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우리는 왜 ‘느슨한 연대’에 주목하나

[한경 머니 기고=김용섭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장] 라이프 트렌드에 대한 분석은 소비 트렌드보다 거시적 관점으로 좀 더 넓게, 사회와 사람, 욕망과 변화의 연결된 흐름을 파악하는 것을 핵심 가치로 한다. 2020년 가장 주목하는 라이프 트렌드 이슈는 바로 ‘느슨한 연대(weak ties)’다.


어떤 이슈가 사회적·문화적 트렌드가 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다. ‘우연’이 아닌 ‘이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라이프 트렌드는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이 되는 의식주를 비롯한 라이프스타일과 사회적·문화적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를 통해 그 사회가 가진 변화의 방향과 그로 인한 소비와 비즈니스의 흐름, 그리고 사람들의 욕망을 분석한다.


가족·직장·인맥, ‘끈끈한 연대’의 종말
그렇다면 왜 하필 ‘느슨한 연대’를 2020년 트렌드 화두로 제시했을까. 우리는 혼자서만 살아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혈연 중심의 가족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 오히려 과거에 비해 더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교류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가 국가를 초월해서 ‘친구 맺기’를 쉽게 만들었는데, 같은 나라 같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과의 연결은 더 쉬울 수밖에 없다.


소셜네트워크에서 누구나 쉽게 연결되고, 그 연결이 현실로도 이어진다. 느슨한 연대라는 말은 소셜네트워크가 확산되면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처음엔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연결에 국한시켜서 봤다. 실제 현실에서의 연결이나 진짜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에서 클릭 한번으로 친구가 되고, 누구나 서로에게 말을 걸 수 있게 되면서 관계에서의 수평화가 소셜네트워크 내에서는 이뤄졌다. 그리고 쉽게 친구가 됐듯 쉽게 단절도 된다.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소통과 관계 맺기의 방식이다 보니 진짜 현실과 달리 일방적이어도 무리가 없었고, 일시적이거나 일회적이어도 무방했다. 그렇게 소셜네트워크가 우리에게 느슨하게 연결되는 경험을 준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에서만 통하던 코드가 이제 진짜 현실로 넘어온 것이다. 느슨한 연대를 라이프 트렌드에서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끈끈한 연대’라고만 믿어 왔던 대표적 3가지가 가족, 직장, 인맥이다. 이 3가지가 우리 인생 전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도 하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의해 줄 수도 있었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 혈연으로 묶인 가족이야말로 끈끈함의 결정체 같았고, 가부장적 가족관을 통해 가문을 만들고 친척과의 연결도 끈끈했다.


직장은 평생직장, 종신고용이란 말로 가족 같은 끈끈함을 만들었다. 점심을 함께 먹고 저녁도 회식을 하며 같이 먹는다. ‘밥 먹는 관계’라는 식구가 되는 셈이다. 과거 직장에선 진짜 가족보다 더 식구 같은 존재가 직장 동료였다. 가족에게도 소홀해 가며 직장에 충성하고, 직장이 곧 자신의 인생 전부인양 여겼던 것은 종신고용 시대의 문화였다. 인맥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혈연, 학연, 지연을 비롯해 직장에서도 군대에서도 기수를 따지며 인맥 속 서열을 정했다. 한국 사회에선 가족과 직장, 인맥은 끈끈하기만 했었다. 이런 끈끈함이 불편하게 여겨진 사람들이 증가하게 된 것은 시대적 변화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문화가 퇴조하고 개인주의적 문화가 부상했다. 결혼과 출산을 더 이상 필수라 여기지 않고, 독신과 자발적 고립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지금 시대의 혼인율과 출산율은 모두 밀레니얼 세대가 만드는 지표다. 그들이 바로 결혼과 출산을 결정할 직접적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역대 최저의 혼인율과 출산율, 이건 밀레니얼 세대가 가족을 원치 않아서 생긴 일일까. 아니다. 결혼제도에 대한 반감이자 현실적으로 결혼과 출산이 그들에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경제적 부담도 크지만 더 결정적인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다.


새로운 연대가 필요하다
전통적인 가족관을 대체할 새로운 가족관도 대두된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서 법제도와 핏줄로 연결된 끈끈한 관계만을 가족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끈끈함이 부담스럽다. 불투명한 미래에 누군가를 계속 책임진다는 것도 부담이고,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가족을 책임지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가족관은 더더욱 엄두가 안 난다.


그렇다고 혼자서 고립되듯 외롭게 사는 것을 원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한동안 혼자 사는 사람들의 나 홀로 혼밥이나 혼술 문화가 싱글 이코노미가 되며 중요한 소비 트렌드로 부각됐다. 여전히 혼자 사는 사람도 많고, 싱글 이코노미는 활발하다. 하지만 혼자 산다고 고립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결혼이란 제도와 그에 따른 출산을 포기한 것이지, 고립되고 외롭고 싶은 게 아니다. 처음엔 우리 사회가 ‘나 홀로’와 ‘우리 함께’가 서로 대치되고 상반되는 개념으로만 이해했다. 혼자거나, 함께이거나 2가지밖에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추가된다. 혼자와 함께의 중간 지점, 즉 혼자지만 가끔 함께가 되는, 서로 연결되긴 했지만 끈끈하진 않는, 바로 느슨한 연대다. 1인 가구의 증가, 출산율과 혼인율이 역대 최저가 되는 현실이 바로 느슨한 연대 개념을 소셜네트워크가 아닌 진짜 현실 세상으로 끌어온 것이다.


친구끼리 한 집에 어울려 살면서 서로를 챙기고 같은 밥 먹고 어울린다면 이 또한 가족일 수 있다. 셰어하우스가 계속 확산되는 것은 이런 대안가족을 좀 더 현실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친구의 범위를 또래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집이 필요한 대학생과 남는 방이 있고 외로운 노인을 서로 연결시켜 한 집에 살면서 느슨한 연대로 묶이는 시도는 유럽에서 오래전부터 계속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시도된 바 있다.


느슨한 연대는 전통적 가족관이 무너진 시대에 필요한 사회적 대안일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서도 유럽에서 보편화된 결혼과 동거를 절충한 대안적 제도가 필요하다. 일종의 ‘생활동반자법’이다. 1인 가구가 증가하는 시대, 연인 간의 동거만이 아니라 친구 간, 이성 간, 동성 간 다양한 동거가 이뤄진다. 싱글맘끼리의 동거도 가능하고, 노인들끼리의 동거도 가능하다. 현재는 이런 동거는 모두가 법적 제도와 무관하다. 즉, 법적으론 가족으로 전혀 인정받지도, 보호받지도 못한다.


함께 같은 집에 살고, 같이 밥을 먹고, 서로를 챙겨 주지만 이들은 가족이 아니다. 우리의 민법에선 배우자, 직계혈족 및 형제자매로 가족을 규정한다. 결혼을 하거나, 피로 연결된 사이가 아니면 가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결혼 중심의 가족 규정이 법으로 명시된 것이다. 그만큼 우린 결혼을 가족을 만드는 절대적인 방법으로 정해 두고 있다.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이 먼저 바뀌었다. 법제도가 이제 그걸 따라갈 차례다. 현실과 괴리된 법제도로는 지금 시대 사람들의 요구와 행복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 동료는 식구가 아니다
“We’re a team, not a family(우리는 스포츠 팀이지 가족이 아니다).” 이건 넷플릭스의 조직문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회사는 일하러 모였다. 나이가 몇 살인지, 얼마나 오래 일했는지보다 지금 시점에서 누가 가장 실력이 있느냐가 중요한 게 회사다. 프로야구 팀에서 나이나 연차 순으로 에이스가 되는 게 아니다. 루키여도 가장 탁월한 실력을 가졌으면 에이스가 된다. 한국적 조직문화가 나이 서열화를 근간으로 했었는데, 최근 들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LG그룹은 지난 연말 임원 인사에서 한국의 대기업에선 유례없는 만 34세 여성 상무를 발탁했다. 여러 대기업에서 30대 임원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한국의 조직문화에서도 능력 위주, 수평주의가 확산 중이다.


호봉을 없애고 연봉 평가에서도 역할과 능력 위주로 바꾸는 추세다. 공채를 없애고 수시채용으로 바꾸는 기업이 속속 늘고 있다. 기수 문화, 선후배 관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직장은 친목단체가 아니라 기업의 성장이라는 공동의 목표로 모였다. 더 이상 과거식 끈끈함을 운운하기엔 산업 환경도 너무 바뀌었다. 한번 입사했다고 퇴사할 때까지 책임져 주는 기업은 없다. 직장은 같은 목적을 가진 이들의 연대에 불과하다. 영속적 연대가 아닌 일시적 연대다.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직장인의 시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밀레니얼 세대 직장인들에게 노동조합은 결코 기성세대가 바라보는 노동조합과 같을 수 없다. 노조의 위상이 약화되는 것도 이런 변화와 무관치 않다. 평생직장이 사라진 시대다. 끈끈함 대신 느슨한 연대가 직장에서도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시점에 우린 선택을 해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연결돼 있는 관계가 가지는 장점은 일부 취하되, 그런 연결이 주는 부담스러움이나 복잡함은 덜어 내겠다는 태도가 ‘느슨한 관계’를 만들어 냈다. 집단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다소 이기적인 태도로 보이지만,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태도다. 그리고 이건 개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선택이다.


느슨한 연대가 단지 가족과 연애, 사람들 간 관계 얘기가 아니라 직장·조직문화와 주거환경, 부동산과 도시 등에까지 영향을 미칠 중요한 트렌드 코드다. 느슨한 연대가 결혼과 출산에 미치는 영향, 느슨한 연대가 직업관 및 직장문화에 미치는 영향, 느슨한 연대가 주거문화에 미치는 영향, 느슨한 연대가 선거 및 정치에 미치는 영향, 느슨한 연대가 소비 트렌드에 미치는 영향 등이 우리가 고민할 이슈다. 느슨한 연대는 강력한 메가 트렌드로 앞으로 점점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김용섭 소장은…
트렌드 인사이트와 비즈니스 크리에이티비티를 연구하는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장이자 트렌드 분석가다. 저서로는 <라이프 트렌드 2020: 느슨한 연대>, <요즘 애들 요즘 어른들: 대한민국 세대분석 보고서>, <라이프 트렌드 2019: 젠더 뉴트럴>, <실력보다 안목이다>, <라이프 트렌드 2018: 아주 멋진 가짜 Classy Fake>, <라이프 트렌드 2017: 적당한 불편>, <라이프 트렌드 2016: 그들의 은밀한 취향> 등이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8호(2020년 03월) 기사입니다.]