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전에서 다시 읽는 리더십

[한경 머니 기고 = 김성신 출판평론가·한양대 창의융합교육원 겸임교수] 2018년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가 약 한 달간의 간격으로 국내에서 개봉했다. 하지만 두 영화는 흥행 성적이 극명하게 갈렸다. 이유가 무엇일까. 두 영화의 ‘세계관’을 비교해 그 ‘원형’을 고전에서 찾아보았다. <스타워즈>의 세계가 <삼국지>와 유사했다면 <어벤져스>의 세계는 <수호지>와 일맥상통했다.

[special] 삼국지 vs 수호지, 세계관이 가른 리더십

영화 <어벤저스> 시리즈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면 젊은 것이고, 재미를 못 느끼면 늙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농담에 가까운 말이다. 그러나 우린 혈액형별 성격 차이도 열심히 믿지 않는가. 그에 비하면 이게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어벤저스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에 대해 공통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짬뽕’이다. 이 영화 저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슈퍼히어로들이 <어벤져스>에선 한꺼번에 몰려나오니 그렇게 표현한다.


<어벤저스> 시리즈는 마블 코믹스의 프로듀서 케빈 페이지(현 마블 스튜디오 사장)가 ‘마블의 영웅 캐릭터들이 한 팀을 이루면 흥미롭지 않을까’ 하는 발상을 하면서 시작됐다. 우리로 치면 ‘심청이와 콩쥐와 장화와 홍련이가 홍길동의 활빈당에 가입해 모두 함께 팥쥐, 뺑덕어멈 연합과 싸우다가 나중에 율도국에 다 같이 모여 살게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뭐 이런 발상과 비슷하겠다. 아무튼 지난 2018년, 영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가 약 한 달간의 간격으로 국내에서 개봉했다. 그런데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국내에서만 무려 11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반면, <한 솔로: 스타워즈 스토리>는 고작 21만 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참패했다. 전 세계 흥행 성적 역시 국내와 거의 같았다.


<스타워즈> 시리즈는 거대한 팬덤과 그 규모를 자랑하는 역사적인 SF 시리즈다. 선과 악의 처절한 대립이라는 신화적인 주제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거대한 우주 전쟁의 스펙터클, 그리고 화려한 검술 액션과 수많은 명대사 등으로 주목을 받아오며 거의 모든 시리즈가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 영화다. 그렇다면 <스타워즈> 시리즈 중에서 유독 <한 솔로>만이 엉망진창 수준의 B급 영화였을까.


그렇지 않다. 영화 평론가와 관객 모두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고, 전체적으로 준수한 액션과 스펙터클을 가진 괜찮은 여름철 블록버스터라”고 평가했다. 이 두 영화를 보며 <인피니티 워>보다 <한 솔로>가 훨씬 재미있었던 나는, 예상을 뒤엎은 두 영화의 흥행 결과가 몹시 당황스러웠다. ‘이토록 시대적 감수성과 동떨어졌다면, 나는 평론가라는 직업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다.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로 했다. 두 영화의 ‘세계관’을 비교해 그 ‘원형’을 고전에서 찾아보았다. 나는 <삼국지>와 <수호지>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다. <스타워즈>의 세계가 <삼국지>와 유사했다면 <어벤져스>의 세계는 <수호지>와 유사했던 것이다.


<수호지>로 연결되는 시대적 감수성
<수호지>는 12세기 초 중국의 원말 명초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산적 송강과 그를 따르는 유협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데, 수세기 동안 구전돼 내려오면서 새로운 요소들이 덧붙고 더해져 16세기에야 비로소 소설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1370년 시내암이 정리하고 나관중이 손질해 공저로 펴낸 것이 지금껏 정본의 역할을 하고 있다. <수호지> 속 주인공인 108명의 유협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양산박에 모여든다. 그들은 부자의 재물을 강탈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동지에게는 의리를 다해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간신배에게 둘러싸인 황제의 무능과 실정, 그리고 조정의 부패를 통탄하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정의와 의로움을 행한 것이다. 여기까지가 <수호지>의 전반부다. 후반부에서 이들은 황제의 사면을 받아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게 되지만, 제도권 속 간교한 간신들의 계략에 의해 하나하나 쓰러져 간다.


따라서 전반부는 호쾌하고 신나는 반면, 후반부는 장렬하고 가슴 아픈 장면들이 이어진다. 한편 <삼국지>는 후한 말부터 위·촉·오 삼국이 건설되는 과정을 거쳐서 진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수호지>와 마찬가지로, 구전돼 온 이야기들을 14세기에 나관중이 다듬고 정리해 편찬한 장편 역사소설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삼국지>는 유비, 관우, 장비 이렇게 세 인물의 무용과 제갈공명의 지모를 중심으로 서술돼 있다.


충성과 희생보다 ‘존중과 연대’의 세계관

[special] 삼국지 vs 수호지, 세계관이 가른 리더십
<삼국지>에 나오는 수많은 장면 중에서도 유독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되는 고사가 있는데 바로 ‘읍참마속’이다. 남의 목을 벨 일이 여전히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말을 직역하면 ‘울면서 마속을 베었다’다. 제갈량은 위나라를 물리칠 작전이 있었으나 꼭 한 곳이 불안했다. 이곳을 위군에게 빼앗긴다면 촉군은 큰 위기를 맞을 수 있었다. 이때, 한 장수가 나섰다. 그가 바로 마속이었다. 그는 젊지만 유능한 신하였다. 제갈량은 주저하지만, 마속은 실패하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며 거듭 자원한다. 결국 제갈량은 신중하게 처신할 것을 권유하며 전략을 세워 준다. 그러나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다른 전략을 세웠다가 대패하고 만다. 결국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벤다.


말하자면 제갈량은 마속을 혈육만큼이나 아꼈지만, 그들이 맺은 관계는 직장 동료 간의 우애 따위가 아니었다. 제갈량은 마속의 가부장에 가깝다. 가부장이란 봉건사회에서, 가장권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다. 즉, 가족에 대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절대적 권력이란 말 그대로 생사여탈권이 포함된 절대적 권력이다. 따라서 ‘읍참마속’은 마속에겐 절대 감정이입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제갈량에게만 자신을 투영할 수 있어야만 ‘고사성어’로서 기능할 수 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것까지만 가슴에 새겨야지, ‘그럼 일찍 일어나는 벌레는?’이라고 입장을 바꿔 반문하게 되면, 이는 전혀 교훈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원리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읍참마속에 대한 공감도를 묻는다면 ‘가부장적 입장’을 경험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세대마다 공감도에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어떤 젊은이가 그렇게 값없이 남의 장난감처럼 죽고 싶겠는가.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자신의 조직에서 리더라는 사람이 ‘읍참마속’이나 운운하고 있다면 당장 거기서 빠져 나오기를 권한다. 희망도 비전도 없는 데다 부도덕한 조직일 수 있다.


이에 비해 <수호지>는 같은 봉건시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가 <삼국지>와는 다르다. 그들도 황제에게 충성하는 대의명분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무능한 황제는 간신배들의 농락을 스스로 방어하지도 못한다. 그 때문에 배신당하고 죽어가지만 그래도 그들은 자신에게 스스로 의를 행한다는 자의식이 있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스스로를 바친 것이다.


<수호지>는 선과 악의 시비를 떠나 그 시대가 안고 있었던 불합리함에 고개 숙이지 않고 장렬하게 맞서는 각자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음의 가치가 다른 것이다. 임충, 양지, 송강 등과 같은 지주 출신이나 벼슬아치 출신들도 있지만, 노지심, 이규, 무송 같은 낮은 신분의 인물들도 최소한 <수호지>라는 스토리텔링 안에서는 대등하게 존중받는다. 각자가 자신만의 캐릭터로서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를 전쟁터에 비유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노동은 죽을 만큼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죽도록 애써야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고 생존도 도모할 수 있다. <삼국지>든 <수호지>든 모두 사람이 죽는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오늘날까지 리더십의 교본처럼 읽힐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두 권 모두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법에 대해 매력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2권은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 <삼국지>가 ‘권력으로서 사는 법’을 말한다면, <수호지>는 ‘사람으로서 죽는 법’을 말한다.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 <어벤져스>의 인물들은 수평적인 관계로 연결돼 있다. <삼국지>의 인물들은 삼국통일의 거대한 대의와 명분 속에서 각자의 주군에게 충성하며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다. 사람이 서로 맺는 관계가 이렇게 수직적이라는 측면에서 <스타워즈> 속 인물들의 관계와 몹시 유사하다. 반면, <수호지>에서는 당대의 영웅 호걸들이 연대해 부패한 중앙 권력에 저항한다. 이는 수많은 슈퍼 히어로들이 각자의 능력을 연대해 거대한 악의 세력과 맞서는 <어벤져스>와 원형이 같다.


영화든 문학이든 스토리텔링을 통해 사람이 재미를 느끼려면 우선 충분히 공감하고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 세계 속에서는 아무도 본적이 없는 상황과 배경을 제시하는 SF라 해도, 거기에 어떤 식으로든 ‘나’를 집어넣어 상상할 수 있어야 흥미가 생긴다. 두 영화에서 엇갈린 흥행 성적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스타워즈>보다는 <어벤져스>에 훨씬 공감한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스타워즈>보다 <어벤져스>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새로운 인류. 조만간 세대 권력을 쟁취하게 될 이들은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도 자신들만의 세계관을 조성해 가고 있다. ‘기생이 아닌 공생’, ‘경쟁이 아닌 연대’를 사회적 관계의 토대로 만들려는 움직임도 바로 이 시도에 포함된다. 약탈보다 존중이 필요한 이유다.


<수호지> 속 영웅들처럼, 존중과 연대를 통해 상생의 길을 모색하고 기획하는 것이야말로 리더들에 대한 이 시대의 강력한 요구다. 리더가 되려면, 이제 삼국지에 갇혀 있던 가치관에서 더 나아가야만 한다. <수호지>를 꼼꼼하게 다시 읽어 봐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9호(2020년 04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