했다. 크리스털과 스털링으로 만들어진 설탕을 담는 센터피스는 놀라울 정도로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제작됐다.

앤티크로 전해지는 이러한 설탕용기들을 보면 지나치게 큰 느낌이어서, 옛사람들이 그렇게 설탕을 많이 먹고도 건강상 문제가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실제로 설탕 사랑이 각별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말년에 치통으로 고생하다 치아를 모두 잃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그램 yigo_galler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5호(2020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