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l 사진 김영애 씨 제공] 2018년 8월 4일 유럽 크로아티를 출항해 지중해, 대서양, 태평양 망망대해를 누비며 2019년 8월24일 한국에 입항한 생활요트인 김영애 씨가 385일 항해일지를 공개했다.
김 씨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 그리고 손자를 둔 대한민국의 평범한 60대 주부다. 흔히 요트인 하면 떠오르는 슈퍼 부호의 화려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기미와 검버섯으로 가득한 손등이 그의 오랜 항해를 말해 줄 뿐이다.
개인의 즐거움으로 시작한 요트이지만, 1년의 항해를 마치며 그에게는 하나의 사명이 생겼다. ‘생활요트’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김 씨는 유럽의 은퇴자들이 흔히 누리는 요트 라이프를 한국의 50, 60 은퇴자들 역시 누리길 원한다. 타향에서 한 달 살기를 생각하고 있다면, 요트에서 한 달 살기는 어떠하냐고 묻는다. 생활 요트의 활성화를 말하는 김 씨를 만났다.
-1년여의 요트생활을 지난해 8월 마무리했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지난해 8월 입항 후 요트항해 중 찍은사진을 전시하려고 했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무산되면서 전시회를 7월 말로 연기해 현재 준비하고 있습니다. 385일의 항해일지를 담은 이야기도 쓰고 있어요.”
-지난 385일의 항해일지는 어떤 일정이었나요.
“2018년 7월 16일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모스크바에 내렸어요. 그곳에서 크로아티아로 이동해 항해 준비를 하다가 8월 4일에 출항했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13개월 항해 후 2019년 8월 24일 목포 마리나에 닻을 내렸네요. 385일. 항해 준비 기간까지 합하면 총 405일의 일정이었습니다.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몰타, 스페인, 폴리네시아 등 총 17개국을 거치며 지중해, 대서양, 태평양을 횡단했습니다. 계획에 없었지만 뜻밖에 인연을 만나 항해 중 한국 요트 최초이자 한국 여성 최초로 34개국 170여척의 요트가 참가한 대서양횡단랠리 ARC2018(Atlantic Rally for Cruisers)대회에도 참가해서 KAPRYS AWARD상을 수상했습니다.
-요트항해 후 주변의 많은 관심을 받았겠어요.
“질문이 다 똑같아요. 딱 3개 있죠. ‘돈이 많은가 봐요’, ‘누구랑 갔어요’, ‘안 무서워요.’”(웃음)
-저도 궁금해요. 돈이 많은가 봐요.
“한국인 중산층 가정이면 누구나 할 수있어요. 정말이에요. 물론 배를 구매하거나, 렌트하지 않아도 요트를 즐길 수가있고요. 왜, 유럽 여행 가면 짧게 가도 기본적으로 400만~500만원씩 쓰잖아요. 물가는 한국의 3분의 1 수준인데. 그럴 바에야 요트여행은 어떨까 제안하고 싶어요. 현지에서 자동차처럼 렌트도 할 수 있고 많은 온오프라인에서 요트 크루를 모집하고, 그때 좋은 배에 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어요. 돈보다 용기가 없는 거예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누구랑 갔나요.
“요트는 3명 이상이 타야 해요, 동력의 힘으로 1명이 배를 몰 수 있는 파워 요트와 달리 세일 요트는 2명 이상의 협동이 필요하거든요. 1명이 운전대를 잡으면 다른1명은 돛을 관리해요. 쉼 없이 돌아야 하기에 3교대로 나눠 배를 몰죠. 요트 동호회에서 마음 맞는 사람이 모였고, 그때그때 나라에 정박할 때마다 원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배에 함께 탔어요. 가끔 요트하면 ‘로맨스’를 떠올리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건 세일요트에서 환상, 아니 망상에 가까워요.
-이번 항해 중 가장 아름다웠던 곳은 어디였나요.
“파나마 산브라스예요. 세계 각국 요티들이 최고로 선호하고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꼽혀요. 지상낙원이죠. 약 365개의 섬과 카이로 구성된 군도인데 유인도가 45개, 나머지는 무인도예요. 바다가재, 대왕소라가 바글바글해요.한 양동이 가득히 50달러죠. 문어와 생선도 값싸고 맛있는 곳이에요. 이곳은 재작년에도 방문했었는데 원주민 마을에 두 번째 갔더니 정말 반갑게 맞아 주셨어요. 살림살이가 변변치 않은데도 훈제고기와 바나나를 대접해 주셨죠. 원주민부부를 요트로 초청해 한국에서 기념선물로 가져간 태극선 부채도 드리고 한식 식사를 대접했어요. 다음 날 새벽에 출항한다고 했더니 떠난 다는 신호로 대왕소라를 불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분들을 향해서 나각을 3번불고 출항하는데 가슴이 뭉클했어요"
-무섭지는 않았나요.
“20대 때부터 레저를 즐겨했는데 아주다양하게 많이 했어요. 스키, 스노보드,스킨스쿠버, 패러글라이딩, 승마 등. 요트 제안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돛단배를 타고 어딜 가, 위험하게. 그랬어요. 그러던 중에 스킨스쿠버로 수중탐사를 하면서 갈라파고스와 남아공처럼 가기 어려운 나라들을 요트항해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주저함 없이요. 2008년 경기화성 전곡항에서 열린 제1회 코리아 매치컵 세계요트대회가 그런 저의 생각에 불을 지폈어요. 결심했죠. 요트를 타야겠다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공부했습니다. 면허를 따고, 지금에 이르렀네요.”
-어릴 적부터 레저를 즐겨하셨군요.
“모험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선 현모양처를 꿈꾸기도 했어요. 딸이 세 살무렵 됐을까. 갑자기 제 이름이 없어진 것에 슬픔이 밀려오더라고요. 누구 엄마,누구 아내. 아니, 내 이름은? 아이를 데리고 286컴퓨터를 배웠어요. 일을 할 수 있었죠. 주중에 일하고 육아하고. 주말 자투리 시간에는 레포츠를 했어요. 제가 번돈을 모아서 하나둘씩 생활 레포츠들을 시작했어요.”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레저를 했고, 크면서는 함께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반대하지않고 지지해 주죠. 지금도 제가 갑자기 분주하게 집안일을 다 하고, 일을 열심히 하면 곧 (항해하러) 떠나겠구나 해요.”
-아름다운 풍경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싶다는 아쉬움은 없었나요.
“항해 중 돌고래 떼를 보면 신났어요. 손주 재원이가 좋아할 생각에 영상을 찍었죠. 아이들 생일에는 아침에 찍은 해돋이 사진을 보내 주었어요. ‘남자 열 몫하고살아라. 여자라고 기죽지 말라’고 말씀하신 할머니 생각도 많이 나더라고요.”
-망망대해에 있으면 외로움도 클 것 같아요.
“날마다 드라마틱한 신비의 세계를 주는 바다가 있어 외롭지는 않았어요. 돌고래군무, 바다제비, 무지개, 구름, 바람, 뜨거운 태양, 소나기, 태풍, 돌풍.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게 없어요. 정신없이 하루일상 을 지나다 보면 외로울 틈이 없어요. 다음 기항지에 대한 기대도 크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요.
“항해를 하다가 대서양 횡단대회(ARC)에 참가했어요. 대회는 남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는데 출사 중에 만난 할머니께서꼭 나가야 한다고 추천해 주셨어요. 영국에서 주최한 대회인데 세계 34개국에서 참가 요트만 173대로 큰 대회였어요. 저희가 얼마나 계획이 없었냐면 대회에서 요구하는 안전용품을 마련하기 위해 600만 원을 더 써야 했어요. 폭우 속에 대회가 시작했는데 우리가 마지막 참가신청 팀이었죠. 태극기가 게양되는데 그때 정말기분이 좋더라고요. 한국인 최초 출전이었어요.”
-대회는 어땠나요. 완주하셨나요.
“출항 7일 만에 대형 참치 폐그물에 걸렸어요. 파도가 잠잠해지는 오전에만 스쿠버 장비를 차고 바닷속으로 들어가 그물을 제거했어요. 꼬박 1박 2일이 걸렸어요. 당연히 항해도 중단됐고요. 바람이 없을 때 수중장비를 차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그물을 제거하는데 좀 힘들었어요. 출항 13일째 되는 날, 새벽 4시에본부에서 문자가 왔어요. 1등 도착 요트가 나왔다고. 우리는 앞으로도 10일은더 가야 되는데. 곡절 끝에 24일 만에대회 종착지인 카리브해 세인트루시아에 도착했어요. 완주 팀까지 기다려 시상식이 열렸는데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어요. 경기가 끝났지만 포기하지 않고 완주한 팀과 경기 중 그물에 걸린 거북이를 구해준 요트 팀이 제일 큰 상을 받아갔어요. 최연소상과 최고령상도 있었는데 4세와 84세였어요. 아이들도 20명이나 됐죠. 모두 승패와 상관없이 축제처럼 즐겼어요. 할머니께서 제게 이 대회를 권한 이유를 알았죠. 다른 분들도 이 대회만큼은 꼭 참가했으면 좋겠어요.”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요.
“필리핀 사이판~일본 오키나와 10일 항해 마지막 날 태풍 5호 ‘다나스(Danas)’가 왔는데 직격탄을 맞았어요. 절대 뒤집어지지 않는 요트를 믿지만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불안감까지 들더라고요. 말로만 듣던 태풍의 위력을 바다 한가운데에서 직접 체험했으니. 태풍을 피해섬 연안에 묘박했는데 닻을 올려놓고 보니 엘(L)자로 휘어졌더라고요. 이번 항해 중 최고로 힘든 순간이었어요.”
-요트 위에선 매순간이 그렇게 극적인가요.
“이렇게 며칠 더 산다면 미쳐 버리겠다 싶을 정도로 지루했던 적도 있었어요. 마치 설국열차를 탄 기분 같았어요. 타 본 적은 없었지만. 하나님께 지루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죠. 그러고 얼마 안 가 처음으로 파도를 온몸에 뒤집어썼어요. 지루할 새도 없이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만남도 많았겠어요.
“만남을 기억하기 위해 늘 출항 전 기념품을 가져가요. 이번에는 태극부채를 60개 정도 샀고, 만나는 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분들에게 선물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게 제 보물이죠. 항해를 하다 보면 원주민들도 만나지만, 한국인들 역시 만나는데요. 스페인 팔마데 마요르카에 도착했을 때인데 여기에 애국가를 만든 고 안익태 선생의 유택이있어요. 안 선생의 막내 따님인 레오노르안 씨가 반갑게 맞아 주시며 선생의생전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참 기억에 남았어요. 요트에 걸린 태극기를 보고서 저희를 찾는 분들도 많아요. 스페인의 한 마리나항에서는 내 딸이 부산에살고 있다며 눈물을 흘리시는 분을 만났어요. 태극기만 보고도 우실 정도로 고국에 그리움이 깊으셨더라고요.”
-405일 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내 안에 들어 있는 밀린 숙제 한 가지를해 놓았다는 후련함이 있었어요. 동시에 다음 항해 때는 더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고생하고도 또 뛰어드는 바다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파도 한 점,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풍의 순간이 있어요. 까만 어둠 속에 별빛이 쏟아져 내리는데, 갓 난 아기별까지 다 나와요. 그 별빛이 수면 위로 투명하게 비추죠. 하늘과 바다가 다 별이에요. 사진으로는 절대 표현이 안 되죠. 아무리 바닷물로 샤워를 해도, 미지의 세계에 도착하는 순간…. 그 희열이 바다로 이끌게 해요.”
-바람이 있다면.
“이제 100세 시대잖아요. 한국의 은퇴자, 60~70대분들이 유럽인들처럼 생활요트를 즐겼으면 좋겠어요. 제가 스페인 마리나에서 깜짝 놀란 적이 있어요. 아파트 5동을 합친 것보다 큰 크루즈선 2척에서 사람이 내리는데 90% 이상이 노인들이었어요. 휠체어를 타고 내린 분은 물론, 간이침대에 누워 내린 분도 있었어요. 보호자와 함께하긴 했지만요. 한국에서는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아프다고 집이나 병원, 시설에 있는 것보다 이렇게 관광을 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스위스에서 요트를 타고 온 노부부도 정박한 곳에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기약 없이 머문다면서 제가 일주일도 안 돼 다른 나라로간다고 하니, 요트에 비행기 날개를 달았냐고 이해를 못하시더라고요. 그들은 그냥 요트 위에서 여행을 하는 게 생활이 된 거예요.”
-생활요트가 무엇인가요.
“생활여행자라고 아시죠? 관광만 하는게 아니라 한 달 살기 식으로 여행에서 일상을 사는 거예요. 항해 중에 참 다양한 가족을 만났어요. 요트 위에서 부모와 함께 홈스테이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요즘 그게 새로운 여행·유학 스타일이래요. 항해 중에 정박한 해외의 일반 가정과 함께 하면서 풍속, 습관, 어학, 문화 등을 배우는 거예요. 요트에서 태어난 아이도 봤으니 정말 요트 위가그들의 생활이 된 거죠. 그들이 과연 4년제 정규교육을 받은 친구들보다 얻는게 없을까요. 전 이 친구들이 커서 할 수있는 일이 무궁무진하다고 봐요. 요즘 한국에서는 제주 한 달 살기처럼 다른지역에서 살기가 유행한다죠. 저는 요트 한 달 살기가 유행했으면 좋겠어요.”
-요트를 하려는 분들에게 조언한다면.
“첫째, 가장 중요한 게 사전 지식을 쌓는것이에요 .한국에는 화성, 목포, 부산 등에 요트학교가 있어요. 면허도 따야 하고요. 대양항해를 준비한다면 기계에 대해서도 숙지해야 해요. 그리고 굶어 죽지 않으려면 꼭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해요. 마지막으로 ‘요트는 움직이는 집’이라는 것을 마음에 품어야 해요. 집에서는 집주인이 모든 걸 할 줄 알아야 하잖아요. 전기수리든 배관공이든, 안 그러면 누군가를 불러야 하죠. 요트는 움직이는 집이에요. 누군가를 부를 수 없죠. 요트 위에서 내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걸 알아야 해요.”
-망설이는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두 마리 토끼는 못 잡아요. 새로운 일에는 ‘시작이 반이다’를 생각함과 동시에 행동하고 도전해야 해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요.
“3~4년 후에는 장기 세계일주를 계획하고 있어요. 최소 5년, 어쩌면 10년이 걸릴지도 모를 일이죠. 그동안 할 게 정말 많아요. 1년의 항해를 하며 제가 엔진과 요트정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걸 알았어요. 항해중 요트에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고 본인이 해결해서 항해를 해야 하거든요. 요트에 있는 모든 기계장비를 다시 공부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더 많은 한국 요티 분들과 교류할 수 있길 기대해요."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81호(2020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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